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분명 칸나가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방은 아수라장이나 다름없었다.
정신이 혼미한 데보라가 창문을 통해 들어온 터라 테라스에도, 커튼에도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데보라가 흘린 피로 방 안에 깔려 있던 카펫도 엉망진창이었고, 메이딜리언과 칸나가 실랑이를 벌이며 장식품들도 많이 흐트러진 상태였다.
“내, 내가 방을 잘못 찾았나?”
칸나는 제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안쪽은 이전에 그녀가 기억하던 방과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피 묻은 테라스도, 커튼도, 카펫도 없었다.
방 안은 딱 봐도 누군가의 병실로 꾸며진 것처럼 깔끔하고 고요했다.
대체 침대는 언제 준비한 것인지, 데보라는 그 위에서 평온하게 눈을 감고 있었고, 메이딜리언은 그런 데보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평화로워 보이던지.
칸나는 아까 당장이라도 데보라를 죽이겠다며 날뛰던 메이딜리언이 꿈이었나 싶어 순간 스스로를 의심해야 했다.
“데보라!”
반면에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윈터는 데보라를 향해 뛰어갔다.
이전에 이 방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전혀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곤히 잠들어 있는 데보라를 보며 윈터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안색이 조금 창백하긴 했지만,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한 모습이 어쩐지 감격스러웠기 때문이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아직 정신은 못 차리겠지만, 그래도 목숨에는 지장이 없을 거예요.”
곁에 있던 메이딜리언이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그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칸나는 저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
어쩜 사람이 저렇게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는지,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고마워, 메이!”
메이딜리언의 말에 윈터는 그를 와락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척 봐도 메이딜리언이 치료해 준 것이 틀림없었다.
원작에서 그의 인성은 알아주는 개차반이었다.
그런 그가 누군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나서서 타인을 치료하다니.
윈터의 입장에서는 천지가 개벽할 일이었다.
덕분에 그녀의 마음은 한층 더 벅차올랐다.
“뭘요. 그냥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뿐인걸요.”
메이딜리언은 윈터의 품에 얌전히 몸을 내맡긴 채 수줍은 듯 중얼거렸다.
그런 그에게 뜨거운 시선이 꽂혔다.
당연히 칸나였다.
착한 척 꼬리를 살랑거리는 꼴을 보다 못한 칸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 있었다.
마침 윈터는 메이딜리언을 끌어안고 있어 그 모습을 전혀 보지 못했다.
오직 메이딜리언만이 칸나를 마주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절호의 기회를 메이딜리언은 놓칠 리가 없었다.
섬뜩한 붉은 눈이 칸나에게 향했다.
이전 상황에 대해 조금이라도 입을 벙긋하면 당장이라도 그녀를 죽일 기세였다.
반사적으로 어깨를 흠칫 굳힌 칸나가 이 순간 가장 안전한 곳으로 몸을 움직였다.
“아, 아가씨…….”
조금 떨리는 칸나의 목소리가 안도감 때문이라고 생각한 윈터는 메이딜리언을 놓고 이번엔 칸나를 끌어안고 토닥여 주었다.
“그래, 많이 놀랐지? 이제 괜찮을 거야.”
이제 메이딜리언과 칸나의 입장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이번엔 칸나가 메이딜리언을 약 올리듯 혀를 날름 내밀었다.
메이딜리언은 당장이라도 그 혀를 잡아 뽑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차마 윈터가 있는 데서는 제 성질을 다 드러내지도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았다.
“처음에 여기 왔을 때, 데보라가 많이 다쳐 있었니?”
데보라의 상태를 확인하고 윈터는 빠르게 안정을 찾았다.
세 사람은 데보라의 곁에 둘러앉아 상황을 정리했다.
“배에 칼이 꽂혀 있었어요.”
“뭐?”
칸나의 증언에 윈터가 와락 미간을 구겼다.
그런 그녀에게 메이딜리언이 말했다.
“그건 본인이 한 거래요.”
“본인이 한 거라니?”
“데보라가 쓰러지기 전에 저한테 한 말이에요.”
“뭐라고 했는데?”
“‘세뇌’라고요.”
그 말에 윈터는 잠시 숨을 멈췄다.
그러지 않으면 도저히 치밀어오르는 화를 참아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세뇌라니.
그런 능력을 가진 자를 윈터는 한 명 알고 있었다.
“세뇌를 풀기 위해서, 자신을 찌를 수밖에 없었다고요.”
“……하.”
짧은 한숨을 내쉰 윈터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뜬 그녀가 말문을 열었다.
“우선, 이 일은 나한테 맡겨 줘. 내가 처리할게.”
아르만 백작과 제1기사단까지 끌어들였지만 윈터는 정말로 그들과 합심해서 범인을 잡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델이랑 자신이 밀어붙이니 엉겁결에 함께 수사하겠다고 수락한 아르만 백작이지만, 어느 정도 머리가 식고 나면 다시 찬찬히 상황부터 되돌아볼 것이다.
그리고 이내 자기가 굳이 덮어쓸 위험이 없는, 공작가 내부 인물의 배신으로 벌어진 일이라는 걸 알아차리면 가차 없이 동맹을 깰 것이다.
겉으로는 어리숙한 척 가장해도 누구보다 교활한 기회주의자니까.
게다가 이 일의 배후가 만일 세뇌를 통해 데보라에게서 알아낸 정보를 상대편에 넘긴다면 치명적일 수도 있었다.
“일단 메이는 궁에서 아르만 백작의 동태를 파악해 줘.”
“네, 그럴게요.”
“아르카 쪽으로 내용 전달하는 건 칸나가 맡아 주고.”
“알겠어요!”
“데보라는…….”
메이딜리언과 칸나에게 지시를 내리던 윈터의 안색이 흐려졌다.
아직 침대에서 깨어나지도 못한 데보라를 어디에 어떻게 숨길지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그녀를 보던 메이딜리언이 입을 열었다.
“제가 여기에 숨길게요.”
“……뭐?”
놀란 윈터가 반문했다. 그러고는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돼. 그러다 너까지 곤란해지면…….”
“누가 감히 2황자 궁을 뒤지겠어요? 만약 그런 간 큰 놈이 있다고 해도 전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면 그만인걸요.”
그리고 그 간 큰 놈은 곧 죽겠지. 칸나는 속으로 확신했다.
그녀가 어떻게 생각하든 말든 메이딜리언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잠시 망설이던 윈터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지금 상황에서 데보라가 숨은 2황자 궁만큼 안전한 장소는 없었다.
그렇기에 데보라도 굳이 도망치던 순간에 이곳으로 찾아온 거겠지.
“그럼 부탁할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전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윈터의 표정은 의식하지 않는 순간 자꾸 굳어 갔다.
델은 그나마 발언권이 있는 목격자가 아르만 백작 하나라고 했지만, 실질적으로 그 곁에는 궁인들 몇 명과 칼로프의 수행원들도 있었다.
게다가 델을 치료하러 왔던 신관과 그를 데려오기 위해 아르만 백작이 벌인 소동까지 다 포함하면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셀 수도 없이 불어났다.
그들의 입을 모두 막을 수도 없고, 막는다고 해도 어차피 델이 습격을 받았다는 사실이 퍼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전에 최대한 빨리 일을 처리해야 했다.
“우선 나는 가 볼게. 공작가에서도 기다리고 있을 거야.”
대략적인 상황을 정리한 윈터가 곧 2황자 궁을 나섰다.
떠나기 전 메이딜리언이 그녀를 잡고 당부했다.
“……조심해요.”
“그래, 너도.”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윈터는 빠른 걸음으로 다시 마차로 향했다.
아직 소문이 널리 퍼지지는 않았는지, 낮의 궁은 고요하고 적막했다.
자신이 타고 온 마차 앞에 도착한 윈터는 주위를 한 번 살피고는 올라탔다.
마부에게 출발하라는 말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마차는 알아서 움직였다.
본성에서 어느 정도 거리가 멀어지자, 주변 기척을 한 번 더 점검한 윈터는 주머니에서 마도구를 꺼내 방음막을 쳤다.
곧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누가 보면 뜬금없는 혼잣말이었다.
그러나 곧 윈터의 맞은 편에서 어둠이 장막처럼 걷히며 익숙한 얼굴이 드러났다.
리어트였다.
“필요한 건 다 준비해 뒀어.”
리어트가 내민 서류를 받아들며 윈터는 신경질적으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미친놈.”
그녀는 서류를 넘기며 욕설도 서슴지 않았다.
“뭔가 꿍꿍이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거기에 데보라에 델까지 말려들게 될 줄은 몰랐어.”
평소와 달리 빠르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제 이마를 짚은 윈터의 얼굴이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내가 너무 안일했던 거야.”
“자책하지 마. 이미 일어난 일인걸.”
그런 윈터를 안쓰럽게 바라보던 리어트가 그녀를 위로했다.
그의 손이 윈터가 들고 있는 서류 뭉치를 가리켰다.
“우린 이제 이걸 어떻게 엮을지만 생각하면 돼.”
“……후, 좋아.”
짧게 심호흡을 한 윈터가 다시 눈을 빛냈다.
두 사람은 한참이나 열띤 토론을 이어갔다.
그동안 마차는 황도 곳곳을 누비며 시간을 끌었다.
멀찍이 돌아가던 마차는 해가 뉘엿뉘엿 지고 나서야 공작가에 도착했다.
윈터가 마차에서 내려서자, 공작가에 전에 없이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게 느껴졌다.
가문에서 소식을 전달받은 가신들이 속속들이 공작가로 모여들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아가씨.”
윈터가 도착했다는 보고를 듣고 유스터스가 가장 먼저 달려왔다.
그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뒤를 따르며 호위했다.
“가셨던 일은 잘 마무리되셨나요?”
티 안 나게 주변을 경계하며 유스터스가 물었다.
그 말에 윈터가 작게 웃었다.
“그래. 이번 기회에 확실히 솎아내야지.”
마침 나일라가 그녀를 마중 나왔다.
“아가씨, 가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알겠어.”
고개를 끄덕인 윈터는 나일라의 뒤를 따라 블라디미르 공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각하, 아가씨가 오셨습니다.”
“그래, 들어와.”
마침내 문이 열리고, 안에서 윈터를 기다리고 있던 공작이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공작과 눈이 마주치고, 윈터는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춰 섰다.
평소와 다른 딸의 반응에 공작은 나일라에게 명했다.
“잠깐 주변을 물리거라.”
“알겠습니다.”
이내 주변에 있던 사용인들의 기척이 모두 멀어지고, 한참 동안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윈터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드디어 때가 되었어요, 어머니.”
그 말에 공작이 야차처럼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