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여전한 것과 여전하지 않은 것 (9)
두 사람의 침묵을 깬 것은, 불쑥 끼어든 미라벨의 목소리였다.
“이번에도 잔뜩 뜯어내겠죠?”
스칸다르가 그리 부자라더니 합의금 주려고 그러나 봐요, 미라벨이 짐짓 장난스럽게 말했다. 순식간에 정신을 차린 데메트리안이 재빨리 대꾸했다.
“글쎄요, 아직은 놈들이 시인을 안 해서요. 아마 마정석 반입 미신고 정도로밖에 못 넣을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그들의 대화를 흘려듣던 클로에의 머릿속에, 대축일 때 신전에서 목격한 그 익숙한 얼굴의 신관이 떠올랐다. 정말 맥락도 없이. 그저 스칸다르의 궁정과 그 부군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던 것뿐인데……
‘여러모로 신전에 가서 확인해 봐야 하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클로에의 머릿속에, 며칠 전에 마법사를 만났을 때 떠올린 신전의 친구가 생각났다.
“맞다, 데미. 루카 요즘 대신전에 돌아와 있지?”
왜 또 갑자기 생각이 루카로 튀나. 데메트리안은 다시금 미세한 불쾌를 느끼며 느릿하게 대꾸했다.
“뭐, 그렇겠지? 연초에 성국 다녀온다 했는데. 이번 대축일에 돌아오지 않았을까?”
“그날 안 만났어?”
네가 모르면 어떻게 아느냐는 마음을 담아 클로에가 가늘게 뜬 눈으로 데메트리안을 바라보았다.
“경황이 없어서……”
늘어지는 데메트리안의 말꼬리가 당혹감에 젖어 들었다.
그러고 보면 대신전에 갈 때마다 그곳 생활을 지루해하는 오랜 친우를 잠깐이나마 만나고 왔었는데, 이번 대축일 때에는 그에 대해서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었다. 규칙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그는 대신전에 갈 때면 습관처럼 루카를 만나곤 하던 것인데.
‘로이 때문에 정신이 없었나. 그러고 보면 만나자고 연락을 해 두었을 테니 루카 녀석이 기다렸을 텐데……’
제 기억을 헤집는 데메트리안의 미간이 좁아졌다.
클로에에게 미라벨이 있듯이 데메트리안에게는 루카가 있었다. 보통 사제들은 대부분 주신의 품에 귀의하기 위해 신성아카데미에 들어간 이들이지만, 높은 신성력을 타고나 사제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이들도 있었다.
루카는 후자였고, 크레벨 공작가가 후원하는 고아원에서 지내던 그가 그 신성력이 밝혀진 뒤 공작의 피후견인이 되어 그 영식들과 더불어 자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만큼 익숙한 그의 존재를 잊다니. 스스로 당황하여 생각에 잠긴 그의 모습에, 클로에가 의아하다는 눈초리를 보냈다. 그제야 제 침묵이 길어졌음을 알아차린 데메트리안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루카 만나려고? 같이 볼까?”
“응? 아냐, 그냥 물어봤어.”
클로에로 말할 것 같으면 그와 함께 만나는 것만은 사양이었다. 어디서 본 듯한 사람이 있어서 자세히 물어보고 싶은 것뿐인데, 저의 이런 비논리적인 감정을 이 샌님이 얼마나 한심하게 볼지 안 봐도 로망스 한 편이었다.
‘꼭 몰래 만나야지. 물론 루카한테도 곧이곧대로 말할 건 아니지만, 데미는 눈치가 유독 빠르니까.’
그런 클로에의 낯을 살피는 데메트리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정말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요즘 들어 얼버무리는 것이 많아지는 게 수상했다. ……저도 아직은 털어놓지 못하는 게 많았지만.
그러는 사이에 내궁에 다다랐다. 검문하는 근위병들 앞에서 데메트리안은 아쉬움을 누르고 두 아가씨들을 먼저 들여보냈다.
“라크루아의 클로에일세. 이쪽은 내 시녀 누아제트의 미라벨이고. 캔달우드 공녀 전하를 뵈러 왔네.”
“예, 언질 받았습니다. 들어가시죠.”
데메트리안은 근위병의 안내를 받아 들어가는 클로에와 미라벨에게 눈인사를 해 보이고는, 그들이 계단을 올라 보이지 않게 된 뒤에야 근위병들에게 나지막하게 물었다.
“혹시라도 말인데…… 2황자 전하께서 오늘 비번이시지는 않지?”
“오전에 출근하셨습니다.”
“역시 그렇지? 알겠네.”
데메트리안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까닥여 보이고는, 다시 외궁을 향해 걸어갔다. 일해야지, 일.
“공녀 전하, 라크루아 궁정백 영애 들었습니다.”
“드시라 하게.”
클로에는 제 방문을 공녀에게 고한 황자궁의 시녀, 모햄 자작부인에게 목례하고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황자궁에서 정원을 바라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위치에 자리한 응접실에 들어서자, 언제나 그랬듯 따스한 햇살이 커다란 창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 창가의 티테이블 앞에, 구름처럼 풍성한 분홍색 머리칼을 가진 소녀가 앉아 이편에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공녀님, 그간 강녕하셨나요?”
“오랜만이네, 영애. 이리 와 앉게.”
클로에는 제 외투를 미라벨에게 맡기고는, 공녀가 이끄는 대로 응접실 창가에 앉았다. 그러는 양을 지켜보던 공녀가 모햄 자작부인에게 말했다.
“다과를 내와 주게.”
“네, 전하.”
시립해 있던 모햄 자작부인이 허리를 숙여 보이고는 응접실에서 나갔다. 문이 탁, 닫히는 소리가 나면서부터 탁자 밑에 포개져 있던 공녀의 손가락이 하나씩 꼽혀 들어갔다. 오, 사, 삼, 이, 일……
“갔다.”
문가를 지켜보던 공녀의 한쪽 입꼬리가 씨익 들렸다.
“언니, 안 그래도 보고 싶었는데 잘 왔어.”
“그러게, 왜 대축연 때 왜 그렇게 일찍 갔어?”
“있어 봤자 황자들 들러리나 서는데, 뭐. 대니얼 전하가 애인만 있었어도 아예 불참할 수 있었는데 말야. 사실 그것보단 축제 장터에 구경 가고 싶었는데 시녀장이 결사반대했지 뭐야. 언니랑 누아제트 영애랑 갔으면 좋았을걸.”
무게를 잡던 공녀님은 어디로 간 것인지, 자그마한 입에선 끊임없이 재잘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분홍색 고수머리 아래서 빛나는 맑은 파란색 눈동자가 사랑스러움을 한껏 자아내는 소녀, 메리앤 캔달우드. 황후의 외조카인 그녀는 클로에가 스칸다르로 가고 나서도 주기적으로 연락하고 지냈던 유일한 고티유의 벗이었다.
근 몇 대 동안 아르투젠엔 황녀가 없었고 이번 대에 역시 아들만 셋이 나오니, 황후가 제 조카의 후견인을 자처하며 황궁에 들인 것이 그녀였다. 클로에가 스칸다르로 가게 되면서 준황녀 취급을 받았던 것과 달리 메리앤은 어려서부터 준황녀로 자라났다.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해. 거기 계속 붙들려 있었다가는 늙다리들이 얼마나 와서 말을 걸었겠어? 제 아들놈이 말입니다, 허허허……. 아닌가? 차라리 노친네들이 나은가? 젊은 것들이 첫눈에 반하게 해 주겠다는 양 느끼하게 굴면서 춤이라도 청하면……”
메리앤이 진저리를 쳤다.
황제 부부가 딸처럼 여기는 영애라는 타이틀은 수도 귀족들이나 제후국들이 군침을 흘리기에 충분했다. 애초에 그러라고 궁에 들인 것이었고.
메리앤은 제 역할을 잘 알았다. 어머니는 캔달우드 공작의 차녀, 아버지는 트레야 공작의 차남. 황가와 몇 대를 걸러 한 번씩 섞이곤 하는 두 공작가의 순혈이었기에 태어난 순간부터 그 자체로 우등한 신붓감이었다. 거기에 황후를 후견인으로 두었으니.
“네가 그래서 춤춘 적이나 있고?”
“내 구두는 늘 불편하니까.”
“그래도 캔달우드 공작도 오셨었고, 트레야 쪽 사람들도……”
“뭐 어때, 10년 안에 다른 나라 사람 될 건데.”
“공녀님.”
문가에 시립해 있던 미라벨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말조심하시라는 게 아니라, 말조심은 맞는데 사람이 오니까 조심하라는 거였다.
그러고 다시 5초쯤 뒤에 응접실 문이 열리며 모햄 자작부인을 비롯한 시녀들이 티 트레이와 다구를 들고 들어왔다. 문이 열리고부터 메리앤의 낯은 다시 위엄 있는 공녀님의 것으로 돌아갔다.
맛도 맛이겠지만 보는 맛도 더한 황자궁 주방의 티푸드가 들어찬 삼단 트레이에, 금으로 장식된 호화로운 다구. 그런 것들을 바라보는 메리앤의 시선이 무기질적으로 가라앉았다.
일상적으로 누리는 것이어서 별 감동이 일지 않는 태도라기보다, 애써 더 관심 없는 척하려는 듯이.
“고맙네. 이제 나가 봐도 좋네.”
시녀들이 모두 나가고, 또 한 5초쯤 지나고서 메리앤의 낯이 바뀌었다.
“맛있겠다. 누아제트 영애도 이제 와.”
이미 다구도 3인분, 티푸드도 3인분. 호위인 듯 시녀인 듯 따라온 저 영애까지 다 함께 친구인 것을 모두가 알았다. 영애들의 능청을 모른 척해 준 것은 말도 제대로 못할 때 황궁으로 들어온 더부살이 공녀님을 위한 일종의 배려였다. 황궁에만 박혀 있고 연회에라도 나가면 뭘 바라는 인사들에게 시달리시니, 제 공간에서라도 편히 노시라. 황궁의 그 어떤 호화로움도 제 것일 수 없는 가련한 공녀님.
메리앤의 모친은 메리앤을 낳다가 난산으로 죽었다. 사랑 없이 결혼하고서 2년도 안 지난 사위에게 의리를 지키라고 할 수 없었던 메리앤의 외할아버지, 캔달우드 공작은 그렇게 딸의 딸을 제 딸로 입적시켰고.
이후 법적 언니이자 실제 이모인 황후를 따라 준황녀의 지위를 얻게 된 메리앤은 일견 화려한 배경을 가진 신붓감으로 손꼽혔지만, 제가 생각하기로는 제 사는 곳도, 제 국적도, 제 집안도 그 무엇도 자기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애초에 제후국과의 정략혼에 쓰이기 위해 황실에서 키워진 거였으니까.
그래서 메리앤은 고티유의 귀족 영애 중 저와 비슷한 처지의 클로에와만 친해졌고, 클로에가 스칸다르로 떠나고 나서도 꾸준히 편지를 주고받았었다.
「언니가 너무 멀리 가서 슬퍼. 제국 연방에 남아 있었으면 황실 행사 때라도 볼 텐데 하필 스칸다르가 독립을 해서. 내가 스체르바뇰에 가게 되면 곰베르 산맥 타고 만나면 될까?」
대륙의 북부를 가로지르는 곰베르 산맥의 끝과 끝에 위치한 두 나라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산지가 아니라도 파발로 열흘은 걸릴 거리였지만. 그리고 그 편지는 언제나 일종의 저주로 끝나곤 했다.
「크레벨 소공작은 올해 약혼 안 하려나 봐. 캄포 대공녀 성인 되는 걸 기다린 건 줄 알았더니 소식이 없네. 그렇게 지지부진하게 미룰 거면 파혼하고 언니나 잡을 것이지. 고자로 뒈졌으면.」
그녀의 편지에 늘 빠지지 않던 그 문구. 클로에는 불현듯 떠오른 그 추억에 혼자 웃었다.
‘대륙 최고의 신붓감으로 상한가를 치고 있는 공녀님의 펜 끝에서 그런 글자가 나온다는 것을 그 누가 알았겠어?’
메리앤은 아르투젠에서 크레벨 소공작에게 잘 보일 마음이 없는 유일한 영애였다. 아니, 미라벨까지 단둘이었을까.
그런 메리앤의 편지를 읽는 때가, 셰비크의 별궁 시절 클로에가 진심으로 웃을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