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1. 2화
* * *
“하아, 그때 그냥 구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오래전의 기억을 되새기며 리어트가 중얼거렸다.
미약한 후회가 담긴 목소리에 윈터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한창 칼리스타 본점 사무실에서 밀린 서류를 검토하던 중이었다.
“어? 뭐라고?”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리어트는 늘 그랬던 것처럼 대화를 얼버무렸다.
윈터는 얼마 전 황도로 다시 돌아왔다.
그동안 벌려놓은 일이 워낙 많아서 여태 황궁에 붙잡혀 있던 모양이더니, 드디어 오늘에서야 간신히 틈을 내서 칼리스타 본부로 온 것이었다.
리어트와 재회한 윈터는 즉시 그에게 자기가 다 잘못했다며 싹싹 빌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작게 한탄하는 소리에 윈터의 어깨가 흠칫 튀었다.
방 안에는 두 사람이 전부였다.
그렇다면 당연히 저 말은 윈터 자신을 향하는 것이었다.
애써 서류를 향해 시선을 돌렸던 그녀는 결국 양심의 가책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리어트, 내가 미안하다니까.”
“넌 차라리 어릴 때가 나았어.”
그러나 리어트의 잔소리는 멈출 줄 몰랐다.
그는 가늘게 뜬 눈으로 윈터를 흘긴 채 쯧쯧 혀를 찼다.
“어릴 때는 꽤 순진하고 착하고 성실한 어린이였던 것 같은데.”
“그건 지금도 그렇지 않니?”
“흥, 다 크고 나서야 곳곳에서 사고만 치는 사람을 성실한 어른이라고 하는 건 좀 어폐가 있지 않나?”
“……아니, 그건.”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아아, 그래. 너 혹시 사춘기를 너무 늦게 겪는 거 아니야? 저런 사람이 이 나라의 공작이라니, 말이 돼?”
평소에 늘 을의 입장이던 리어트는 이 기회를 틈타 신나게 윈터의 속을 긁었다.
지은 죄가 워낙 컸던 윈터는 차마 뭐라고 반박하지도 못하고 그저 묵묵히 리어트의 말을 들었다.
그러나 저 얄미운 얼굴과 목소리 때문에 점점 열 받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설마 이렇게 자기 목숨을 쉽게 내던지는 사람으로 클 줄 알았으면 너 따라서 황도로 오는 게 아니었는데 말이야.”
“참나, 쉽게 내던지다니!”
“아니라고 할 수 있어?”
“그때는, 그때는 어쩔 수 없었어.”
윈터가 시무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랬겠지. 그럼 지금 이런 상황도 다 받아들여.”
리어트가 윈터에게 빈정거리며 말했다.
뭐라고 반박하려던 윈터는 저를 향하는 무시무시한 보랏빛 눈동자를 마주하고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내가 몇 번이고 뜯어말렸는데도 넌 귓등으로도 안 들었지.”
“그…….”
“결국 너 혼자 죄다 짊어지고 죽으려고 들었잖아. 안 그래?”
“저…….”
“수인족이 세상에 당당히 모습을 드러낼 수 있게 해 주겠다던 분은 어디로 가신 거죠? 저는 여태 그분만 믿고 이 조직을 운영해 왔는데 말이죠.”
“그러니까…….”
“아아, 불쌍한 우리의 동지들이여. 우리의 약속은 그저 하찮은 휴지 조각이 되어 버렸다네!”
리어트가 윈터 주위를 빙빙 돌며 과장된 목소리로 외쳤다.
결국 윈터가 손에 들고 있던 깃펜을 쾅, 하고 책상 위에 내던졌다.
“듣자 듣자 하니까 진짜.”
“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윈터가 리어트를 노려보았다.
물론, 그런다고 겁먹을 리어트가 아니었다.
당당하게 턱을 쳐든 그를 마주한 윈터가 먼저 항복했다.
“……아닙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녀는 다시 쭈굴쭈굴 어깨를 접고 자리에 앉았다.
그 뒤로도 연신 리어트의 눈치를 보며 초조한 듯 다리를 떨던 윈터가 문득 아, 하고 짧은 탄성과 함께 다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본부에 오며 챙겨 왔던 물건이 이제야 생각난 모양이었다.
“그건 또 뭐야?”
윈터가 낑낑거리며 끌고 오는 거대한 상자를 보며 리어트가 물었다.
“이거? 기념품. 일종의 선물이지.”
“뇌물 아니고?”
“무슨 그런 섭섭한 소리를 하고 그래.”
“대체 뭔 기념품인데?”
상자를 봉인하고 있던 자물쇠를 마력으로 박살 낸 윈터가 뚜껑을 활짝 열었다.
그러자 물씬 낯선 향기가 그 안에서 뿜어져 나왔다.
안에는 보라색 음료가 든 병들이 가득했다.
“짠.”
“이게 뭐야?”
“칼로프에서 유명한 술이래.”
“……술?”
몸을 숙인 리어트가 상자를 들여다보았다.
병마다 붙은 라벨의 모양이 조금 의심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이거 뭐로 만든 건데?”
“사막 전갈의 꼬리를 100년 동안 숙성시킨…….”
“반품해.”
리어트는 두말하지 않고 윈터의 뇌물을 거절했다.
“뭐? 왜?”
“사막 전갈의 꼬리면 거기에 맹독이 있다는 것도 알 거 아니야?”
“알아서 잘 제거했겠지. 무려 칼로프의 황후 마마께서 보내 주신 선물이란 말이야.”
“그 사벨라 황후라면 더더욱 의심되는군.”
대체 칼로프에서 뭘 하고 돌아다닌 건지.
타국의 황후가 그녀에게 뭐하러 이런 선물을 보낸단 말인가.
“참나, 아니 기껏 생각해서 준 선물인데 말이야. 이게 정력에 그렇게 좋대.”
“그럼 네가 그렇게 사랑해 마지않는 황제 폐하께 진상하지그래.”
“돼, 됐거든?”
뭘 생각하는 건지 윈터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덕분에 리어트는 어제의 숙취가 다시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윈터가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고는 툴툴거렸다.
“요새 술독에 빠져 산다는 얘기가 있어서 특별히 챙겨 왔는데.”
“누가 그런 헛소문을 냈어? 데보라지?”
“……아니거든.”
“아니기는 개뿔이.”
보나 마나 그 요망한 아가씨가 윈터에게 속닥속닥 제가 본 것을 모두 고해바쳤을 것이다.
어이가 없다는 듯이 픽 웃은 리어트가 중얼거렸다.
“이거야 원, 병 주고 약 주고네.”
속이 쓰렸다.
반사적으로 배를 문지르자 윈터가 기민하게 그를 살폈다.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치유라도 해 줄까?”
골드 드래곤의 심장을 이식받은 뒤로, 윈터는 이제 완전히 모든 마력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평소에 숨 쉬듯 마력을 낭비해도 아플 일이 없다 보니 그녀는 점점 건강을 되찾았다.
그래,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리어트는 윈터가 아픈 모습을 너무 오래 봐 왔다.
좋아하는 친우가 더는 고통받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 그는 만족하기로 했다.
“내가 누구 때문에 술을 마셨는데.”
“엉? 뭐라고?”
“아냐, 됐어. 아무것도 아니야.”
“넌 맨날 아무것도 아니래. 그래서 대체 그 아무것도 아닌 게 뭔지 이번엔 좀 알려 줘 봐.”
“됐거든.”
유치한 말싸움을 거는 윈터를 이리저리 피해 다니며 어느새 리어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하여간 먼저 좋아하는 사람이 손해라고, 그는 생각했다.
* * *
숲속에서 윈터와 통성명을 한 뒤, 리어트는 그녀를 섬 반대쪽까지 업어서 데려다주었다.
금방이라도 다시 쓰러질 듯한 윈터를 도저히 홀로 되돌려 보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해가 져 버렸네.’
어느새 노을이 비치는 바닷가를 보며 윈터가 중얼거렸다.
‘들어가서 같이 저녁 식사라도 하고 갈래?’
어쩌다 보니 식사에 초대까지 받았으나 리어트는 당연히 거절했다.
비실비실 힘없는 어린아이라도 상대는 인간이었다.
그는 살면서 한 번도 제대로 본 적 없는 인간이 무서웠다.
게다가 윈터는 대현자와 함께 살고 있었다.
그 대현자 또한 아무리 마을 사람들이 위대하다고 칭송해도, 그래 봤자 인간이었다.
‘인간은 믿을 수 없어.’
‘뭐, 그래.’
자신을 잔뜩 경계하는 리어트를 본 윈터는 재차 권하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렸다.
리어트는 아마 이것이 윈터와 마지막으로 만나는 순간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그 뒤로도 두 사람은 종종 숲에서 마주쳤다.
그때마다 윈터는 정신을 잃고 쓰러진 채였다.
“너 말이야, 혹시…….”
줄곧 윈터를 관찰해 왔던 리어트가 물었다.
“혹시 무슨, 학대라도 당하는 거야?”
“뭐?”
전부터 했던 생각이었다.
이 섬에 있는 유일한 어린 인간이었다.
학대를 당한다기엔 행색이 그리 초라하지는 않았지만, 윈터는 자주 아팠다.
처음 만났을 때 발견했던 멍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다른 부위에서도 발견되곤 했다.
“그 마녀가 널 때리는 거냐고.”
리어트의 의심은 나름 합당했다.
그러나 윈터는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했다.
“대체 어떻게 하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지?”
“맨날 여기저기 멍도 들어 있고 걸핏하면 쓰러지고 저번에는 피까지 토했잖아.”
줄줄이 나오는 이유에 윈터의 표정이 조금 난처해졌다.
턱을 긁적이던 그녀가 짧게 리어트의 의구심을 일축했다.
“그건 그냥 지병이야.”
“무슨 지병이 그래?”
“있어.”
윈터는 제 몸 상태에 대해서 자세히 언급하는 것을 꺼리는 것 같았다.
대충 얼버무리는 그녀의 표정이 처음으로 싸늘하게 변했다.
“아주 지독한 놈이 들러붙어 있거든.”
리어트는 순간 멍하니 입을 벌렸다.
형체도 없는 무언가를 향한 날카로운 증오가 윈터의 눈에 서리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바보 같은 얼굴로 눈만 끔벅이던 리어트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아픈 애가 여기까지는 왜 와?”
“왜겠니.”
윈터가 혀를 쯧쯧 차며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사실 이 질문은 처음 숲에서 윈터를 발견했을 때도 했던 것이었다.
당시에는 섬에 뭔가를 찾으러 돌아다녔다는데, 지금 와서는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제가 찾던 것은 그때 이미 찾았다나 뭐라나.
그러면서 자신을 바라보던 윈터의 표정이 묘해서 리어트는 더 캐묻지 못했다.
꼭 저를 찾기 위해 이 섬을 헤집고 다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왜, 왜 오는데?”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리어트는 궁금했다.
피를 토할 정도로 아프고 나약한 애가 왜 굳이 이 깊은 숲속까지 찾아와서 자신과 이러고 있는지.
아니, 사실 어쩌면 이미 대답을 예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어릴 때부터 눈치가 비상하고 영리한 축에 속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어트는 윈터의 대답을 꼭 듣고 싶었다.
“정말 몰라?”
그런 그의 마음을 훤히 꿰뚫어 보기라도 하듯 작게 웃은 윈터가 말했다.
“당연히 널 만나려고 그러는 거지.”
리어트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