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화 (100/150)

100화

“어, 어떻게……!”

윈터의 손에 어린 마력이 새파란 불길이 되어 점점 자라나자, 경악한 알버트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세간에는 얼음과 바람을 다루는 이중 능력자로 알려진 윈터였다.

그런데 난데없이 불이라니.

공기 중의 마나가 환호하며 윈터가 피운 불 쪽으로 달려드는 게 보였다.

반대로 알버트의 불꽃은 타닥, 타닥 불티가 튀며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순식간에 힘을 잃은 그가 무너져내렸다.

“안 돼! 아니야, 안 돼. 안 돼! 이럴 수는 없다고!”

흩어지는 마력을 잡지도 못한 채 알버트가 울부짖었다.

이번에야말로 윈터를 해치울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이 만든 함정에 제가 빠진 꼴이었다.

“이걸 처음 보는 게 네가 될 줄은 몰랐는데.”

손끝에서 무서운 속도로 응집되고 있는 푸른 불꽃을 보며 윈터가 가벼운 감상을 내뱉었다.

속성에 상관없이 마력을 쓸 수 있는 자를 세상은 ‘대마법사’라고 명명했다.

대현자 에르퀼이 그랬고, 아이셀이 그러했다.

만약 윈터가 치유의 마력까지 쓸 수 있었다면, 그녀 또한 대마법사라고 불렸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윈터는 의식적으로 본 실력을 숨겼다.

이미 이중 능력자라는 것만으로도 이목이 쏠린 상태인데, 거기에 또 특이한 이력 하나를 얹어 세간의 시선을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체 왜, 왜 항상 너에게만, 너에게만 이런 거야!”

그녀완 달리 누구보다 그 이목이 필요해 보이는 사람도 있었지만.

알버트가 바닥을 내리치며 연신 욕설을 짓씹었다.

재능도, 혈통도, 능력마저도.

모든 면에서 그는 항상 윈터에게 뒤처졌다.

“젠장, 젠장, 젠장할……!”

작게 한숨을 내쉰 윈터가 알버트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두려움 가득한 시선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무릎을 굽혀 눈을 맞춘 윈터가 속삭였다.

“울면서 살려 달라고 빌어 보는 게 어때?”

제가 했던 말이 고스란히 돌아오자 알버트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무릎 꿇고 살려 달라고 빌어 봐. 응?”

생긋 웃는 산뜻한 얼굴에 자비라고는 없었다.

윈터는 알버트가 결코 제 말대로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남은 생명을 모조리 불태우는 한이 있더라도 맞서려고 하겠지.

“너를 저주한다, 윈터 블라디미르.”

역시나.

뱀 같은 노란 눈동자가 증오로 새카맣게 뒤덮였다.

“이 사막에서 홀로, 외롭게, 흔적도 없이 죽어라!”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낸 붉은 화염이 윈터를 향해 뻗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윈터에게 조금의 상처도 입힐 수 없었다.

뒤로 훌쩍 물러나 거리를 벌린 윈터가 응축되었던 마력을 그대로 알버트에게 날렸다.

콰앙-! 하는 굉음과 함께 눈앞이 새하얗게 빛나더니 곧 세찬 모래 폭풍이 불었다.

“으아아악!”

새파란 불길이 알버트를 뒤덮었다.

고통에 바르작거리던 그가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폭풍이 가라앉고, 온몸이 새카맣게 타오른 알버트가 보였다.

“끄으으…….”

가래 끓는 소리와 함께 알버트의 가슴이 가파르게 들썩였다.

저대로 두면 얼마 못 가 죽을 것이었다.

“그렇게 둘 수는 없지.”

암살 미수 사건의 배후로 델에게 신병을 넘겨주기로 약속했었다.

곧 그녀를 구조하기 위해 사람들이 올 것이다.

데보라에게 미리 언질을 준 것도 있으니 오래 걸리지는 않겠지.

그렇게 생각한 윈터가 알버트를 향해 한 걸음을 옮기려다 우뚝 멈춰 섰다.

“뭐야, 대체 왜……?”

의아한 기색이 역력하던 얼굴이 이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가슴을 움켜쥔 윈터의 신형이 그대로 무너졌다.

몸을 뒤흔드는 진동, 과부하가 걸린 듯 팔딱거리는 심장.

마력 폭주의 징조였다.

그러나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윈터는 아직까지 손에 녹스를 쥐고 있었다.

심장의 봉인을 건드릴 만큼 커다란 마법을 쓴 것도 아니었다.

“으윽.”

몸에서 급격히 힘이 빠져나갔다.

윈터는 땅을 손으로 짚었다.

그런데 물컹한 바닥을 누르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의 손이 빠르게 모래 안으로 파묻혔다.

비단 손만이 아니었다.

어느새 무릎까지 모래 사이로 매몰되고 있었다.

“……망할.”

유사(流沙), 모래 지옥이었다.

문제는 난데없는 마력 폭주로 인해 손 하나 까닥하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불안정한 마력이 일렁거리며 지독한 두통이 찾아왔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윈터는 귀걸이 하나를 잡아 뜯듯 빼내 알버트 쪽으로 힘껏 던졌다.

제 손으로 상처 낸 귀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그러나 심장의 고통이 너무 심해서 귀의 상처쯤은 별로 아프게 느껴지지 않았다.

점점 윈터의 정신이 혼미해졌다.

비틀거리던 그녀는 그대로 옆으로 쓰러졌다.

모래 지옥이 탐욕스럽게 입을 벌려 그대로 윈터를 삼켰다.

* * *

델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느닷없이 죄수들이 마력 폭주를 일으킨 데다, 호위로 온 기사들 중 크게 중상을 입거나 사망한 자가 발생했다.

문제는 현장을 지휘할 2황자 메이딜리언도, 소공작 윈터도 실종된 상태라는 것이었다.

정확히는 이동 마법진을 통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이지만.

“그래서, 지금 불가하다는 건가?”

낮은 목소리로 묻는 델의 얼굴은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검문소에서 이동 마법진을 점검하던 관리는 예고 없이 들이닥친 거물 덕분에 잔뜩 졸아서 비 맞은 개처럼 발발 떨었다.

“예, 예에. 흘러간 마력을 추적하는 것은 현재 저희로서는 다소 무리가 있는지라…….”

“2황자는 그럼 그걸 어떻게 했는가?”

델의 질문에 관리가 오히려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2황자 전하께서 비…….”

비정상인 거라고 하고 싶었던 관리는 튀어나오려는 말을 황급히 바꿨다.

“비, 비상할 정도의 천재이신 거지요!”

그 말에 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당연히 메이딜리언이 한 짓이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대책 없이 해맑기만 한 관리라니.

제니어스 제국에 와서 처음 겪는 골치 아픈 일에 델은 애써 치밀어 오르는 화를 꾹 눌러 참았다.

기껏 머나먼 타국까지 왔는데 여기서까지 악명을 떨칠 수는 없었으니까.

“천재 타령은 이제 됐네. 나는 이 일을 최대한 빨리 해결하기를 원하네.”

“하, 하지만…….”

관리의 눈이 마력이 흩어진 이동 마법진으로 향했다.

마력의 흐름을 읽고 추적하는 건 어마어마한 연산을 요구했다.

쓸 만한 마법사 셋이 달라붙어도 일주일은 걸리는 일을 2황자는 무슨 숨바꼭질 하는 사람 찾듯이 순식간에 파악하고는 마법진에 남은 마력으로 휙 사라져 버렸다.

떠나기 전에 어디로 가는지 알려 주기라도 했으면 참 좋았겠지만, 메이딜리언은 그럴 만한 정신까지는 없는 것 같았다.

살기를 풀풀 날리는 살벌한 모습 때문에 차마 누구도 그에게 말을 붙이지 못했다.

“지금 연산을 시작한다고 해도 최, 최소 사흘은…… 필요합니다.”

그나마 이동 마법진에 미리 새겨진 좌표가 있어 범위가 좀 줄어들었다.

아마 칼로프의 사막 어딘가로 향했겠지.

하지만 마법진의 시전자도 다르고, 심지어 폭주를 일으킨 죄수의 피가 섞여 들어갔으니 오차 범위가 꽤 클 것이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관리의 생각이었다.

시종일관 못 한다는 소리만 반복적으로 듣게 된 델은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러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눈앞에 있는 관리의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고 싶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저, 저기……!”

그때였다.

화재로 엉망이 된 주변을 정리하느라 정신없는 와중에, 혼란한 사람들을 뚫고 누군가 손을 번쩍 들었다.

델은 고개를 돌렸다.

호위들이 반사적으로 접근하는 여자를 막았으나 델이 손을 들어 그들을 물렸다.

이내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너는…….”

“카, 칼로프의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서툰 예법으로 인사를 올리는 얼굴이 꽤 익숙했다.

윈터가 목숨을 대가로 거래를 요청했던 그 암살 미수범이었다.

이름이, 데보라라고 했던가?

리비우스의 세뇌를 당했다던데, 그래도 기억이 남아 있기는 하는지 델과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눈을 피했다.

“무슨 일이지?”

그걸 짐짓 모른 척하며 델이 물었다.

데보라는 조심스럽게 손에 든 손바닥만 한 아티팩트 하나를 내밀었다.

푸른 마력석 안에서 흰빛 하나가 점멸했다.

“이거, 아가씨가 주신 건데요.”

마른침을 삼킨 데보라가 말문을 열었다.

델은 그 말만으로도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바로 이해했다.

“소공작의 위치를 알려 주는 거로군?”

“네? 네, 마, 맞습니다!”

별말도 안 했는데 바로 물건의 용도를 알아차린 델을 보며 데보라가 화들짝 놀랐다.

그녀의 손에서 마도구를 건네받은 델이 얼른 그걸 관리에게 보였다.

“이 정도면 사흘이니 뭐니, 헛소리는 하지 않겠지.”

“그,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럼 당장 출발하지.”

엉겁결에 마도구를 받아든 관리의 눈이 잘게 떨렸다.

또 안 된다는 말을 하려니 심장이 벌렁거렸다.

하지만 두렵다고 해서 거짓을 고할 수는 없었다.

“죄, 죄송합니다만…….”

“또 뭐가 문제지?”

이제 안 된다는 소리에는 이골이 난 델이 한숨을 푹 내쉬며 물었다.

“마력진에 부여된 마력이 너무 적습니다. 이만한 대인원을 한 번에 옮길 수는 없습니다.”

그 말에 델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짜증이 가득하던 얼굴도 어느새 온화하게 풀려 있었다.

“그래. 그럼 나를 포함한 정예 인원을 열 명 정도 선발하겠네. 그럼 얼마나 걸리겠는가?”

“바, 반나절 안에는 준비하겠습니다.”

델은 생긋 웃었다.

아름다운 황태자의 얼굴이 어딘지 섬뜩해서 관리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최대한 빨리, 움직이게 하게. 내가 마력을 얻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내기 전에 말이야.”

마법사가 직접 마법진에 마력을 불어넣는 것 말고도, 마력을 충전하는 방법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마력이 담긴 피를 마법진 위에 뿌리는 것이었다.

델의 말을 알아들은 관리가 허옇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예에. 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