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2황자와 사이가 좋은 거 아니었습니까?”
메이딜리언과의 거리가 어느 정도 멀어지자 아스터가 문득 입을 열었다.
1황자 궁으로 가는 회랑으로 어느새 햇빛이 길게 드리워지고 있었다.
반쯤 멍한 얼굴로 아스터의 뒤를 따라 걷던 윈터가 고개를 들었다.
“네?”
윈터가 자신의 말을 듣지 못한 듯 하자 작게 웃은 아스터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고는 다시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아스터의 말에 제대로 집중할 수 없을 만큼 윈터는 지금 조금 복잡한 심경이었다.
‘2황자랑 진짜 아무 사이 아닌 거 확실해?’
델의 물음은 그저 가벼운 의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이 윈터에게는 커다란 파동을 일으켰다.
다른 이들이 메이딜리언과의 염문설이니 뭐니 떠들어 댈 때는 사실 그리 신경 쓰이지 않았다.
어차피 언론은 자기 맘에 드는 대로 자극적인 소설을 써 내려갈 뿐이었고, 그 당시에는 메이딜리언의 존재를 인식시키는 데 그만한 수단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델은 달랐다.
윈터와 메이딜리언의 사이를 굳이 주군과 신하 사이로 해석할 필요가 없었다.
‘순수하게, 충심이야?’
그 말에 크게 동요하고 만 것은, 실은 윈터의 마음이 충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몇 번이나 다가오는 메이딜리언을 밀어내며 윈터는 스스로 다짐했다.
어차피 오래 살지도 못하는 목숨, 결코 메이딜리언에게 아프게 남지 않겠다고.
욕심부리지 않고, 그저 생이 허락하는 한 그의 곁에 남아 있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다고.
그러나 실제로는 어떠했는가.
윈터는 메이딜리언의 시선, 손짓, 목소리, 그의 모든 것에 가슴이 떨렸다.
정염 가득한 눈동자가 자신을 향할 때면 속절없이 마음이 술렁거렸다.
그런데도 닿으면 안 된다고, 결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억지로 가둬 둔 애정은 잠긴 틈새로도 자꾸만 새어 나와서, 그녀 자신을 괴롭게 했다.
그러니 누구도 이 마음을 충심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겠지.
“아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윈터는 낮게 탄식했다.
질끈 감은 눈이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묵직한 돌이라도 얹힌 것처럼 가슴이 갑갑해졌다.
“소공작?”
뒤따라 걷다 말고 우뚝 그 자리에 멈춰선 윈터를 알아차리고 아스터가 그녀를 불렀다.
타는 노을에 붉게 물든 윈터는 어쩐지 절망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부서져 내릴 듯 아슬아슬한 분위기에 아스터가 잠시 숨을 멈췄다.
곧 그가 윈터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소공작, 어디 안 좋습니까? 대화는 다음으로 미룰까요?”
아스터의 목소리가 윈터를 무거운 상념에서 깨웠다.
눈꺼풀이 열리고 드러난 눈동자는 여전히 혼란에 잠겨 있었다.
어쩌면 슬픔인 듯도 보였다.
“괜찮습니다.”
그러나 몇 번의 깜박임만으로 윈터는 모든 감정을 갈무리했다.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말끔한 시선.
입가에는 그린 듯 아름다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이 어쩐지 조금 아쉽다고, 아스터는 생각했다.
“……그렇군요.”
작게 고개를 끄덕인 아스터가 다시 몸을 돌렸다.
그 뒤로 두 사람은 침묵을 지킨 채 1황자 궁에 다다랐다.
아스터는 윈터를 응접실도, 정원도 아닌 개인 집무실로 안내했다.
“평소라면 후원이라도 거닐면서 얘기를 나누자 했겠지만, 오늘은 도저히 그럴 만한 주제가 아니라서 이쪽으로 모셨습니다.”
“네, 전 상관없습니다.”
주위의 시종들을 모두 물리고, 아스터는 자신이 직접 차를 우리기까지 했다.
윈터가 제가 하겠다며 나섰지만 진작에 아스터에게 모든 다구를 빼앗기고 말았다.
‘손님을 모셔 놓고 대접을 미루는 건 예의에 어긋나죠.’
한사코 자신이 하겠다며 그렇게 말하는데 도무지 말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솔직히 아스터보다 차를 그럴듯하게 우릴 자신도 없었다.
그는 홀로 집무실에서 생각에 잠길 때면 주위를 전부 물리고 자기 혼자 바지런을 떠는 것을 즐겼다.
원작에서 언젠가 칸나가 아스터가 우린 차를 마시고 감탄하는 장면이 있었던 것도 떠올랐다.
“드세요.”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별말씀을요.”
능숙한 솜씨로 아스터가 내민 차를 윈터가 얼른 받았다.
여린 새순 같은 차가 담긴 잔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일렁이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잠시 아무 말도 없이 차를 즐겼다.
“그럼 이제 저를 부르신 연유를 여쭤도 될까요?”
어느 정도 복잡하던 머리를 비운 윈터가 물었다.
그 말에 아스터가 조금 눈을 크게 떴다.
이내 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내가 그대를 불러놓고도, 이 질문을 하게 되는 순간을 계속 미뤄 왔습니다.”
아스터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곧 짧게 심호흡을 한 그가 물었다.
“어디까지 알고 있습니까?”
“전하께서 아시는 만큼이요.”
그렇게 대답한 윈터가 가볍게 덧붙였다.
“혹은 그보다 훨씬 더일 수도 있고요.”
원작의 아스터는 딱히 황제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누구의 사랑도 받지 못하고 궁에서 외롭게 자란 아이는 칸나라는 주인공과 만나 세상을 알아가게 되었고, 그저 작은 용기를 싹틔웠을 뿐이었다.
그것은 죽은 선황 미쉘라, 그의 어머니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밝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메이딜리언이라는 생각지도 못했던 복병이 등장하고, 그의 개차반인 성격을 견디다 못한 엘리슨이 메이딜리언을 배반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크비누스나 메이딜리언이라는 최악의 수보다는 차악을 선택하겠다는 엘리슨의 일념 아래서 아스터는 황제가 되었다.
칸나와의 사랑도 이루었고, 때때로 힘들고 고민스러운 일이 많았지만 그래도 제법 괜찮은 결말을 맞았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미쉘라의 죽음에 대한 진실에 대해서 밝히는 것에는 실패했다.
크비누스의 방해와 메이딜리언의 견제 속에서 살아남기에 급급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윈터는 원작에서 비하인드처럼 밝혀진 선황 독살에 대한 대부분의 증거를 알고 있었다.
아스터의 협조만 있다면 크비누스의 실각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이제 전하의 선택만이 남았어요.”
윈터는 강한 어조로 ‘선택’이라는 단어에 힘을 줬다.
메이딜리언은 견제하지 않고, 오히려 윈터라는 조력자까지 얻은 아스터라면 큰 고민 없이 자신의 오랜 바람을 이루려 할 것이었다.
“으음.”
그러나 아스터의 반응은 윈터의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당연히 그녀의 손을 잡을 줄 알았는데, 난처한 듯 일그러지는 눈동자는 명백하게 망설이고 있었다.
“나더러 아버지를 배신하고 보란 듯이 패배하라는 말을 좋게도 포장하시는군요.”
“그건…….”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던 윈터가 이내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아스터는 황제가 되길 바라지 않았다.
그건 아르만 백작의 소원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아스터는 어째서인지, 아르만 백작의 염원이 자신의 것이기도 하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신은 원래도 황좌에 미련이 없지 않았냐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었다.
“기왕 패배하는 거 멋들어지게 복수라도 해야죠.”
예상과는 다른 상황에 당황한 윈터가 에둘러 표현했다.
그 말에 아스터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소공작은 정말 모르는 게 없군요.”
세 번째 과제는 아스터가 발표하게 될 것이었다.
만타라스를 가져온다고 해도, 그의 결심이 없다면 크비누스의 실각은 어려워진다.
윈터가 이미 어느 정도 대비를 하고는 있었지만, 사람들의 주목이 잔뜩 몰리는 세 번째 경합 과제 발표 때 아스터가 ‘그 문장’을 말하기만 한다면 크비누스는 섭정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아스터의 반응만 보자면 어쩌면 윈터는 자신의 바람대로만 상황이 흘러가지는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이미 많지 않았나요? 자그마치 20년이나 있었잖아요.”
윈터의 말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아스터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그러나 신음 한번 없이, 아스터는 그저 고통을 감내한 채 침묵했다.
그의 침묵을 고요히 응시하며 윈터는 찻잔을 마저 비워냈다.
“전하의 결정이 뭐든 우리는 계획대로 합니다.”
“그 ‘우리’에 2황자도 들어가나요?”
“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윈터의 눈동자는 선명했다.
아까의 혼란도 슬픔도 남김없이 훌훌 털어낸 듯 찬란했다.
“전하께서는 원하시는 걸 그저 선택하시기만 하면 돼요.”
조금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아스터가 되물었다.
“내게 선택지가 있습니까?”
“그럼요.”
윈터는 승리를 쟁취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 메이딜리언의 앞에 고스란히 내려 둘 것이다.
더없이 빛나는 영광을, 남김없이 그에게 바칠 것이다.
“아름답게 패배하거나, 혹은 추악하게 침몰하거나.”
어떤 쪽을 선택하든 아스터는 반드시 질 것이라는 서늘한 말이었다.
“소공작이 말하는 건 선택지가 아닙니다.”
“제가 제시하는 길 말고도 다른 방향이 있을 수도 있죠.”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윈터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을 이었다.
“어쩌면 전하께서 이미 답을 정해 놓으신 거라서, 다른 선택지가 보이지 않는 것일 수도 있고요.”
이미 정해 놓은 답.
그 말에 아스터의 손끝이 움찔 떨렸다.
그의 커다란 손이 마른세수를 하듯 제 얼굴을 쓸고 지나갔다.
“……피곤하군요.”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짧게 고개를 숙인 윈터가 몸을 돌렸다.
깊은 혼란에 빠진 아스터는 미처 그녀가 떠나는 것을 배웅하지도 못했다.
“다른 선택지라…….”
집무실을 나서기 전, 아스터의 작은 중얼거림이 윈터의 귀에 들려왔다.
자리를 벗어나고 나서야 윈터는 자신의 심장이 크게 쿵쾅거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메이딜리언이 원작과 다른 궤도를 향하는 것처럼, 과연 아스터도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을까?
지금으로선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가볍게 상념을 털어낸 윈터가 1황자 궁을 나오다 말고 우뚝 멈춰 섰다.
생각지도 않은 인물이 눈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을 진 하늘을 배경으로 긴 그림자가 그녀의 발치까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윈터는 그의 이름을 작게 불렀다.
“……메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