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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화 (129/150)

129화

“네? 무슨 준비요?”

“그런 게 있어. 다가올 재앙을 겸허히 받아들이려는 마음의 준비랄까.”

‘후후, 벌써 걱정되는군.’ 하며 델이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윈터에게 제대로 된 대답을 들려줄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델이 윈터에게 캐물었다.

“그건 그렇고 공작, 좀 더 자세히 말해 봐.”

“뭘…… 말씀이세요?”

“여기까지 오게 된 상황 말이야.”

“그게…….”

“기억 안 나는 거 말고, 생각 나는 부분만 대강 추려서 알려 줘.”

윈터는 결국 기억을 더듬어 가며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어릴 적 마력의 부작용부터 시작해 마지막 폭주로 인해 죽을 뻔한 이야기의 내막까지 전부.

그녀의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델은 한탄하고, 짜증스러워하고, 머리를 감싸고 괴로워하고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물론 종종 혼자서 히죽 웃기도 했다.

듣는 사람의 감정 표현이 워낙 다양했기 때문에 윈터는 마치 제가 꺼낸 이야기가 한 편의 대서사시나 신파극인 듯했다.

마침내 윈터가 다시 깨어나 방에서 감금되다시피 했던 부분까지 말하고 나자 델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좋았어. 결론이 나왔군.”

“무슨 결론이요?”

“이건 어디까지나 내 의견이긴 한데, 둘 다 잘못한 게 있네.”

윈터가 눈을 깜박였다.

자신의 잘못은 알겠지만, 메이딜리언의 잘못은 잘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가요?”

“솔직히 말해 봐, 공작.”

몸을 숙여 윈터에게 바짝 다가선 델이 말문을 열었다.

그녀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여태까지 그 인간이랑 싸운 적 없지?”

“누구, 설마 메이랑요?”

“그래.”

윈터는 고개를 갸웃했다.

델이 말하는 ‘싸움’이라는 범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의견이 충돌해서 갈등이 벌어진 적은…….”

“그런 거 말고.”

제일 먼저 생각이 난 부분을 대답하려는데 델이 단호하게 말을 끊어 냈다.

아무래도 그녀가 생각하는 싸움과 윈터가 생각하는 싸움에는 차이가 있는 게 확실했다.

델은 이 답답한 연애 바보를 위해 조금 더 범위를 좁혀 주었다.

“사소한 거에 마음 상해서 옥신각신하는 감정싸움 같은 거 말이야.”

“아.”

다행히 윈터는 나름대로 이해력이 빠른 학생이었다.

이내 고개를 가로젓는 윈터를 보며 델도 모든 의문의 실마리를 찾았다.

“역시, 그랬군.”

“아까부터 혼자만 뭘 알고 계시는 것 같은데 저한테도 공유 좀 해 주시죠.”

“음? 아아, 그냥.”

픽 웃는 얼굴은 무척이나 홀가분해 보였다.

정작 당사자인 윈터는 전혀 모르겠다는 듯 델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역시 범상치 않은 인물들이라 그런가.”

히죽 웃는 얼굴이 아주 의미심장했다.

“사랑싸움도 요란하게 하는구나 싶어서.”

자리에서 일어선 델은 어느새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미리 각오나 해 둬, 공작.”

“뭘요?”

“곧 폭풍이 불 거야.”

* * *

골목마다 사람들이 대화 나누는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와글와글 귀가 아플 정도의 말소리를 들으며 윈터는 그저 앞으로 걸었다.

오늘 칼로프에서 무슨 축제가 벌어진다며 델은 무니스와 윈터만 데리고 황궁을 빠져나왔다.

“[제니어스 제국에서 물 건너온 마력 아티팩트 구경하시오!]”

“[오늘 칼로프 최고의 미남 선발전이 열립니다! 참가하실 분!]”

“[식사 있어요! 식사하고 가세요!]”

가는 길마다 사람에 치여서 제대로 앞으로 걷기도 어려웠다.

건장한 두 사람이 아니었다면 윈터는 사람들의 파도에 휩쓸려 금방 길을 잃고 말았을 것이었다.

“오오, 공작, 들었어?”

“뭘요?”

“저기서 칼로프 최고 미남을 뽑는다잖아. 이 제국에 나만 한 미남이 없는데 말이지.”

당당하게 턱을 쳐들고 하는 말에 한치의 부끄러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실제로 델은 대단한 미남이긴 했다.

가끔 윈터는 저 안에 자신의 정체를 숨긴 여자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잊었다.

아마 델 자신도 대체로 잊고 사는 듯했다.

“[무니스, 같이 나갈래?]”

“[……싫습니다.]”

“[에이, 상금이 어마어마한 모양인데?]”

습관처럼 애꿎은 무니스를 쿡쿡 찌르며 델이 장난을 걸었다.

그런 두 사람을 보던 윈터가 물었다.

“근데 이래도 되나요?”

“응? 뭐가?”

“오늘 말이에요.”

사실 오늘은 윈터가 사벨라 황후의 초대를 받아 그녀의 궁에 가는 날이었다.

그런데 입궁은커녕 축제 구경이나 하고 있으니, 무례도 이런 무례가 없었다.

말도 없이 초대를 무시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아아, 그거.”

윈터가 명확히 뭐라고 집어내지 않아도 델은 찰떡같이 그녀의 말을 이해했다.

델은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일부러 그런 거야.”

“네? 대체 왜요?”

“다른 건 몰라도 그대가 황후를 만나는 건 역시 안 될 것 같아서.”

사벨라 황후는 윈터를 통해서 제니어스 제국과 델의 유착 관계를 파악해 보고자 할 것이다.

여차하면 윈터를 이용해 악독한 짓을 꾸밀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곳은 칼로프였고, 그녀를 지지하는 이들이 곳곳에서 역성을 들어 줄 테니까.

굳이 명백한 증거가 없더라도 델을 제니어스와 엮어 보내 버릴 준비를 할지도 몰랐다.

물론 어디까지나 추측이었으나, 델은 습관처럼 가장 최악의 경우를 가정했다.

그리고 만약에 지금 정말로 윈터가 칼로프의 일에 깊숙이 관여하게 되면…….

“뒷감당이 안 될 거야.”

단순히 윈터가 블라디미르 공작이거나 칼리스타의 주인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는 무려 제니어스 황궁에서 황제의 손님으로 머물던 인물이었다.

아마도 차기 황후 감일지도 모르지.

가뜩이나 살기 팍팍한데, 델은 붉은 눈의 미친놈에게 시달리고 싶지 않았다.

“그대는 어디까지나 나의 손님이고, 칼로프에 아주 잠깐 들렀다가 사라지는 거지.”

그러니 무례를 저지르는 한이 있더라도 윈터는 가급적 칼로프 황궁과 엮이지 않는 게 좋았다.

“마법처럼 말이야.”

뾰로롱, 이상한 의성어를 뱉으며 델이 손을 반짝였다.

작게 인상을 찌푸렸던 윈터가 말했다.

“혹시 저 여기에 버리고 가시려고요?”

“그럴 리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델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대를 마중 나온 사람들이 있잖아.”

축제를 핑계로 다양한 나라에서 돈과 사람들이 칼로프로 잔뜩 모여들었다.

건물 위에서 연신 꽃가루를 뿌려 대서 눈이 어지러웠다.

이 혼잡한 틈을 타 그들은 칼리스타의 지원군과 접선하기로 했다.

물자와 아티팩트를 포함한 다양한 무기들, 그리고 병사들까지.

행상을 가장해서 들어오려면 오늘만큼 좋은 기회가 없었다.

난생처음 보는 볼거리에 종종 시선을 뺏기면서도 윈터는 델을 놓치지 않기 위해 열심히 걸어야 했다.

“드디어 도착했군.”

“허억, 허억.”

델이 한 건물 앞에 서서 경쾌한 웃음을 지었다.

윈터는 비척거리며 뒤따라 서서 거친 숨을 몰아 내쉬었다.

“응? 뭐야, 공작. 체력이 아주 바닥이군.”

“제가 한 달을 누워 있었단 사실을 잊으셨어요?”

“……이런, 내가 배려가 부족했군. 업어 줄까?”

“됐어요.”

윈터가 얼른 손사래를 쳤다.

제게 다가오는 델을 보며 무니스가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렇게 티 나게 질투하고 있는데 델은 신경도 안 썼다.

“여긴 뭐 하는 곳이에요?”

혼자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윈터가 물었다.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도 여러 무리가 쉴 새 없이 건물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에도 간판 같은 게 없었다.

문 앞을 지키고 선 험악한 얼굴들도 그렇고, 어디로 보나 음식점 같지는 않았다.

“내 놀이터야.”

“그냥 평범한 도박장 같은데요.”

꽤 예리한 추측에 델은 대답 없이 히죽 웃었다.

이내 세 사람 또한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무니스!]”

“[이게 누구야, 라드리카!]”

몇 걸음 가기 무섭게 누군가 델을 향해 외쳤다.

델이 그를 반갑게 끌어안으며 신나게 뭐라고 떠들었다.

아마 이곳에서 델은 무니스의 이름을 써서 유흥을 즐긴 모양이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그 사이 진짜 무니스는 윈터를 데리고 사람들 사이에 섞여 이동하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환호하거나 싸우는 소리 때문에 축제의 열기가 가득한 대로변보다 이 안이 더 혼잡했다.

“[저,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무니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위층으로 올라가 복도를 가로질렀을 뿐이었다.

“[이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안에 뭐가 있는데요?]”

“[당신이 기다리던 것.]”

“[네?]”

소음 때문에 마지막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무니스가 당신이 기다리던 것이라고 했는지, 아니면 당신을 기다리던 것이라고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문이 열렸고, 무니스는 제 임무를 마쳤다는 듯 윈터가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후 자리를 떴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윈터가 조심스레 어두운 방 안으로 들어섰다.

분명 칼리스타의 지원군과 접선하기로 했는데, 델도 없이 혼자 만난다는 게 좀 이상하긴 했다.

“저기…….”

어두컴컴한 방 안에 어떤 남자가 서 있었다.

안쪽으로 걸어가며 윈터가 입을 열었다.

남자가 입은 온통 새카만 복장이 익숙했다.

그녀의 수인족 호위대의 의복이었다.

“로난?”

윈터가 호위대장의 이름을 불렀다.

그런데 상대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어쩐지 느낌이 이상했다.

로난이라기엔 상대의 키가 너무 컸다.

마침 바람이 불어 커튼이 펄럭였고, 안쪽으로 빛이 들이쳤다.

허공으로 흩날리는 먼지 속에서 남자가 복면을 내렸다.

윈터가 놀라서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충격으로 잔뜩 흔들렸다.

“너……!”

“드디어 찾았다.”

그녀의 앞으로 성큼 다가선 남자가 윈터의 팔을 잡았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다시는 놓지 않으려 단단히 벼르고 있는 것 같았다.

윈터는 꿈에서 본 사람을 마주하는 것처럼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그녀를 보며 안도한 듯 미소 짓는 그의 표정이 날카로웠다.

잠시 떨어져 있던 동안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는지 그새 얼굴이 많이 상했다.

남자는 윈터를 향해 물었다.

“그동안 잘 지냈어요?”

“……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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