74화
그 말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칸나와 아디엘이 시선을 마주쳤다.
조금 전 궁으로 돌아온 메이딜리언의 분위기가 어쩐지 심상치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도저히 말을 붙일 만한 상태가 아닌 것 같은 흉흉한 표정에 칸나와 아디엘은 적당히 몸을 사린 참이었다.
그럴 때의 메이딜리언은 최대한 건드리지 않는 게 상책이라는 것을 익히 경험으로 알고 있던 덕분이었다.
“저, 2황자 전하라면 제가 어디 계시는지 알고 있습니다.”
윈터의 질문에 대답한 것은 뜻밖에도 올리비아였다.
올리비아를 마주한 윈터의 눈에 잠시 이채가 어렸다.
“인사가 늦었군요, 올리비아 시녀장님.”
“저야말로 드디어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소공작 각하.”
줄곧 상황을 지켜보며 뒤쪽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올리비아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가 한때는 매수를 당해 자신의 암살을 계획했다는 걸 윈터는 이미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지만 이미 메이딜리언이 설득과 회유를 마쳤는지 최근에는 그의 아주 충직한 수족이 된 듯하지만.
“2황자 전하께 바로 안내하겠습니다.”
평소보다 깍듯한 태도로 올리비아가 윈터를 모시고 앞장섰다.
윈터의 생각처럼 올리비아는 반쯤 억지로 제가 잡아챈 동아줄이 의외로 괜찮다는 것을 깨닫는 중이었다.
그 생각에는 당연히 메이딜리언의 뒤에 있는 윈터 블라디미르라는 인물도 한몫했다.
요 며칠 칸나와 아디엘의 다툼 때문에 안 그래도 살벌한 2황자 궁의 분위기가 더욱 삭막해졌었다.
그런데 그걸 몇 마디 말로 금세 잠재운 윈터는 더없이 위대해 보였다.
눈 하나 깜짝 않고 능숙하게 두 사람을 다루는 윈터를 목격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덕분에 그들의 머릿속에는 동시에 같은 생각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이 사람이라면, 그 무시무시한 2황자도 잠잠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재클린이 올리비아의 등을 쿡 찔렀고, 올리비아는 맹수 조련사를 초빙하는 마음으로 앞으로 나선 것이었다.
“이쪽입니다. 들어가시죠.”
올리비아가 작은 방 앞에 섰다.
집무실이나 침실, 서재도 아니고 무슨 창고 방 같은 곳에 윈터의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혹시나 하는 오해를 막기 위해 올리비아가 덧붙였다.
“황자 전하께서 생각을 정리하실 때면 이 방을 자주 이용하십니다.”
“안에 뭐가 있죠?”
“아무것도요.”
“……아무것도?”
“네, 아무것도 없는 그저 빈방입니다.”
그 말에 윈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조용하고 컴컴한 방에 홀로 틀어박혀서 고통을 삭이는 메이딜리언의 모습이 벌써 눈에 선했다.
“안내해 줘서 고마워요.”
곧 표정을 갈무리한 윈터가 감사 인사를 전했다.
올리비아는 그저 말없이 한 번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자리를 떴다.
원래라면 메이딜리언에게 윈터가 도착했음을 고해야 했지만, 이 방에 있을 때만큼은 메이딜리언은 그 누가 오더라도 방해받지 않기를 원했다.
게다가 오랜 황궁 생활로 길러진 눈치가 지금은 감히 끼어들어서는 안 될 순간이라고 경고했기 때문이었다.
“……후우.”
올리비아의 기척이 멀어지고, 윈터는 애써 외면하고 있던 긴장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 머리가 멍했다.
무슨 말을 하기 위해 여기까지 찾아온 건지 그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조금 전 도망치듯 자리를 피하던 메이딜리언을 보며 그저 그를 위로해 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뜬 윈터가 곧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나가.”
그러나 미처 안으로 들어서기도 전에, 서릿발 같은 음성이 떨어졌다.
온통 어두컴컴한 시야 속에서 울리는 잔뜩 침잠한 목소리는 명백한 추방령이었다.
“이 시간에 아무도 들이지 않는 거 몰라?”
살기 가득한 음성이 매섭게 꽂혔다.
이대로 뒤돌아서 가야 하는 걸까.
잠시 고민하던 윈터는 그래도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지금 감히…….”
“나야, 메이.”
“…….”
제 명령을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오는 기척에 메이딜리언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온 것이 윈터라는 것을 깨닫고는 그대로 굳었다.
빛도 제대로 들지 않는 어둑어둑한 방 안으로 윈터가 들어섰다.
그걸 지켜보는 메이딜리언의 손에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나가세요.”
한참 만에야 메이딜리언이 말했다.
윈터는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 메이딜리언이 있었다. 벽에 등을 기대어 웅크린 채로.
그 모습이 마치 어린 시절 잔뜩 상처 입었던 그 꼬마 같아 보였다.
“메이.”
“나가 주세요, 제발.”
메이딜리언은 그 어느 때보다도 격렬하게 윈터를 거부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무력을 써서라도 쫓아냈겠지만, 그가 윈터에게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저 무력하게 빌 뿐이었다.
오늘 메이딜리언은 최악이었다.
제 마음을 주체 못 하고 날뛰는 멍청이처럼 굴지 않기로 했으면서, 늘 윈터를 다치게 만들고, 곤란하게 만든다.
차마 윈터의 얼굴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부끄럽고, 불안했다.
“여긴 왜 오신 거예요?”
“……널 보러 왔어.”
“왜요?”
메이딜리언의 눈동자가 일그러졌다.
이어지는 윈터의 대답을 듣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버려지면 어떻게 하지.
멍청하고 어리석고 음울한 자신보다야 아스터가 훨씬 나아 보였다.
따스한 햇볕 아래에서 마주 보고 웃는 두 사람을 보며 메이딜리언의 심정은 처참하기만 했다.
자신은 윈터에게 절대로 줄 수 없는 풍경일 것만 같았다.
“메이.”
윈터가 이름을 부를 때마다 누가 심장을 쥐어짜는 것만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메이딜리언은 차라리 제 귀를 도려내고 싶어졌다.
그러면 윈터가 무슨 말을 하든 들리지 않을 테니까.
“내가 미안해. 잘못했어.”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 들려왔다.
흠칫 놀란 메이딜리언의 어깨가 튀었다.
몸을 숙여 그런 그와 시선을 맞춘 윈터가 속삭이듯 말했다.
“못난 모습 보여 줘서 나한테 실망했지?”
메이딜리언의 입술이 잘게 떨렸다.
그녀가 사과할 게 뭐란 말인가.
못난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다. 실망이라니, 그런 건 가당치도 않았다.
그런데 왜 윈터가 제게 사과를 한단 말인가.
괴로움으로 메이딜리언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그 표정이 윈터의 눈에도 또렷이 들어왔다.
난생처음 보는 메이딜리언의 모습에 윈터가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 없…….”
“아가씨가 미워요.”
메이딜리언의 말에 윈터의 손이 허공에서 그대로 멈췄다.
손에 쥔 감정을 어떻게 할 줄도 모르고 벅찬 듯 가쁜 숨을 몰아쉬며 메이딜리언은 더듬더듬 말했다.
“아가씨가, 아가씨가 미워요.”
윈터에게 항상 자랑이 되고 싶었다.
“왜 저를, 왜 제게…….”
하루빨리 강해져서 그녀를 지키고 싶었다. 세상 그 어떤 것도 윈터를 해칠 수 없도록.
그러나 메이딜리언은 모두 실패했다.
늘 그녀를 다치게 했고, 그녀의 자랑이 되어 주지도 못했다.
이리도 어설프고 조악하기만 한 자신이 어떻게 윈터의 옆에 설 수 있을까.
이대로 있어 봤자 자신은 윈터에게 짐만 될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메이딜리언은 윈터를 원했다.
단 한 순간도 차마 제 스스로 손에서 놓을 수가 없어서, 차라리 윈터가 자신의 손과 발과 혀를 모두 잘라서 내다 버려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저를 선택하셨어요?”
당신은 내가 아니라면 지금보다 훨씬 행복해질 수 있었을 텐데.
윈터의 이유도 원인도 알 수 없는, 끝 간 데 없는 애정은 메이딜리언을 살게 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를 죽고 싶게 만들었다.
“나, 나는…… 나는 그러니까…….”
윈터의 손이 그대로 거둬졌다.
몸을 일으킨 그녀가 황망한 듯 잠시 비틀거렸다.
처음으로 겪는 메이딜리언의 거부에 윈터도 타격이 컸다.
늘 그를 위해 뭐든 해 주려고 했는데, 오히려 그게 부작용처럼 메이딜리언을 괴롭게 하고 있었다.
자신 때문에 메이딜리언이 고통스러워한다는 것이 윈터에게도 느껴졌다.
“미안. 내가 네게 충분한 믿음을 주지 못했구나.”
갑자기 모든 게 소용없는 일처럼 여겨졌다.
분명 메이딜리언이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고 싶었는데, 자신이 해 준 어느 것도 메이딜리언이 원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 거지?
방향성을 잃고 휘청이던 윈터가 그대로 몸을 돌렸다.
“자리 비켜 줄게. 편히 쉬어.”
도망치는 것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아까 자리를 피하던 메이딜리언이 이런 심정이었을까.
머리에 뜨끈뜨끈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족쇄를 달고 걷는 것처럼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몸이 무거웠다.
그때 윈터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녀의 의지로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뒤에서 자신을 끌어안은 뜨거운 체온 때문에 차마 움직일 수 없었다.
“다 거짓말이에요.”
축축한 눈물이 윈터의 목덜미를 적셨다.
울먹이는 낮은 목소리에 윈터가 숨을 멈췄다.
“아가씨가 밉다는 거, 다 거짓말이에요.”
“……메이.”
“그러니까 나한테서 등 돌리지 마요, 제발…….”
메이딜리언이 울면서 애원했다.
꽉 끌어안은 단단한 몸이 애처롭게 떨려왔다.
바로 귓가에 닿는 목소리에 윈터의 심장이 울렁거리며 손끝이 저릿해졌다.
윈터는 당장이라도 몸을 돌려 그를 달래 주고 싶었으나 허리를 감은 팔이 단단해 도저히 풀 수가 없었다.
“가지 마세요. 가지 마세요, 아가씨.”
제 팔을 풀어내려는 몸짓에 메이딜리언의 애원이 더 간절해졌다.
허리를 감은 손을 토닥이며 윈터가 말했다.
“알았어, 안 갈게. 안 간다고 약속할게. 응?”
한참을 설득하고 나서야 윈터는 간신히 메이딜리언의 품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몸을 돌린 그녀는 메이딜리언의 젖은 얼굴과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가만히 눈을 감은 채 그런 윈터의 손길을 느끼던 메이딜리언이 반짝 눈을 떴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윈터는 그제야 자신과 메이딜리언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깝다는 것을 깨달았다.
팔 사이에 윈터를 가둔 채로, 메이딜리언은 말없이 윈터를 내려다보았다.
미지근한 침묵 끝에 메이딜리언이 조심스레 물었다.
“아가씨.”
“……어?”
“지금 키스하면…… 화내실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