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1. 4화
윈터가 천천히 리어트를 향해 걸어왔다.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워질 때마다 리어트의 심장도 쿵, 쿵, 크게 뛰었다.
그 순간 주변의 모든 것들이 그와 멀어졌다.
모든 감각이 불투명해진 가운데, 오직 윈터만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마침내 윈터가 리어트의 바로 앞에 섰을 때, 그녀의 몸이 그대로 앞으로 기울어졌다.
“……윈터!”
당황한 리어트가 황급히 쓰러지는 윈터를 부축했다.
울컥, 그녀가 토해 낸 피가 리어트의 어깨를 뜨겁게 적셨다.
리어트는 그만 새하얗게 질렸다.
“왜, 왜 그러는 거야, 갑자기! 정신 차려!”
리어트가 윈터를 부르며 어떻게든 의식을 찾게 하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만나기로 한 친구가 안 와서 직접 찾으러 왔다고 당당하게 말할 때는 언제고, 윈터는 다시 무력하고 연약해졌다.
힘없이 늘어지는 윈터를 애써 추스른 리어트가 그대로 그녀를 등에 업었다.
“리어트.”
그때, 막 창고를 나가려는 리어트를 그의 아버지가 가로막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리어트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그대로 아버지를 스쳐 지나갔다.
예고도 없이 일어난 사태에 마을 사람들이 웅성거리면서도 길을 비켜섰다.
이제 보니 마을 곳곳이 엉망이었다.
아무래도 아까 그 굉음들은 윈터의 소행인 듯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무리하다가, 결국은 쓰러진 것이고.
“……젠장.”
알 수 없는 무력감이 리어트를 휘감았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거기, 꼬맹이.”
윈터를 등에 업은 리어트가 마을 입구에 다다랐을 때, 누군가 그를 불러세웠다.
조금 허리를 펴니 완고해 보이는 인상의 노파가 서 있었다.
“누구세요?”
처음 보는 인간의 등장에 리어트가 잔뜩 경계하며 물었다.
그러자 픽 웃은 노파가 산 아래쪽을 가리켰다.
“나는 저쪽, 저기 초록 지붕 집에 사는 인간인데.”
초록 지붕 집에 사는 인간.
눈앞의 노파가 마을 사람들이 말하던 그 대현자라는 것을 깨달은 리어트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내 에르퀼이 리어트의 등에 업혀 있는 윈터를 가리켰다.
“우리 집 꼬마가 여기서 난리를 피우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
간단히 말하자면 보호자의 등장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이 직접 윈터를 집으로 데려다주고 싶었지만, 에르퀼이 있는데 굳이 리어트가 나서는 것도 이상했다.
이내 리어트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르퀼이 작게 손짓하자 은은한 녹색 빛에 휩싸인 윈터가 그대로 허공에 동동 떴다.
알 수 없는 조화에 리어트가 흠칫 놀랐다.
“아이고, 대현자님!”
그때 그들 사이로 후다닥 촌장이 달려왔다.
“여기까지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보아하니 우리 집 애가 사고를 친 것 같아서.”
“네? 아아, 저것 말씀이십니까? 하하! 고작 저런 걸로 사고라니요. 어린 나이에 그럴 수도 있지요!”
늘 굳은 표정으로 쯧쯧 혀를 차는 것밖에 모르는 것 같던 촌장은 대현자의 앞에서는 굽신거리며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줄 것처럼 굴었다.
에르퀼은 촌장에게 담담히 사과했다.
“폐를 끼쳐 미안하네. 이미 벌어진 일을 덮을 수는 없겠지만, 최대한 원래대로 돌려놓아 주겠네.”
대현자의 시선이 마을 곳곳에 머물렀다.
놀라운 일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윈터를 감싼 것과 비슷한 녹색 빛이 마을 전체를 뒤덮더니, 마치 윈터가 벌였던 사고들이 전부 거짓이라는 듯 하나둘씩 원래대로 돌아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놀란 사람들이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인간이 벌인 일이라고 하기에는 가히 기적과도 같았기에, 사람들의 눈에 경외심과 공포가 서렸다.
“네가 이 녀석이 말한 리어트구나.”
마을이 원래 모습을 찾는 것을 지켜보며 에르퀼이 말했다.
움찔한 리어트가 돌아보자 에르퀼이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비록 처음 보는 인간이었지만 리어트는 순순히 경계심을 풀었다.
저런 신기한 일도 눈 하나 깜짝 않고 벌이는 인간이 고작 저 같은 보잘것없는 어린애를 어떻게 할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고맙다.”
이 난리에도 윈터는 여전히 눈을 뜨지 못했다.
잠시 망설이던 리어트는 용기를 내서 물었다.
“걔, 어디가 아픈 거예요?”
“심장.”
에르퀼이 짤막하게 대답했다.
“원래 이렇게 무리하면 안 되는데…….”
윈터를 바라보는 에르퀼의 시선에 안쓰러움이 가득했다.
그러나 다시 리어트를 향하는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아무래도 새로 사귄 친구가 꽤 맘에 들었던 모양이다.”
뭔지 모를 부끄러움에 리어트는 황급히 눈을 피하며 뺨을 긁적였다.
윈터가 엉망으로 헤집어 놓았던 마을은 금세 말끔하게 복구가 되었다.
어떤 곳은 원래보다 더 멀쩡해져 있었기 때문에 다들 좀 놀라긴 했어도 크게 화가 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물론 단 한 사람만은 예외였다.
“아직도 네 생각에는 변함이 없느냐.”
마을이 조용해지고 나자, 리어트의 아버지가 그에게 물었다.
원래라면 다시 창고에 갇힐지도 몰랐지만 에르퀼은 뭔가를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윈터가 박살 낸 창고 문만은 고쳐 주지 않았다.
덕분에 두 부자는 서로 등진 채 이부자리에 나란히 누운 채였다.
오래간만에 편한 자리에 누웠기에 리어트는 거의 잠이 들 뻔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목소리에 다시 눈을 떴다.
잠시 고민하던 리어트가 대답했다.
“……네.”
짧고, 단호하고, 확고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리어트의 꿈은 점점 커다랗게 부풀고 있었다.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으로, 제 태생에 대한 고민으로 심어진 작은 씨앗은 악을 쓰며 싹을 틔웠다.
그러자 등 뒤에서 미약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그 아이.”
“…….”
“강하더구나.”
창고에 갇혀 있던 리어트는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윈터의 위력은 대단했다.
단신으로 마을에 쳐들어와 펼친 마력은 어린아이가 결코 가질 수 없는 힘이었다.
대현자의 집에서 지내는 아이이니 다들 평범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설마 그 정도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동시에 약했다.”
너무 커다란 힘에 분명 그 작은 아이는 버거워하고 있었다.
리어트 또한 제 아버지의 말에 옷을 적시던 붉은 피를 떠올렸다.
처음 만났을 때도 분명, 윈터는 피를 토했다.
‘그건 그냥 지병이야.’
딱히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아서 자세히 묻지는 못했지만 윈터는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아주 지독한 놈이 들러붙어 있거든.’
윈터의 말마따나 지독한 놈이 틀림없었다.
에르퀼은 윈터의 심장에 문제가 있다고 했다.
리어트는 제 가슴 위에 조심스레 손을 얹어 보았다.
쿵, 쿵, 놀란 건지 떨리는 건지 모를 박동이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했다.
어쩌면, 혹시 어쩌면 자신이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있을지도 몰랐다.
막 자라나고 있는 꿈 곁에 작은 감정이 여린 싹을 틔웠다.
“정말로 괜찮겠느냐.”
그의 아버지는 걱정스럽다는 듯 재차 물었다.
그러나 리어트는 이번에도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아요.”
“……그래. 정 그렇다면, 이제 네 맘대로 해라.”
아버지의 반쯤 포기나 다름없는 허락이 떨어졌다.
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겨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리어트는 이 순간을 즐기기로 했다.
그는 그 뒤로도 윈터와 단짝처럼 지내며 섬 곳곳을 쏘다녔다.
마을 사람들은 대현자라며 두려워하는 에르퀼이 머무는 집에 정식으로 초대받아서 종종 식사도 함께했다.
“뭐어? 공작? 네가?”
“그렇다니까.”
“에헤이, 농담하지 마.”
“……이게 농담 같니?”
그리고 한참 뒤에야 그는 윈터가 블라디미르 공작 가문의 외동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끔 해 주는 황도 생활 이야기가 어딘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그 무시무시하다는 공작의 딸이었을 줄이야.
“그럼 여기에는 그, 지병인지 뭔지를 고치려고 온 거야?”
“맞아.”
윈터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 낫기 전까지는, 돌아갈 수 없지.”
그렇게 중얼거리는 표정이 퍽 쓸쓸했다.
일전에 수인족 마을에 쳐들어오며 마력을 무리하게 사용한 덕분에, 윈터는 한동안 침대 신세를 졌다.
그 뒤로도 종종 아팠고, 며칠씩 바깥으로 나오지 못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늘 약속 없이도 적당한 때에 서로를 찾아 만나곤 했었다.
윈터가 오지 않는 날에는 리어트가 직접 초록색 지붕 집으로 찾아갔다.
그러다 아주 가끔 문 너머로 윈터의 비명을 들을 때도 있었다.
“으, 으아악! 아아아악!”
작고 마른 몸에서 나오는 거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처절한 비명을 목이 쉴 때까지 내지르곤 했다.
윈터는 가급적 제 병에 대해서 리어트가 모르기를 바랐기 때문에, 그럴 때마다 리어트는 그저 문밖에 웅크린 채 몇 시간씩 기도하곤 했다.
‘저 애를 살려 주세요. 더는 아프지 않게, 제발.’
심장에 도사린 마력이 날뛰지 못하도록, 어떻게든 그것을 가다듬으려 윈터는 실험을 거듭했다.
그러고 나면 실핏줄이 터져서 눈은 충혈되고 몸 곳곳이 얼룩덜룩하게 멍들었다.
고통에 덜덜 떨면서도 윈터는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소리만 들어도 끔찍한데, 잔뜩 앓고 볼품없이 마른 꼴로도 윈터는 웃었다.
“……안 무서워?”
어느 날 리어트가 물었다.
모래사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은 채로, 윈터는 푸른 바다 저 멀리를 바라보며 웃었다.
아픔을 참느라 짓씹었던 입술이 꺼칠하게 일어나 있었다.
“무섭지.”
“그런데 어떻게 버텨?”
“모르겠어.”
윈터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지켜 주고 싶은 사람이 있거든.”
잠깐 말을 고르던 그녀가 작게 속삭였다.
리어트의 귀가 쫑긋거렸다.
“그 사람을 위해서 그냥 견디는 거지, 뭐.”
멍으로 얼룩진 제 팔을 내려다보면서도 윈터의 얼굴에는 그늘 하나 없었다.
햇살 아래 미소가 반짝였다.
뭔가에 홀린 것처럼, 리어트는 그 옆얼굴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나는 꼭 괜찮아질 거야.”
다짐하는 얼굴이 어딘가에 두고 온 약속처럼 단단했다.
바닷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흔들고 지나갔다.
리어트의 심장도 속절없이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