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2. 2화
메이딜리언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온몸이 부서질 듯 아프고, 곳곳에서 열이 나며 지끈거렸다.
악몽 속의 몸은 어릴 때와 똑같이 조악하기 짝이 없어서, 그를 신경질적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이깟 몸 정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 꿈에서 만날 윈터는 어떤 모습일까 기대하는 것만으로도 짜증을 상쇄시킬 수 있었으니까.
“어라, 이게 누구야?”
기억에 의존해 공작성을 내달리던 중에, 메이딜리언은 그리 달갑지 않은 인물과 조우했다.
“마구간에 사는 거지새끼 아니야?”
히죽 웃는 얼굴이 아주 잘 걸렸다 싶은 모양새였다.
메이딜리언은 자기도 모르게 와락 미간을 찌푸렸다.
어릴 적부터 사사건건 저만 보면 달려들어 때리고 괴롭히고 모욕을 주던 인간이었다.
자라서도 제 아비와 함께 윈터의 발목만 잡는 얼간이가 되었었지.
진작에 칼로프에서 처형된 인간의 어린 시절을 이런 식으로 맞닥뜨리게 되다니.
짧게 혀를 찬 메이딜리언은 그대로 알버트를 지나쳤다.
물론 그걸 그냥 보고만 있을 알버트가 아니었다.
“이 시건방진 게 감히, 인사도 안 하고 그냥 가네?”
우악스러운 손길이 메이딜리언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역시나 나약한 몸은 힘없이 알버트의 악의에 휘둘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조금 전 만났던 마구간지기와 달리 알버트는 아직 어린애라는 점이었다.
성인 남자와 달리 완력이 다 자라지 않았을 테니, 이 비실비실한 몸으로도 어느 정도는 해 볼 만할 것 같았다.
“……치워.”
메이딜리언은 탁, 소리가 나게 알버트의 손을 쳐 냈다.
늘 제가 맘대로 가지고 놀 수 있었던 더러운 인형과도 같던 메이딜리언이 반항이라니.
당황스러움으로 알버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내 그 뱀과 같은 노란 눈에 잔혹한 생각이 스쳤다.
“너, 오늘은 그냥 안 넘어갈 줄 알아.”
그 뒤로는 난전이었다.
메이딜리언은 최대한 치명타를 피하기 위해 움직였으나 생각과 달리 몸이 제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오히려 알버트의 손에 붙잡혀 그대로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알버트는 메이딜리언을 깔고 앉아 작은 몸을 흠씬 두들겨 패며 악을 썼다.
“이 거지 같은 게, 어디 그 더러운 손을 대!”
몸을 웅크려 충격을 최소화하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소용이 없었다.
신체에 가해지는 고통이 이토록 선명한데, 이상하게 머리 한구석이 멍했다.
메이딜리언은 자꾸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당장 핥아서라도 닦아! 닦으란 말이야!”
분명 꿈일 텐데.
과거의 한순간을 악몽처럼 보여 줄 뿐일 텐데.
이 기시감은 대체 뭐란 말인가.
“야, 너 재밌는 거 한다?”
그때 후원을 가르는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파드득, 순식간에 메이딜리언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래, 이날은 선명히 기억나는 날이었다.
흠칫한 알버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새로 나타난 한 명에게 꽂혔다.
“위, 윈터?”
“나도 끼워 줘.”
검은 머리카락, 금빛 눈동자. 천사 같은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사악한 미소.
메이딜리언이 기억하는 윈터가 맞았다.
이때의 그는 그녀를 아직 ‘무서운 아가씨’ 정도로 기억하던 시절이었다.
오랜만에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윈터의 어린 시절을 마주하니 그동안의 고통이나 아픔은 싹 날아가는 것 같았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메이딜리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하, 하하, 끼, 끼워 주다니.”
어색한 웃음과 함께 알버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냥 네가 가지고 놀아. 난 다 놀았어.”
제가 여태까지 괴롭히던 것이 무슨 작은 인형이라도 되는 듯한 말투였다.
윈터는 바닥에 웅크리고 있는 상처투성이의 어린 메이딜리언을 훑어보았다.
온기라곤 조금도 없는 시선에도 메이딜리언은 짧게 전율했다.
“지금 나더러 다 망가지고 더러워진 걸 가지고 놀라는 말이야?”
“……무, 뭐?”
“나에 대한 존중이 부족하네, 알…….”
윈터가 잠시 멈칫했다.
아마도 제 사촌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서 그런 듯싶었다.
“부족하잖아, 그렇지, 알렌?”
“알버트거든!”
“뭐, 그건 됐고.”
대충 아무 이름이나 가져다 붙인 윈터가 씨익 웃었다.
알버트가 순식간에 허옇게 질릴 만큼 불길한 미소였다.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는 알버트를 윈터가 턱 잡았다.
“저 비실비실한 것 대신에 네가 내 상대를 해 줘야겠어.”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네가 맞으라는 소리.”
짧게 대답한 윈터가 알버트의 얼굴에 그대로 주먹을 갈겼다.
퍽, 소리와 함께 공격이 깔끔하게 맞아 들어갔다.
메이딜리언은 잠시 제 상황도 잊고 감탄하고 말았다.
생각해 보니 아직 마력 폭주가 일어나지 않은 시절의 윈터는 무척 튼튼하고 강한 어린애였다.
“으악! 저, 저리 가! 악!”
메이딜리언은 코피를 스윽 닦아 냈다.
조금 전의 그처럼 이제 후원을 뒹구는 것은 알버트가 되었다.
잔뜩 웅크린 채 악을 쓰는 모습은 누구에게도 별 감흥을 주지 못했다.
“흐음, 네가 아직 덜 맞았구나?”
윈터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알버트를 후려 팼다.
무척 지루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때 그 틈을 타서 알버트가 윈터를 퍽 밀쳤다.
“아악, 윈터! 이 미친개가 진짜!”
“야, 잠깐, 아직 덜 때렸……!”
“으아아악!”
기겁한 알버트가 그대로 몸을 돌려 도망쳤다.
윈터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쳇, 시시하기는.”
이내 그녀의 시선이 메이딜리언에게 향했다.
메이딜리언은 어색하게 뻗었던 손을 뒤로 숨겼다.
조금 전 알버트가 그녀를 밀쳤을 때 반사적으로 나갔던 손이었다.
“흐음.”
그런 그를 윈터는 퍽 흥미롭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너, 설마 나 도와주려고 그런 거야?”
픽 웃는 소리에 메이딜리언의 뺨이 후끈 달아올랐다.
제가 생각해도 이 하잘것없는 몸으로 윈터를 도와준다는 건 우스운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대답, 안 해?”
와락 얼굴을 구긴 윈터가 대답을 재촉했다.
과연 블라디미르의 작은 악마다운 모습이었다.
지금의 온화하고 잘 다듬어진 모습과는 사뭇 달라서 메이딜리언은 즐거웠다.
그런 속내를 애써 숨긴 채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웃긴 애네.”
조금 전까지 실컷 얻어맞은 주제에 저를 지킨다고 나선다니.
피식 웃은 윈터의 얼굴에 그런 생각이 가득했다.
성큼 메이딜리언에게 다가선 그녀가 말했다.
“때리실 건가요?”
메이딜리언이 멍한 머리로 물었다.
윈터의 손길이라면 기꺼이 맞아도 상관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윈터는 영 생소한 말을 들은 것처럼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렸다.
“푸핫, 뭐? 그럴 리가.”
성큼성큼 메이딜리언에게 다가간 윈터가 그의 덥수룩한 머리카락을 걷어 올렸다.
“어떻게 생긴 놈인가 얼굴 구경이나 할 건데.”
메이딜리언은 다음에 이어질 말을 알고 있었다.
제 얼굴을 보자마자 놀란 윈터는 충격받은 게 역력한 표정으로 그를 부른다.
‘……메이?’
이제 와 생각하면 자신을 어떻게 알았는지 의문이었지만, 그 뒤로 윈터가 그대로 기절하는 바람에 난리가 나서 제대로 물어보지도 못했었다.
메이딜리언이 작은 기대와 함께 윈터의 눈을 마주했다.
이 악몽 속에서도, 당신은 나를 알아볼 것인가.
“흐음.”
윈터는 뭔가를 고심하듯 메이딜리언의 얼굴 곳곳을 뜯어보았다.
마르고, 더럽고, 상처로 가득한 볼품없는 어린애의 몰골이었다.
“잘 씻기면 볼만하긴 할 것 같은데.”
뜻밖의 말에 메이딜리언의 동공이 커졌다.
그의 기억 속과는 사뭇 다른 말이었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윈터는 곧 관심 없다는 듯 손을 치우고 그대로 돌아섰다.
“……아니야.”
심장이 저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기분이었다.
이유도 없이 제게 다가왔던 과거의 호의와 달리 일말의 미련도 없이 멀어지는 윈터가 낯설었다.
메이딜리언은 뭔가를 의식적으로 생각하기도 전에 그런 그녀를 붙잡았다.
“뭐야?”
“……안 돼.”
“갑자기 뭔 소리야. 안 되긴 뭐가 안 돼. 너 이거 당장 안 놔?”
그를 돌아보는 시선은 짜증으로 가득했다.
필사적으로 저를 붙드는 메이딜리언을, 윈터는 아주 가볍게 털어 냈다.
제대로 중심을 잡지도 못하고 그대로 메이딜리언이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쯧, 작게 혀를 찬 윈터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젓더니 다시 발길을 돌렸다.
아주 잠깐이지만 윈터와 닿았던 손끝이 따끔거렸다.
왜지. 왜 다르지. 왜 현실이랑은 다른 거지. 이 꿈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무수한 생각들이 메이딜리언을 스치던 그때, 그의 시선에 스르르 허물어지는 작은 몸이 들어왔다.
“으윽…….”
윈터가 제 심장을 부여잡은 채 할딱할딱 옅은 숨을 내쉬었다.
놀란 메이딜리언이 당장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 달려갔다.
“윈터!”
극심한 격통으로 윈터는 그대로 혼절했다.
메이딜리언이 열심히 윈터를 흔들어 깨우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그녀의 주위로 마력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마력이 폭주하려는 징조였다.
“거기 아무도 없어요? 도와주세요! 아가씨가, 아가씨가……!”
당황한 메이딜리언이 소리쳤다.
마음 같아선 윈터를 둘러업고 의원에게 달려가고 싶었으나 나약한 몸은 그것조차 할 수 없었다.
“젠장, 젠장……!”
이 지독한 악몽 속에서도 메이딜리언은 무력했다.
윈터가 아플 때면 늘 그랬던 것처럼.
이를 악무는 그의 앞에 제일 먼저 나타난 것은 나일라였다.
좀처럼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 나일라는 후원에 쓰러진 창백한 윈터를 보고 당황했다.
“나일라!”
저를 부르는 메이딜리언의 목소리에 흠칫 놀란 나일라가 고개를 들었다.
“당장 아가씨를 데려가요. 아가씨가, 아가씨가 위험해요!”
나일라는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쓰러진 윈터를 가볍게 안아 든 그녀가 저택 본채로 가기 전 잠시 메이딜리언을 돌아보았다.
제게 쉴새 없이 외쳐 대는 작은 애가 마구간지기의 음침한 아들이라는 것을 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마력 폭주가 일어날지도 몰라요.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해요.”
“너…….”
“뭐 해요. 빨리요!”
말도 더듬지 않고, 이 모든 상황을 이해한 듯한 그의 모습은 아주 이질적이고 낯설었다.
메이딜리언을 향하는 나일라의 눈빛이 잠시 이채를 띄었다.
“알겠다.”
이내 그녀는 누군가 필사적으로 외친 것처럼 윈터를 안고 본채로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