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델은 자신을 노린 살수들 중 하나가 살아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배후를 찾겠다고 말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리비우스와 알버트의 신병까지 확보한 윈터가, 고작 살수 하나를 찾아내지 못했다고 변명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조악한 거짓말을 고할 바에, 차라리 윈터는 솔직하게 거래를 요구했다.
물론 윈터의 말을 들은 델의 표정은 싸늘하기만 했다.
자기를 죽일 뻔한 살수를 살려 달라는 요청이 그리 유쾌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윈터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치미는 화를 참는 듯 델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곧 순식간에 냉랭한 표정을 지우고 다시 능글거리는 듯 여유로운 태도로 돌아왔다.
“소공작이 내게 무리한 걸 요구하는군.”
하지만 아직 혀끝의 칼날은 그대로였다.
윈터는 동요하는 기색 없이 그저 담담하게 델의 말을 받았다.
“알고 있습니다.”
“그에 따른 대가도 충분히 준비했겠지?”
기다리던 말에 윈터가 고개를 들었다.
데보라는 리비우스의 세뇌에 넘어가 본인이 원치 않는 암살 작전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데보라의 입장이고, 델은 명백히 살해당할 뻔한 피해자였다.
게다가 그 배후마저도 블라디미르 가문에 속한 자들이었다.
윈터는 확실히 델에게 무리한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델이 거래의 대가로 요청하는 것을 가능한 한 들어주고자 했다.
“네, 원하시는 걸 말씀하십시오.”
각오를 단단히 한 듯 흔들림 없는 목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델은 미간을 찌푸리듯 슬며시 웃으며 되물었다.
“만약에 내가 무리한 걸 요구하면 어쩌려고 그래? 가령 소공작의 망명 같은 거 말이야.”
윈터는 대답하지 않고 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델은 타고나길 영리한 수완가였다.
윈터는 델의 비밀을, 델은 윈터의 비밀을.
두 사람은 서로의 약점을 쥐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찌 보면 윈터가 스스로 델의 앞에 가져다 바친 목줄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이 좋은 기회를 결코 무리한 대가를 요구해서 날리지는 않을 것이다.
“쯧, 재미없기는.”
가볍게 혀를 찬 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두 사람 다 계산이 빨랐다.
델은 더 이상 쓸데없는 소모전은 하지 않기로 했다.
“이미 한배를 타기로 한 마당에 재고 따지는 건 머리만 아프니 집어치우자고.”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전하.”
기다렸다는 듯 나오는 대답에 델이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
“소공작은 이럴 때만 아부를 하는군?”
“늘 입에 발린 말만 하는 건 또 싫어하시잖아요?”
자기를 훤히 들여다보는 듯한 윈터의 말에 델이 입술을 삐죽였다.
곧 표정을 가라앉힌 채 델이 물었다.
“그래서, 내가 이제 뭘 해 주면 되는데?”
* * *
“그게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폐하.”
크비누스의 물음에 아르만 백작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뜻밖의 희소식에 크비누스의 입가가 씰룩였다.
눈엣가시 같았던 블라디미르 가문이 자기들끼리 알아서 몰락의 길을 걸어 준다니,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칼로프의 황태자가 이 일을 덮을 가능성은 없는가?”
“소공작과의 친분이 꽤 두터워 보이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 친분을 유지하려면 제법 큰 손실을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델이 만에 하나라도 이 일을 눈감아 준다고 하더라도 블라디미르 측에서 천문학적인 합의금을 물어냈으리라 예측했다.
그리고 후계자 경합에서 큰 실책을 벌인 소공작은 2황자 측 진영에서 한동안 기도 못 펼 것이었다.
“신께서 우리의 손을 들어주시는군.”
마침내 크비누스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의 눈치를 보던 아르만 백작도 안도하며 더욱 고개를 숙였다.
“감축드립니다, 폐하.”
깊게 숙인 덕분에 아르만 백작의 표정은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
사실 그는 처음 델의 암살 시도를 목격했을 때 그 사실을 크비누스에게 알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크게 고민했었다.
그러나 윈터와 맞닥뜨린 이후 크비누스에게는 일이 다 마무리될 때까지 숨기기로 마음먹었었다.
왜냐하면 누가 봐도 윈터를 노린 듯한 조악한 음모가 혹여나 자신에게 불똥을 튀기지는 않을까 염려되었기 때문이었다.
크비누스가 섭정이라는 이름으로 제국을 다스린 지도 20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황자들 중 누구든 이번 후계자 경합에서 승리한 자에게 크비누스는 자신의 권력을 이양해야 했다.
그런데 저 욕심 많은 남자가 과연, 자신의 권력을 나누려고 할까?
아르만 백작은 결코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크비누스는 왜 후계 경합 따위를 벌이는가.
‘서로 치고받고 싸우다가 결국은 회복되지 못할 만큼 망가뜨리려고 하겠죠.’
아르만 백작은 아스터의 말을 떠올렸다.
처음엔 그럴 리가 없다며 아스터의 의심을 일축했지만, 자꾸만 백작의 머릿속에 아스터의 말이 맴돌았다.
그리고 마침내 아주 자그맣지만, 불신의 씨앗이 아르만 백작의 마음에 싹을 틔웠다.
백작은 혹여나 이번 사건이 크비누스에게 알려지면 윈터는 물론이고 자신들까지 엮이게 될까 봐 보고를 올리지 않았다.
“백작.”
“예, 폐하.”
공손한 척 고개를 숙인 아르만 백작 앞으로 크비누스가 다가왔다.
“그런데 그대는 이 일을 언제부터 알았는가?”
“며, 며칠 되지 않았습니다.”
“며칠이라.”
그 말을 끝으로 공간에는 침묵이 흘렀다.
줄곧 술렁거리던 심장에 묵직한 위기감이 찾아들 만큼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눈을 굴리던 아르만 백작이 조심스레 고개를 들려는데 크비누스의 손이 먼저 백작의 목을 졸랐다.
“커헉!”
“감히 내 앞에서 함부로 계산하는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그대로 아르만 백작이 벽으로 밀렸다.
굳은살은커녕 생채기 하나 없는 크비누스의 손에 억센 힘이 실렸다.
마력이 담겨 있는 손을 아르만 백작은 함부로 뿌리치지 못했다.
누구든 와서 도와줄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긴밀한 대화를 한다는 이유로 주위에 있던 시종들도 모두 물린 상태였다.
“폐, 폐하, 살, 살려 주십…….”
아르만 백작이 버둥거리며 읍소했다.
그러나 크비누스의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살려 달라고 말하기 전에 진작 내게 고하지 그랬는가?”
크비누스의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손안에서 펄떡이는 핏줄의 감각이 짜릿하게 등을 내달리며 소름을 자아냈다.
“네 그 얄팍한 수작으로 함부로 딴생각을 품었느냐?”
“아니, 아닙니다……. 아닙니다, 폐하…….”
아르만 백작은 어떻게든 크비누스의 손을 풀기 위해 바르작거렸다.
피가 몰려 시뻘겋게 달아오른 백작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크비누스가 손에 힘을 조금 풀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아르만 백작의 목을 쥔 채 속삭였다.
“미쉘라 누님이 죽었을 때.”
느닷없이 선황의 이름을 언급하는 크비누스의 말에 아르만 백작의 발버둥이 멎었다.
백작의 얼굴이 이제는 새하얗게 질려 가고 있었다.
“내게 엎드려 빌던 그 순간을 잊지 말게.”
“…….”
“그대도, 그대의 아들도 목숨을 보전해야지. 아니 그런가?”
그렇게 물으며, 크비누스가 틀어쥐었던 아르만 백작의 목을 놓아줬다.
딱히 대답을 기대하고 물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백작이 대답을 할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켁, 쿨럭, 우욱…….”
거의 반쯤 죽었다가 살아난 아르만 백작이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간신히 막혀 있던 숨을 몰아 내쉬며 그는 연신 헛구역질을 했다.
바닥에 침을 질질 흘리는 흉한 꼴을 보며 크비누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곧 쯧, 하고 혀를 찬 그가 몸을 굽혀 앉더니 아르만 백작과 눈을 맞췄다.
언제 인상을 썼냐는 듯 선한 얼굴에도 백작의 어깨는 두려움으로 잘게 떨렸다.
“앞으로는 내게 그 어떤 비밀도 있어선 안 되네, 알겠지?”
마치 무력한 어린애를 달래는 것처럼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아르만 백작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며, 명심, 명심……하겠습니다. 쿨럭…….”
“이런, 백작 상태가 영 엉망이군.”
크비누스가 손을 뻗었다.
아르만 백작은 발작처럼 그의 손을 피했으나 크비누스는 제 손을 거두지 않았다.
곧 백작의 어깨에 닿은 크비누스의 손에 흰빛이 어렸다.
백작은 시커멓게 올라오고 있던 목의 멍도, 핏줄이 터져 충혈되었던 눈도 감쪽같이 회복되어 멀쩡한 모습이 되었다.
“복장을 단장하고, 그만 나가게.”
“가, 감사합니다, 폐하.”
아르만 백작이 연신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를 한심하게 바라보던 크비누스가 그대로 몸을 일으켜 공간을 벗어났다.
바닥을 짚은 채 여전히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던 아르만 백작의 손에 서서히 힘이 들어갔다.
백작은 꽉 쥔 주먹이 새하얗게 탈색된 것을 응시하면서도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 * *
대회의실 옆 거대한 홀에 귀족들이 모였다.
섭정 크비누스의 손과 발이 되어 국정을 이끌어가는 대신들이었다.
칼로프의 황태자 델과 이번 교역을 위한 사신들이 이어서 들어섰다.
에른스트 후작을 필두로 한 2황자 지지파와 함께 메이딜리언도 도착했다.
안에 들어서기 무섭게 메이딜리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윈터를 찾았다.
진작 홀에 들어와 있던 윈터는 의식적으로 메이딜리언의 시선을 피했다.
누가 봐도 서먹해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낮은 귓속말로 속닥거렸다.
“저 두 사람, 갑자기 왜 저러는 거죠?”
“그러게요. 소공작은 열렬한 2황자 지지파일 텐데…….”
“아무래도 무슨 일이 생긴 것 같군.”
“……뭔가 아시는 게 있으신가요?”
“나도 정확하게는 모르오. 그저 아르만 백작이 이번 경합은 자신들이 승리할 거라 얘기하는 것만 언뜻 들었소.”
“그렇다면…….”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윈터는 속으로 웃음을 꾹 참았다.
이윽고 크비누스와 아르만 백작, 그리고 아스터까지 모두 홀에 모였다.
황좌에 오른 크비누스가 윈터와 메이딜리언에게 시선을 주고는 작게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