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잠시 멈칫하던 윈터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그리고 되물었다.
“전하께서도, 이미 찾으셨죠?”
“네. 아주 오래전에.”
희미하게 떠오른 미소에서 낡은 먼지 냄새가 나는 듯했다.
메이딜리언과 윈터가 칼로프의 사막으로 떠나는데도 아스터는 황궁을 벗어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황궁에 이미 만타라스가 피어 있으니까.
‘코델리아, 내가 선물 줄게!’
만타라스는 황궁 안의 커다란 예배당에 있었다.
윈터는 정확한 위치까지는 알 수 없지만, 그곳이 비밀 통로 중 한 곳으로 이어진다는 사실과, 그림 뒤쪽 장치를 건드려야 거기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그것을 아는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원작에서 어린 아스터가 봉인되어 있던 만타라스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저, 전하, 이것을 대체 어디서…….’
어린 시절 홀로 숨바꼭질을 하던 외로운 황자는 만타라스를 그저 신기하게 생긴 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궁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위해 주던 시녀장 코델리아에게 선물했겠지.
‘예배당에서 찾았어!’
‘……신이시여.’
하지만 기뻐할 것이라는 아스터의 예상과 달리 코델리아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황급히 꽃을 빼앗아 숨겼다.
해맑게 반짝이던 아스터의 표정도 그때쯤엔 잔뜩 시들어 있었다.
‘왜 그래? 내가 뭐 잘못했어?’
행여나 누가 본 것은 아닐까 두려움에 가득 찬 표정으로 사방을 둘러보던 코델리아가 잠시 멈칫했다.
그녀는 뒤늦게 이것이 자신을 위해 아스터가 가져다준 선물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조금 어색하지만 애써 차분한 척 위장한 낯으로 코델리아가 웃었다.
‘전하께서 잘못한 것은 없습니다.’
이내 코델리아의 시선이 짓이겨진 투명한 꽃으로 향했다.
‘전하께서 잘못하신 일이 아니지요.’
작게 속삭이는 얼굴이 축축이 젖어 들었다.
서글픔으로 가득한 코델리아의 눈동자를 보며 아스터 또한 울적해졌다.
그녀의 말과 달리 자신이 뭔가 잘못한 게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전하.’
‘……응.’
‘선물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다시는.’
‘…….’
‘다시는 그곳에 가지 마세요.’
코델리아의 단호한 말에 아스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선물이 거절당한 것만 같아 서운한 마음이 앞섰지만, 아스터는 그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가엾고 의젓한 어린 황자의 이마를 코델리아가 쓸어 주었다.
그녀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 선황 미쉘라는 코델리아에게 유언을 남겼다.
―예배당에 있는 초대 황제 그림 뒤에, 진실이 숨겨져 있어.
미쉘라가 죽고 나서도 코델리아는 단 한 순간도 그 말을 잊어 본 적이 없었다.
―나중에, 아스터가 다 자라서 자기 자리를 찾고 싶다고 한다면 그때 그 애에게 알려 줘.
죽어 가는 창백한 낯으로 미쉘라는 코델리아의 손을 강하게 붙들었다.
핏기 하나 없는 입술이 힘없이 달싹거렸다.
―나는 이미, 너무 늦었으니까.
코델리아는 아스터의 선물을 그대로 태워 없앴다.
그리고 아스터에게 다시는 예배당으로는 발길도 하지 마시라고 몇 번이나 신신당부했다.
두 사람만의 오랜 비밀이었다.
“만타라스의 위치를 공유하겠습니다.”
상념에서 깨어난 아스터가 입을 열었다.
어린 시절 발견했던 그 꽃이 만타라스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시간이 꽤 지난 뒤였다.
그리고 아스터는 그것으로 크비누스가 제 어머니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도 알아냈다.
“그 말은…….”
아스터의 말에 윈터의 동공이 크게 부풀었다.
“제 제안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이신가요?”
“……네.”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는 아스터의 표정은 단단했다.
제 나름대로 고민과 번민을 거쳐 굳은 다짐을 한 듯 보였다.
“섭정의 비리를 밝힐 증거를 모두 제공하겠습니다. 그 대신.”
아스터가 그답지 않게 빠르게 말을 이었다.
적극적인 협조를 요청하는 아스터의 말에 윈터의 표정이 밝아지다가, 뒤에 덧붙인 조건 같은 말에 그대로 굳어졌다.
“대신 소공작을 내게 줘.”
그 말은 메이딜리언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이제껏 느슨한 자세로 등을 기대고 있던 메이딜리언의 기세가 살벌해졌다.
살기등등한 그의 시선을 마주하면서도 아스터는 흔들림이 없었다.
“어때?”
“……하.”
어이가 없어 그저 헛웃음이 나왔다.
메이딜리언은 혹여나, 말도 안 되지만 아스터가 그저 농담을 하고 있거나 그들에게서 뭔가 떠보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싶어 상대를 살폈다.
그러나 맞부딪힌 눈동자 어디에도 거짓은 없었다.
1황자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혈혈단신으로 공작령 한복판에 찾아와, 크비누스를 실각시킬 증거와 윈터를 교환하자고 하고 있었다.
“미친 건가?”
메이딜리언이 와락 표정을 구기며 되물었다.
딱히 대답을 구하고 한 말은 아니었다.
이리도 무모하게 헛소리를 지껄이다니, 확실히 제정신은 아닌 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협상은 결렬이야. 지금 내가 당신을 죽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겨.”
더 재고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메이딜리언이 딱 잘라 거절했다.
애초에 윈터를 보내고 말고를 자신이 결정할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윈터가 자신을 떠나지 않으리라는 자신감도 있었다.
물론, 확신까지는 아니었지만.
“진심이 아닐 거야, 메이. 네가 참아.”
꽉 쥔 그의 주먹을 톡톡 두드리며 윈터가 말했다.
한숨을 푹 내쉬며 메이딜리언이 손에 힘을 풀었다.
“진심입니다.”
그러나 아스터는 물러서지 않았다.
“내게 와요, 소공작.”
마지막 애원이자 거래였다.
윈터는 그가 왜 자신에게 집착하는지 알 수 없었다.
결코 그에게 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도 굳이 메이딜리언의 앞에서.
“그럼 나도 소공작이 바라는 바를 들어주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아스터가 벗어 두었던 투구를 다시 썼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대의 대답을 기다리겠습니다.”
인사 아닌 인사를 남긴 채 그가 몸을 돌렸다.
제 할 말은 다 했다는 듯 홀가분한 분위기에 메이딜리언은 애써 화를 눌러 참았다.
“전하!”
방을 나서는 아스터를 윈터가 불렀다.
그 목소리를 듣고도 아스터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윈터는 반사적으로 그의 뒤를 따라가려다 메이딜리언에게 잡혔다.
“가도 상관없어요.”
말과는 달리 손에 전해지는 힘은 점점 거세어졌다.
메이딜리언은 윈터가 아스터를 따라 떠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지금 제 눈앞에서 두 사람이 같이 나서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기도 싫었다.
“대신 그러면 1황자는 내 손에 죽어요.”
자신에게 향하는 감정과는 별개로, 윈터가 아스터를 제 나름대로 아낀다는 것을 메이딜리언은 알았다.
그녀는 이 세계의 누구든 안쓰러워하고 안타까워하며 기꺼이 선의를 베풀고는 했으니까.
어리석게도 1황자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호의를 오해하고, 매달릴 수는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 윈터가 휘말리는 꼴을 볼 수는 없었다.
“나는, 당신을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아요.”
소유욕으로 짙어진 눈동자가 윈터를 향해 간절히 애원했다.
그의 아름다운 눈가를 부드럽게 쓸어 준 윈터가 속삭였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그 말에 메이딜리언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자신이 윈터에게 한 말이 그대로 돌아오니 느낌이 이상했다.
윈터가 항상 자신을 아끼고 좋아한다는 표현을 해 줬지만, 이렇게 자신과 같이, 완전한 소유욕을 드러낸 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끓어오르는 애정을 참지 못하고 메이딜리언이 윈터의 팔을 당겼다.
윈터는 그의 품에 가둬졌다.
“그럼 가지 마요.”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묻은 채 메이딜리언이 속삭였다.
목소리는 더없이 달콤했지만, 그의 눈동자는 밖으로 나간 아스터를 향해 맹렬히 타오르고 있었다.
눈앞에 상대가 있었다면 그대로 찢어발겼을 것처럼 흉포했다.
그런 메이딜리언의 마음은 꿈에도 모른 채 윈터가 팔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다.
“안 가.”
윈터를 끌어안은 팔에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안아도, 아무리 안고 있어도 부족했다.
그러나 혹여라도 자신이 윈터를 아프게 할까 봐 메이딜리언은 이를 악물고 참아 냈다.
“그래도 대답은 해 줘야지. 배웅도 해 주고.”
그런 것도 하지 말라고, 필요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저를 살살 달래려는 윈터의 목소리가 좋아서 메이딜리언은 일부러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금방 다녀올게, 응?”
그러자 이마며 눈가로 짧은 입맞춤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메이딜리언은 윈터의 키스를 받아 냈다.
다시 눈을 뜨자 품 안의 윈터가 생긋 웃었다.
애정 어린 눈동자가 오롯이 자신을 담고 있었다.
메이딜리언은 제 가슴이 기쁨으로 충만해지는 것을 느꼈다.
“기다릴게요.”
윈터가 그랬던 것처럼, 메이딜리언이 윈터의 귓불과 뺨, 입술 끝에 무수한 입맞춤을 남겼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마세요.”
간지러운 듯 윈터가 목을 울려 웃었다.
어린 강아지가 넘치는 애정을 어쩌지 못하는 것처럼 치대는 게 사랑스러웠다.
“그래. 그럴게.”
굳게 다짐이라도 하듯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며 윈터가 말했다.
곧 그녀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허리를 감은 단단한 팔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기다린다 어쩐다 하더니 뻔뻔한 얼굴로 그녀를 속박하는 메이딜리언을 보며 윈터가 실소했다.
“메이.”
“네, 윈터.”
“이걸 놔야 가지?”
팔을 톡톡 두드리자 그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듯 맹랑한 표정으로 생글생글 웃는다.
그 눈이 온전히 기쁨과 설렘으로 가득해서 윈터는 차마 핀잔을 주지도 못했다.
“다녀오세요, 윈터.”
언젠가부터 메이딜리언은 그녀에게 더 이상 ‘아가씨’라고 부르지 않았다.
꼬박꼬박 불리는 제 이름이 윈터는 퍽 듣기 좋았다.
괜스레 화끈거리는 귓가를 만지작거리며 윈터는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었다.
“이러고 있는 사이에 1황자 전하는 이미 가 버리셨겠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윈터가 중얼거렸다.
“그럼 더 좋고요.”
지지도 않고 메이딜리언이 대답했다.
그게 더없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기에, 윈터는 그저 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