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뜻밖의 말에 윈터의 눈이 커졌다.
“데이트?”
“네, 그냥 평범한 데이트요.”
크게 고개를 주억거린 메이딜리언이 덧붙였다.
“좋은 거 보고, 맛있는 거 먹고, 바래다주고, 배웅하고.”
말을 잇는 그의 입가에 미소가 짙어졌다.
메이딜리언이 말하는 데이트라는 것에 윈터의 심장도 이상하게 몽글거렸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 일상적이고 평범한 일들이 둘이서는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굳이 부탁이라는 거창한 단어를 꺼내지 않더라도 할 수 있는 것이었고.
“좋아, 그러자.”
윈터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날 밤, 윈터가 머무는 방의 발코니에 리어트가 찾아왔다.
똑똑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줄곧 그를 기다리고 있던 윈터가 문을 열었다.
리어트가 안으로 들어오는 동안 윈터는 한 번 더 주변의 기척을 예민하게 살폈다.
“미행은?”
“없었어.”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은 리어트가 뒤집어쓰고 있던 로브를 벗었다.
이윽고 촛불만 켜 둔 채로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불그림자가 어린 리어트의 표정은 어두웠다.
“그럼 이제 들어 볼까.”
윈터가 소파 등받이에 느슨하게 몸을 기대며 말문을 열었다.
최근 그녀는 칼리스타를 총동원하여 크비누스 진영의 정보들을 수집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윈터가 수인족들의 능력을 이용하여 칼리스타를 운영한다는 것이 드러난 덕분에 이전보다 경계는 삼엄했다.
쥐새끼 한 마리도 경계하고 있는 상대에게서 평소처럼 많은 정보를 얻어 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아주 조금이라도 쓸 만한 것들을 모아야 했다.
이번 전투가 전쟁으로 번지지 않으려면 빠르고 확실하게 크비누스의 숨통을 끊어야 했다.
“최근에 황궁에 마법사들이 여럿 드나든다고 해.”
“어떤 계열의?”
전투를 위한 것이라면 크비누스가 그들을 동원할 만도 했다.
그러나 굳이 윈터가 계열을 짚은 것은, 리어트가 고작 그런 걸 보고하기 위해 운을 띄운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정보들이 워낙 단편적이라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초조한 듯 마른침을 삼킨 리어트가 말을 이었다.
“신전에서 파견된 수호자들인 것 같아.”
리어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신전에서는 특정한 주기마다 열두 명의 사제를 뽑아 그들을 ‘수호자’라고 명명했다.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지 외부에 알려진 바는 없으나 윈터는 오래전 선황 미쉘라의 암살 때 크비누스가 그들을 동원했다는 정보를 극비리에 입수했었다.
그 말인즉, 아마도 크비누스가 윈터의 약점을 공략해 그녀를 침몰시키려 할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쉽지 않은 싸움이 되겠네.”
윈터는 그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히려 리어트가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네가 죽을 수도 있어.”
“그건 이 세계에 태어난 순간부터 그랬어.”
새삼스러운 것도 없다는 듯한 윈터의 말에 리어트는 이를 악물었다.
그가 윈터를 알게 된 그 순간부터, 아니 이미 그전부터 그녀는 늘 죽음과 함께였다.
언제라도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리어트는 아직 그녀의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준비할 수조차 없었다.
“포기할 수는, 없는 거야?”
평소에 버릇처럼 윈터가 목숨 걸고 하는 짓이 이해가 안 된다고 툴툴거린 적은 있었지만, 리어트는 단 한 번도 진심으로 그녀를 말린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고 말았다.
“차라리 그냥 도망쳐서 둘이 살아.”
“…….”
“세상을 등지고 숨어서, 오순도순, 소박하게.”
“리어트.”
“그렇게 살아도 그 자식은 전혀 아쉽지 않을 거야.”
그럴지도 모른다.
원작에서 메이딜리언은 황위와 칸나에 대해 엄청난 집착을 보였다.
제 앞길을 막는 것이 있다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물리치고, 베어 내고, 불태웠다.
그렇게 황위에 오르기 직전, 엘리슨의 배신으로 처형당했지만.
“……그러기엔 이미 너무 멀리 왔어.”
윈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크비누스가 살아 있는 한, 메이딜리언은 평생 도망쳐야 했다.
그를 불행한 삶에서 벗어나게 해서 마침내 행복하기를.
아주 오래전부터 윈터는 간절히 바라 왔다.
“굳이 사지로 걸어 들어가는 이유가 뭐야.”
“그래야 하니까.”
“너는……!”
“리어트.”
윈터가 조심스레 손을 뻗어 리어트의 팔을 잡았다.
벌컥 화를 내던 리어트의 눈이 커졌다.
저를 잡은 윈터의 손끝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얼마 안 남았어.”
“뭐가 얼마 안…….”
반사적으로 물으려던 리어트의 입술이 일자로 꾹 다물렸다.
이내 그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너, 설마…….”
“이미 알고 있었잖아.”
윈터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에르퀼은 크게 무리하지만 않는다면 봉인이 부서질 일은 없을 거라고 했다.
아이셀 또한 보수를 여러 번 거치며 조심만 한다면 기대 수명이 조금은 늘어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자신의 몸 상태는 윈터가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아주 작은 위협에도 봉인은 금세 흔들린다.
세상을 등지고 숨어 산다고 해도, 심장은 이미 너무 약해져 있었다.
“봉인에 성공했잖아.”
“그랬지.”
“그런데 왜…….”
“마력을 담는 그릇은 심장이니까.”
잔뜩 금이 간 유리잔을 몸 안에 품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매 순간이 아슬아슬한 줄타기와 같았다.
굳이 이번 전투가 아니더라도 어차피 자신은 오래 살지 못한다.
애써 외면하고 숨겨 왔지만, 윈터는 태어난 그 순간부터 알고 있었다.
“진작에 죽었어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너도 알잖아?”
윈터는 그저 죽음을 잠시 유예했을 뿐이었다.
추가로 주어진 목숨을 그저 온전히 메이딜리언을 위해 쓰는 것.
만일 자신이 영영 떠나 마지막을 맞게 되더라도, 끝끝내 그가 행복해질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이 윈터의 꿈이자 사명이었다.
“……하.”
리어트가 푹 고개를 숙였다.
절망이 그의 어깨를 무겁게 눌러 왔다.
“거짓말이라고는 못 하는 줄 알았더니.”
작게 중얼거리는 말이 허탈하기 짝이 없었다.
리어트 또한 윈터의 몸이 깨지기 직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윈터가 스스로를 속인 것처럼, 다른 이들도 속기를 바랐기에 기꺼이 모른 척 눈을 감았다.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윈터가 없는 세상이라는 건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미안.”
윈터가 짧게, 힘주어 대답했다.
그녀가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게 리어트에게는 더욱 잔인하게 느껴졌다.
어차피 죽을 것이라고 해도, 아주 조금만이라도, 단 하루만이라도 더 세상에 남아 있을 수 있을 텐데.
죽음마저 선택하려는 윈터가 그저 야속하기만 했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데?”
이미 대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리어트는 원망을 담아 물었다.
그런 그의 말에 윈터가 웃었다.
언젠가 햇살 아래서 보았던, 바닷바람 같은 미소였다.
“그 애를 사랑하니까.”
윈터가 잡고 있던 리어트의 팔을 놓았다.
떨림을 숨기기 위해 그녀는 조금 더 활짝 웃어 보였다.
“그러니까 나를 좀 도와줘, 리어트.”
저를 향하는 간절한 눈빛을 리어트는 감히 외면할 수 없었다.
“……잘, 갈 수 있게.”
두 사람 모두 애써 울음을 삼키느라 목이 아팠다.
“부탁이야.”
윈터는 힘주어 말을 마쳤다.
빠르게 시선을 감췄지만 툭, 하고 눈물이 떨어졌다.
리어트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 *
“좋은 아침, 나일라.”
아침부터 들려온 인사에 나일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연히 침대에 누워 있을 줄 알았던 윈터가 진작에 일어나 제게 인사를 건넸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샤워까지 다 마친 상태인지 젖은 머리를 털어 내고 있었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아가씨.”
안으로 들어선 나일라가 윈터의 손에서 수건을 받아 갔다.
“고마워.”
요즘 들어 부쩍 윈터는 잠이 많아졌다.
몰아치는 일거리들과 매일 반복되는 회의 때문인 듯싶기는 한데.
신경 쓸 것이 한둘이 아니라 밤늦게까지 잠들지 못하는 날도 많았다.
밀린 잠을 보충이라도 하듯, 다음날 별다른 일정이 없으면 늦게까지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도 있었다.
“오늘 뭐 좋은 일이라도 있으세요?”
윈터의 젖은 머리를 마저 말려 주며 나일라가 물었다.
나른하고 차분하던 평소의 아침과 달리 윈터가 작게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응, 데이트하러 가거든.”
아침 햇살 아래 웃는 얼굴이 말갛게 빛났다.
작게 마주 웃은 나일라가 윈터의 머리카락을 빗겨 주며 말했다.
“황자 전하께서는 좋으시겠네요.”
“어? 무, 무슨…….”
누구라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나일라는 데이트 상대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당황을 감추지도 못하고 윈터의 귓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나일라는 웃음을 터뜨리지 않기 위해서 얼른 입꼬리에 힘을 줬다.
“공작가에서 그걸 모르는 사람도 있나요?”
“아무도, 모를 줄 알았는데…….”
나일라의 태연한 물음에 윈터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갔다.
어릴 적부터 둘이 꼭 붙어 다니고, 재회한 뒤로도 세상에 둘밖에 없는 듯이 굴었으면서도 윈터는 전혀 자각이 없던 모양이었다.
진작 상황을 눈치챈 공작이 몇 번이고 메이딜리언을 불러 경고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아마 윈터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을 더없는 충성심, 그저 친우 관계와 같은 애정이라고 생각할 거라고 짐작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이 정확히 어떤 형태인지 모른 것은, 오직 그녀 자신뿐이었다.
“갑자기 너무 부끄럽네.”
뒤늦게 뺨을 붉힌 윈터가 수건에 푹 얼굴을 박았다.
끝내 웃음을 참지 못한 나일라가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의 손에서 수건을 가져갔다.
“공식적으로는 첫 데이트이시니, 예쁘게 해 드릴게요.”
그러나 윈터의 표정이 잠시 어두워졌다.
“그럼 좋은데, 그럴 수는 없고.”
테이블 위에 놓인 옷은 공작인 걸 감추기 위해서인지 더없이 평범하고 허름했다.
곧 윈터는 거울 앞에 놓인 푸른색 병을 가리켰다.
“이걸 쓸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