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3. 6화
“아, 엘리슨. 좋은 아침…….”
반사적으로 인사를 건네려던 윈터가 멈칫했다.
엘리슨은 비실비실, 거의 반쯤 죽어 가고 있었다.
“……이 아니네요. 괜찮아요?”
“그럼요. 당연하죠.”
허허, 웃는 얼굴이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처럼 퍼석퍼석했다.
좀 쉬엄쉬엄하면 좋을 텐데 그녀도 알아주는 워크홀릭이라 결코 남에게 제 일을 넘기려 하지 않았다.
“이번 일만 마치면 휴가를 요청해 볼게요.”
“역시 각하뿐이시군요.”
윈터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는 메이딜리언이니, 아마 정말로 휴가가 나올 것이다.
그때를 기대하며 엘리슨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나저나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요?”
엘리슨의 시선이 우르르 도망친 귀족 영식들 쪽으로 향했다.
뭘 말하려는지 금방 알아챈 윈터가 작게 웃었다.
“그럼요. 당연히 괜찮죠.”
머리 좋은 메이딜리언이 제가 작성하던 살생부를 뺏겼다고 해서 그 내용을 잊어버릴 리 없었다.
그저 윈터가 절대 그걸로 못된 짓 하지 말라고 못 박았으니 그 지시에 따를 뿐이었다.
“그렇지?”
“네? 뭐가요?”
메이딜리언이 되물었다.
윈터가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어깨에 이불을 덮어 주며 메이딜리언은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아까 아침에 엘리슨 만났는데 말이야.”
“그런데요?”
“그때 나 찾아온 귀족 영식들 얘기를 했거든. 그 사람들한테 불이익이라곤 정말 하나도 없어야 해. 알겠지?”
“당연하죠.”
메이딜리언은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그는 즉시 제 머릿속에 있던 101가지 피의 복수 목록은 씻은 듯이 지워 냈다.
“근데 좀 너무한 거 아니에요?”
“응? 뭐가?”
“내일이 결혼식인데, 침대에서 다른 남자 얘기나 하고.”
서운하다는 듯 메이딜리언이 입술을 삐죽였다.
윈터는 키득키득 웃으며 대답했다.
“앞으로도 쭉 같은 침대 쓸 건데, 대화의 주제는 다양해야 하지 않겠어?”
“할 수 있는 얘기는 앞으로도 많을 거니까 이제 그 얘긴 그만해요.”
메이딜리언은 심술궂은 얼굴로 윈터의 이마에 제 이마를 콩 부딪쳤다.
* * *
윈터와 메이딜리언의 결혼식은 무척이나 성대했다.
무려 황제의 지시에 따라 예산이나 장소의 한계도 없이 준비되었으니, 규모 자체가 어마어마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헉, 설마 저분은…….”
“대현자께서 주례를 서 주신다니, 과연 엄청나군요.”
“블라디미르 공작께서 친분이 있다는 게 정말이었나 봅니다.”
제가 그토록 고대하던 결혼식 날이라는 생각에 메이딜리언은 무척이나 들떴다.
평소엔 거의 표정이라곤 없는 황제가 온종일 활짝 웃자 모두가 낯설어했다.
뿌려지는 꽃가루와 함께 윈터는 메이딜리언의 미소를 오래도록 눈에 담았다.
비록 일전에 치러진 대관식은 미처 보지 못했지만, 이 순간 그런 아쉬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녀가 오래도록 보고 싶었던 행복한 메이딜리언이 바로 눈앞에 있으니까.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로군요.”
“그러게요.”
제국 사회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온갖 사건 사고를 몰고 다니던 두 사람이었다.
그런 두 사람의 결합이라니.
호시탐탐 황후 자리와 공작의 남편 자리를 노리던 사람들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누가 감히 뭐라고 입을 열 수 없을 정도로 두 사람은 꼭 맞는 한 쌍이었다.
“몸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엘리슨도 휴가 잘 다녀와요.”
결혼식을 마치고 두 사람은 신혼여행 겸 휴가를 떠났다.
그들 생에 최초로 맞는 휴식이나 다름없었다.
약속대로 엘리슨 또한 맘 편히 쉴 수 있는 시간을 얻게 되었다.
그녀 한층 홀가분한 얼굴로 두 사람을 떠나보냈다.
호위라곤 필요 없는 제국 최강자 둘은 황제니, 공작이니 하는 지위나 신분을 모두 버리고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가고 싶은 대로 어디든 돌아다녔다.
“[결혼 축하해, 두 사람.]”
“고마워요, 폐하.”
여행 막바지 즈음, 윈터는 델과 연락이 닿았다.
얼마 전 황위에 오른 델은 어릴 적부터 줄곧 저를 옥죄어 왔던 마법 아티팩트를 벗어던졌다.
당시 칼로프의 황제는 마침내 실현된 예언에 경악하며 눈을 부릅뜨고 죽었다고 전해졌다.
한결 홀가분해진 얼굴로 델은 그동안 밀린 수다를 한참이나 떨었다.
“[그나저나 아이는 몇 명이나 낳을 계획이지?]”
“……네?”
“[아, 너무 성급했나? 미안. 혹시라도 좋은 인재가 있으면 우리 칼로프로…….]”
뚝. 마법 거울에 비추던 델의 모습이 사라졌다.
델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메이딜리언이 알아서 끊어 낸 것이었다.
“어, 언제 왔어?”
“조금 전에요.”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돌았다.
메이딜리언은 윈터가 오랜만에 델과 대화를 나누는 만큼 방해하지 않으려고 잠시 자리를 피했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좀처럼 대화가 끝나지 않았다.
결국 인내심이 고갈된 그가 방 안으로 들어왔고, 공교롭게도 델의 말을 들어 버린 것이었다.
메이딜리언은 자기도 모르게 마력을 방해해서 통신을 끊어 버렸다.
“미안해요, 갑자기 끼어들어서…….”
“어? 아, 아니야. 괜찮아.”
윈터는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또 서먹서먹한 침묵이 맴돌았다.
사실 후계나 아이는 그들 사이에 한 번도 입에 오르지 못했던 주제였다.
두 사람은 휴가를 한껏 즐기며 그날이 마지막인 것처럼 시간을 보냈다.
그러면서도 제대로 된 미래를 그려 보거나 그것에 대한 대화를 한 적은 없었다.
어쩐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메이.”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렸고, 어느새 내일이면 다시 황궁으로 돌아가야 했다.
윈터는 이 시간을 헛되이 쓰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좋은 기회일지도 몰랐다.
“네, 윈터.”
“너는 어떻게 생각해?”
“……뭐가요?”
“아이 말이야.”
메이딜리언의 입이 꾹 다물렸다.
그는 어릴 적부터 학대에 노출되었다.
사랑이라곤 몰랐고, 세상 어느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결코 무엇도 살아날 수 없을 것만 같은 메마른 대지에 한 송이 꽃을 피워 낸 것은 윈터만이 유일했다.
“저는…….”
메이딜리언이 마른 입술을 축이고 입을 열었다.
“자신이 없어요.”
그에게는 복수심도, 증오도 없었다.
황위를 차지한 것은 그저 윈터가 원했기 때문에, 그리고 필요에 의해서였다.
선황인 미쉘라가 자신의 어머니이고, 저를 지키다 죽었다는 것에도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저 하나의 사실이자 지식처럼 그의 안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메이딜리언도 알고 있었다.
이런 제 상태가 결코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제가, 제가 당신 말고도 다른 무언가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붉은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다 안다는 듯 윈터는 메이딜리언의 뺨을 감쌌다.
“그럼, 당연하지.”
“만약에 저를 싫어하면요?”
“어?”
“그 아이가…… 저를 싫어하면 어떻게 하죠?”
윈터는 메이딜리언을 끌어안았다.
메이딜리언은 제 커다란 몸을 애써 작게 웅크리며 그녀에게 파고들었다.
“괜찮을 거야.”
윈터가 메이딜리언의 등을 토닥였다.
그녀는 그가 가진 상처를 잘 알았다.
그는 그동안 너무 많은 배신과 폭력을 겪었다.
그로 인해 인간에 대한 혐오감이 짙다는 것도 알았다.
어찌 보면 두려워하는 게 당연했다.
“내가 너를 아끼고, 네가 나를 아끼는 것처럼.”
“…….”
“그렇게 우리 아이도 아낀다면, 분명 괜찮을 거야.”
메이딜리언이 고개를 들었다.
뭔가를 찾는 것처럼 그의 시선이 윈터의 얼굴 위를 배회했다.
“그 아이가 당신 눈을 닮았으면 좋겠어요.”
저를 환하게 들여다보는 금빛 눈동자 앞에서 메이딜리언은 언제나 평온을 느꼈으니까.
그녀를 닮은 아이라면, 이미 피어나 반짝이는 꽃송이 옆에 작은 싹 하나를 더 틔울 수 있지 않을까.
가볍게 몸을 일으킨 메이딜리언이 윈터의 이마에 살포시 입을 맞췄다.
“사랑해요, 윈터.”
윈터가 작게 숨을 들이켰다.
시선을 마주한 두 사람의 가슴에 충만한 애정이 차올랐다.
온전한 그들만의 세계가 이어졌다.
* * *
“싫어!”
“하기 싫어도 해야 해.”
햇살이 가득한 후원에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반짝이는 은발에 금빛 눈동자를 가진 아이가 입술을 삐죽였다.
“엘리슨! 엘리슨도 그렇게 생각해?”
“……어쩔 수 없습니다, 전하.”
윈터와 실랑이를 하던 아이가 엘리슨을 물고 늘어졌지만 소용없었다.
“전하가 뭐 이래! 하고 싶은 것도 맘대로 못 하고!”
으잉, 앙증맞은 입술이 일그러졌다.
아이는 그대로 테이블에 쿵 이마를 박는다.
엘리슨이 움찔 놀란 손을 뻗었다가 다시 거뒀다.
윈터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슬금슬금 아이가 다시 고개를 들고 윈터의 눈치를 봤다.
“안 하면 안 돼?”
“안 돼. 약속했잖아.”
움찔움찔 어쩔 수 없이 작은 입이 아, 하고 열린다.
윈터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 안으로 작게 조각낸 브로콜리를 넣었다.
“으으.”
와락 인상을 찌푸린 아이가 입 안으로 들어온 브로콜리를 씹었다.
어지간히도 싫은지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아빠한테 다 이를 거야.”
“그러렴. 어차피 네 아빠는 내 말을 더 잘 듣는단다.”
최후의 수단까지 먹히지 않자, 씩씩거리던 아이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엄마 미워!”
윈터는 그대로 이마를 짚었다.
그녀는 굳이 아이를 잡지 않았다.
어차피 보나 마나 또 메이딜리언한테 갈 테니까.
“저건 대체 누굴 닮아서 저렇게 고집이 센지 몰라.”
한탄하듯 윈터가 중얼거렸다.
엘리슨이 그녀의 말을 받았다.
“흐음, 그런가요?”
“메이가 너무 오냐오냐 키웠어요.”
“하긴. 입덧까지 대신 하셨을 정도니까요, 뭐.”
메이딜리언은 윈터의 임신 사실을 알고 그날부터 임신과 관련된 갖은 서적을 다 찾아봤다.
어의와 산파에게 별도의 교육까지 받았다.
임신한 그녀 대신 입덧까지 한 사실은 온 대륙으로 다 퍼져 나갔다.
“아빠!”
오늘은 때마침 부녀의 생각이 통한 모양이었다.
막 후원으로 들어서던 메이딜리언의 눈이 커졌다.
그는 곧 와락 달려드는 아이를 가볍게 들어 끌어안는다.
“블로썸!”
아이의 이름처럼, 두 부녀의 얼굴이 활짝 피어난다.
윈터는 그것을 보며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처럼 미소 지었다.
메이딜리언의 눈동자에 붉고 따뜻한 애정이 가득했다.
블로썸은 제가 한 말대로 열심히 메이딜리언의 귀에 윈터에게 서운했던 점을 속닥였다.
메이딜리언은 충실하게 블로썸의 말에 맞장구를 쳐 줬다.
이내 두 사람이 윈터에게로 걸어왔다.
“하여간 못 살아.”
윈터는 기다리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에게 달려갔다.
그녀의 입가에도 숨기지 못한 미소가 어렸다.
마침내 두 사람이 이룩해 낸 온전한 행복이었다.
<흑막 키우기가 이렇게 힘들 줄이야> 외전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