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화 〉Spotlight: Chosen Undead (5/71)



〈 5화 〉Spotlight: Chosen Undead

방랑의 후드, 방랑의 코트.
아스토라의 직검과 초문 방패.
여차 위험해지면 곧바로 도망칠 생각으로 입고 왔던 장비였다.

하지만, 그런 기본의 기본에 가까운 장비를 입고서도 던전에학살의 바람을 불러오기에는 충분하고 넘쳤다.
수많은 영웅들에게서 어깨너머로 배운 기교를 사용할 것도, 이미 인간을 한참 전에 초월한 근력을 사용할 것도, 패링도, 마법도, 주술도, 기적도 필요 없었다. 그저 휘두르면 죽어나갈 뿐이었다.

화톳불 하나 없이 끝없이 아래로 이어지는 던전을 계속해서 걸었다. 몬스터가 나타나면 단칼에 베어죽였다. 죽여봐야  자리수의 소울을 줄 뿐인 몬스터들이었다.


망자의 마을에서 볼  있었던  뿜는 개와 닮은 몬스터는 에스트가 알던 것보다  배나 약한 화력의 불을 뿜을 뿐이었고, 산양머리 데몬의 머리에 소머리를 붙인 듯한 빈약한 괴물들과 하얀 털의 고릴라들은 대방패도 아닌 고작 초문 방패를 두들겨 놓고서 홀로 경직이 걸릴 정도였다.

고룡인지 비룡인지 도무지 구분이 가지 않는 굼뜬 용의 목을 베어내고, 에스트는 손에 힘을 풀고 검을 늘어트렸다.

싸우고 싶지 않아.

북방의 수용소에서 최초의 화로까지, 사명에 뒤쫓기듯 싸워왔던 그녀였다.
하지만, 사명은 이미 완수했고, 이곳 오라리오에선  이상 싸울 필요도 없었다.


질려버렸다.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이 당연한 삶이었다.

그렇기에 인간으로써 잊고 있었던 한 마디를, 마침내 뱉어낼  있었다.


"죽이고 싶지 않아......"

그리고, 죽고 싶지 않아-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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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로의 여신 헤스티아는 던전 입구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에스트를 던전으로 보내고, 길드에서 파밀리아 등록을 완료한 헤스티아가 헤파이스토스의 파밀리아 홈으로 돌아갔을 때, 헤파이스토스는 냉담하게도 헤스티아를 그 자리에서 곧바로 쫓아내어버렸던 것이었다.

자신의 파밀리아 홈에, 다른 파밀리아의 신이 기거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라면서.

헤스티아 역시 이해는 하고,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일이었지만, 말이라도 먼저 해주고서 쫓아내면 어디 덧나냐, 이것이었다.
...대신에 폐성당 지하의 집을 무상으로 받을  있긴 있었지만.


"으으, 언제 나올지 모르니 기다리는것도 힘들구나..."

즉, 이 마음 착한 여신은 던전으로 내려간 에스트가 던전에서 나왔을 때, 아무 것도 모른 채로 헤파이스토스의 홈으로 돌아가는 일이 없도록, 마중을 나온 것이었다.
다른 신들이라면 '헤파이스토스 파밀리아의 아이들에게 나의 행적을 물어서 직접 찾아와야지, 내가 어떻게 기다리고 있을  있어!'라고 생각했겠지만 말이다.


"헤스티아?"

"응? 생각보다 일찍 나왔구나."

에스트였다.
헤스티아가 그녀를 기다린지  30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나와버린 것이다.

"싸우고 싶지 않아."


에스트의 입에서 흘러나온 한 마디를 듣고, 헤스티아는 의외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항상 인간성 없는 인형 같았던 모습만 보여주었던 자신의 첫 파밀리아 원의 인간다운 모습에, 안심하기도 했다.

"싸우기 싫다면 싸우지 않아도 좋다. 나 역시 네가 다치는 것을 바라지는 않으니라."

"고마워."

"뭘. 너의 신으로써, 당연한 걱정이니라!"


헤스티아가 가슴을 쭉 폈다.  파밀리아에게 감사의 말을 들은 것에 기분이 좋아진 덕분이었겠지만, 그 탓에 체형에 어울리지 않는 큰 가슴이 쓸데없이 눈에 밟혔다.


"배는 고프지 않느냐?"

"고프지 않아."

그리고 앞으로도 고플 일은 없을 것이다.
에스트는 아직도 자신의 왼쪽 손등에 남아있는, 방랑자의 맨체트로 가린 다크 링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화톳불 그 자체인 여신, 헤스티아의 존재가 다크 링의 힘을 최대한 억제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트는 여전히 불사자였다.

배 고플 일 없으며, 졸음이 올  없으며, 죽음을 겪을 수 없는, 저주 받은 불사자.

"에에, 그러지 말거라.  때를 놓치면 나중에 배가 고플 것이니라."

"......"

헤스티아는 에스트의 마음을 조금도 신경도 쓰지 않고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아니, 그녀의 마음을 알기에 그러는 것일지도 모를 행동이었다. 울적하면 먹는 것으로 푸는 것도 좋은 방법이니까.

에스트는 거절하려다가, 이내 포기하고 헤스티아가 이끄는 대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배가 영원히 고프지 않더라도 소화기관은 존재하니만큼, 헤스티아의 호의를 굳이 거절하면서까지 먹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감자돌이를 마음껏 먹고 난 다음은 우리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집?"

"그래, 집이다! 파밀리아 홈이지. 이미 청소는 다 해두었느니라!"

집. 돌아가야  곳. 모든 불사자들이 잃게 된 마음의 고향.
불사를 앓게 된 모든인간의 고향은 화톳불이 되기에-


"헤스티아..."

"응, 왜 그러느냐, 에스트?"

"다녀왔어."


에스트는, 떨리는 입을 열어, 수 십 년간 단 한 번도 입에서  수 없었던 말을 그녀의 주신에게 했다.
그것은,로드란 어디에서도, 심지어는 무덤에서조차도  뉘일 곳 없었던, 메말라버린 불사자의 울음 섞인 외침이나 다름없었다.

헤스티아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는 에스트를 보며, 조금 당황했지만, 이내 자애로운 여신의 표정을 띄우며 그녀에게 대답해주었다.


"어서 오거라, 에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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