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살아남는다면 정말 ‘결말을 벗어나는 자’가 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에르퀼은 일부러 뒷말을 삼켰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는, 입에 올리고 싶지도 않았다.
“까마귀야.”
대신 그녀는 희망을 말하기로 했다.
“포기하지 말고 힘껏 발버둥 쳐 보아라.”
신은 언제나 인간 앞에 정해진 운명을 예비하곤 했다.
그러나 그 운명을 마침내 이겨 내는 것 또한 인간이었다.
정해진 결말을 벗어난다는 것은 마땅히 그런 의미일 것이라고 에르퀼은 생각했다.
“나는 네 곁에서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을 지켜보겠다.”
그 짧은 말에 담긴 마음을 알기에 윈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노력할게요.”
* * *
대현자 에르퀼 모네스티에는 오래전 황가와 약속했다.
인간사에는 끼어들지 않고, 오직 예언과 관련된 일에만 그 모습을 드러내겠노라고.
그런 대현자가 공작성에 와 있다는 소식은 반나절도 되지 않아 성 전체에 퍼졌다.
주변 영지부터 하여 황도까지 전달되려면 꽤 시간이 걸리겠지만 대현자가 그들과 함께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람들의 분위기는 고무적이었다.
“크비누스가 꽤 배 아파하겠군요.”
메이딜리언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킥킥 웃은 윈터가 그의 말을 받았다.
“보나 마나 잔뜩 열 받아 있겠지.”
아마 소문이 퍼지지 않게 하려고 발악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안 봐도 뻔하다고 생각하며 윈터가 회의실 문을 열었다.
“다들 와 계셨군요.”
안에는 리어트, 베일리와 엘리슨, 그리고 패트리샤까지 있었다.
하나같이 낯선 인물들이었으나 뜯어보면 칼리스타의 부단장, 선황 친위대이자 비밀 호위대인 아르카의 단장, 그리고 용병왕이었다.
범상치 않은 인물들의 모임에 벌써 기가 질린 건지 로널드 경의 얼굴이 창백했다.
제 나름대로 공작가의 기사단장으로 숱한 위기들을 헤쳐 왔는데, 이번 일은 아무래도 그 규모 자체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셨습니까.”
메이딜리언과 윈터가 회의실로 들어서자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을 맞이했다.
윈터가 부른 인물들 외에도 주변 영지에 협력을 위해 보낸 기사들과 가신들도 있었다.
사람들의 인사를 받던 윈터는 제 자리에 서류만 내려두고 그대로 성큼성큼 패트리샤에게 다가가 악수부터 청했다.
“이리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경.”
“저야말로 소문의 공작님을 이리 보게 되어 좋군요. 패트리샤입니다.”
“오시는 데 힘들지는 않으셨나요? 손을 보태 주시어 정말 감사합니다.”
“뭘요. 용병이야 돈 되는 일이라면 어디든 가지요.”
반짝반짝 빛나는 눈과 그녀답지 않게 살가운 말투에 평소의 윈터를 아는 이들이 시선을 교환했다.
지금의 윈터는 누가 봐도 패트리샤의 열성적인 지지자였다.
“섭섭지 않게 챙겨드리겠습니다.”
“오늘 들은 말 중 가장 듣기 좋군요.”
호의가 가득한 말에 패트리샤가 활짝 웃었다.
가진 거라곤 돈밖에 없는 윈터는 이렇게라도 패트리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그저 기쁘고 수줍기만 했다.
누가 보면 조카가 메이딜리언이 아니라 윈터인 줄 알 것 같았다.
“자, 그럼 마지막 회의를 시작해 볼까요?”
꿈에 그리던 패트리샤와의 만남이 성사되자 윈터는 무척이나 들떴다.
덕분에 회의 분위기는 무척이나 화기애애하게 시작했다.
사실상 이미 칼리스타와 아르카를 통해서 조사를 마친 상황이었고, 전황과 전술을 검토해 최종 결정만 내리면 되는 자리였다.
“병기와 군량은 충분한가?”
“예, 만에 하나 말씀하신 일정에 차질이 생기더라도 결코 부족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준비해 둔 서류를 넘기며 윈터가 계속해서 질문을 쏟아 냈다.
아주 작은 부분까지 세심하게 짚고 넘어가는 모습은 마치 전쟁을 몇십 년은 한 장수 같았다.
이번 크비누스 측과의 전투만 해도 그랬다.
꼭 미리 전투가 벌어질 것을 예측이라도 한 것처럼 모든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윈터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모르는 사람들은 그녀가 타고나길 천재라며 칭송하기 바빴다.
“상대 측 진영은 어떠한가?”
“계속해서 북쪽으로 오는 중입니다.”
윈터의 물음에 리어트가 빠르게 대답했다.
“공성전이라도 벌일 생각인가?”
와락 표정을 구긴 패트리샤가 중얼거렸다.
천혜의 요새나 다름없는 공작성을 무너뜨리는 데에는 꽤 많은 병력이 들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번 전투를 기점으로 내전으로 번질 가능성도 있었다.
“그전에 뛰쳐나오게 만들려고 하겠지.”
테이블에 펼쳐진 지도 위로 메이딜리언의 손가락이 유려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공작령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수원 위에서 멈췄다.
크비누스는 황군을 움직이기보다는 적은 숫자의 병력으로 빠르고 확실하게 해치우기를 바랄 것이다.
메이딜리언이 만약 크비누스와 같은 입장이라면 이 수원을 노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었다.
“설마…….”
그것이 뭘 의미하는지 알아차린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경악을 금치 못한 로널드가 작게 혀를 차며 물었다.
“허, 물에 독이라도 탈 것이라 생각하는 겁니까?”
“그렇게라도 할 자입니다.”
엘리슨이 로널드의 말을 받았다.
장기전이 되면 크비누스가 전적으로 불리했다.
지금은 반역이라는 오명을 씌워 압박하고 있었으나 명분은 어차피 메이딜리언에게 있었으니까.
제 권력을 끊어 내려 하는 메이딜리언을 막기 위해서라면, 크비누스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니 그전에 막아야지.”
윈터는 흔들림 없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전력을 둘로 나눕시다.”
크비누스 진영의 무력과 전황, 그리고 공작성에 준비된 인력들을 계산했을 때 윈터는 이 방법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어차피 우리가 항복하지 않는 이상 무력 충돌은 예상했던 바입니다.”
크비누스는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이고, 윈터와 메이딜리언 또한 그저 반역도로 처형되는 결말은 사양이었다.
동시에 윈터는 메이딜리언이 황좌로 가는 길이 피로 물들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굳이 애먼 사람들까지 끌어들여 피를 보게 할 필요도 없지요.”
너무 많은 피는 반감을 살 것이다.
최소한의 힘으로 최대의 효과를 내는 것이 윈터의 목표였다.
그러기 위해 몇 번이고 계획을 수정하고 다시 짰던 것이니까.
“우리는 그저 지키기만 하면 그뿐입니다.”
“무엇을요?”
간단하게 나온 윈터의 말에 가신 하나가 물었다.
“2황자 전하께서 황궁에 도착하는 그 순간까지 말이죠.”
처음부터 메이딜리언이 황궁에 가기만 하면 끝나는 싸움이었다.
황궁에서는 아스터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는 뜻을 같이하는 학자들과 관리들을 모으고, 에른스트 후작과 움직이며 크비누스의 실각을 준비 중일 것이다.
증거도, 그 증거를 밀어붙일 인물들도 모두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양동작전이군요.”
“예.”
윈터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전투를 벌이는 동안 황자 전하께서는 황궁으로 가서 모든 증거를 밝힐 것입니다.”
그때 패트리샤가 손을 들었다.
“그 증거라는 게 쓸 만한 것입니까? 그러니까, 섭정을 한 방에 무너뜨릴 수 있을 만큼?”
상황과 분위기를 끌어오기 위해 패트리샤는 일부러 증거에 대해 언급했다.
그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으나, 다른 가신이나 기사들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메이딜리언은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선황 폐하의 시해범이 바로 섭정 크비누스다.”
“……무, 뭐라고요?”
충격적인 말에 가신들이 웅성거렸다.
그동안 그들은 윈터가 수인족들을 앞세워 국가 전복을 꾀했다는 크비누스의 주장이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저 이득이 되는 쪽으로 기울어, 시류를 타며 조금 더 큰 권력을 탐하기만 하면 됐으니까.
하지만 이 순간 회의장에 있는 이들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메이딜리언의 말이 사실이라면 명분마저도 이쪽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느닷없이 크비누스가 메이딜리언에게 반역죄를 물으려고 했는지 그 이유가 밝혀진 순간이었다.
“선황 폐하의 시해범이라니…….”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로널드가 놀란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주위의 인물들은 딱히 충격을 받지 않은 듯 보였다.
“다, 다들 알고 계셨던 겁니까?”
“어쩌다 보니.”
로널드가 작게 속삭이며 묻자 베일리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로 그들을 유인할 것입니다.”
사람들의 충격이 어느 정도 가라앉기를 기다리던 윈터가 목소리를 높여 분위기를 환기했다.
그녀의 손끝에는 북부의 카르카스 산맥을 따라 펼쳐지는 거대한 평원이 닿아 있었다.
아주 더운 여름을 제외하면 사시사철 눈이 쌓이는 파노니아 지역이었다.
오랫동안 블라디미르 가문이 관리해 온 이곳에서 윈터는 마지막 전투를 치르기로 하였다.
“이미 그 지역에 사는 이들은 자리를 피할 수 있도록 지시해 두었습니다.”
리어트가 옆에서 한마디 거들었다.
철두철미한 준비성에 가신들이 혀를 내둘렀다.
윈터는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럼…….”
일찍 마치리라 생각했던 회의는 저녁때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마지막으로 회의장을 빠져나오며 윈터는 피곤한 듯 눈가를 꾹꾹 눌렀다.
“윈터.”
“어, 뭐야. 안 가고 있었어?”
“네, 기다렸죠.”
회의장 앞에서 윈터를 기다리던 메이딜리언이 그녀를 따라 나란히 걸었다.
피로감이 가득했던 윈터의 표정에 반가움이 어렸다.
밝아지는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메이딜리언이 조용히 웃었다.
“윈터.”
“응?”
“부탁 하나 해도 될까요?”
“그래. 뭔데?”
윈터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좀처럼 제게 뭔가를 요구하는 법이 없는 메이딜리언의 입에서 부탁이라는 말이 나오다니, 뭐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들어주고 싶었다.
기쁜 듯 눈가를 접어 웃은 메이딜리언이 살짝 고개를 숙여 윈터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일 나랑 데이트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