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Spotlight: Est
"오늘은 좀 색다른 걸 만들고 계시는 것 같네요, 에스트 씨."
나무를 깎고 있는 에스트를 보며 벨이 말했다. 세세한 건 항상 변해도 기본적으로 헤스티아의 조각을 유지하던 에스트가 오늘은 어째서인지 완벽하게 다른 조형을 깎고 있던 것이었다. 둘러다보면 에스트의 주변에 이름모를 여신의 초상이 여기저기 널려있기도 했었다.
아마, 파룸의 신, 이라는 분의 것이었던가? 벨이 갸웃했다.
"부탁을 받아서."
"피아나 님이었던가요?"
"맞아."
여기저기 널린 가상의 신 피아나의 태피스트리를 보며 벨은 또 한 번 고개를 갸웃했다. 피아나 신의 태피스트리와 에스트가 깍고 있던 조각상의 모습과도 판이하게 달랐기 때문이었다.
단발의 머리카락에, 평평한 가슴. 실눈을 뜬 얼굴은 상당히 낙천적이었지만, 그 속에서는 숨겨진 교활함을 척 볼 수가 있었다. 편견일지도 모르지만, 아무리 좋게 보아도 파룸이라는 한 종족의 주신이 하고 있을 모습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 모습은... 뒷공작을 꾸미는 신? 그런 신님이 있었던가?
"오늘은 조금 들뜬 것 같은데, 리틀 루키."
벨이 쑥스러운 듯이 몸을 배배 꼬았다.
리틀 루키-라는 이름이 그렇게까지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Lv 2가 되면서 조금이나마 더 성장했다는 것을 에스트가 인정해준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 그게... 처음으로 파티를 맺었거든요."
"파티?"
"벨프 크로조 씨라고, 제 갑옷을 만들어주신 실력 좋은 대장장이 분이세요."
에스트는 나무를 깎던 조각칼을 잠시 내려놓고, 벨을 올려다 보았다. 어느새 갑옷이바뀌어 있었다. 아마 예전에 쓰던건 산양머리 데몬에게 박살났다던가 그랬겠지.
소울을 쓰지 못하는 이곳 오라리오에선 파손된 무기나 방어구를 완벽하게 새 것처럼 수리한다던가 하는 일은 할 수 없으니, 한 번 파괴되면 결국 새 것을 구해야 하는 것이었다.
문득 에스트는 자신이 입고 다니던 아스토라 풍의 기사 갑옷을 멋대로 폐기시켜버린 붉은 머리카락의 대장장이 신이 떠올라서 살짝 화가 났지만, 참을 인 자를 그리며 분노를 식혔다.
"아마 그 대장장이, 무기를 만드는 대장장이 일거야."
"네?"
"그냥 감."
벨의 방어구는 방어구라고 하기에는 너무 날카로웠다. 세련되어서 멋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 멋이라는 것은 충분한 방어력을 확보할 수 있는 희귀한 금속으로 만들어진 비싼 갑옷들에게나 통용되는 일이지, 평범한 철을 단련해서 만든 방어구에게는 통하지 않는 말이다. 날카로운 쪽보다는 둥근 편이 공격을 받아내기도 편하다.
즉, 저 갑옷을 만든 대장장이는 실전에 있어서 엄청 문외한인 대장장이거나, 아니면 무기를 만드는 것이 본직인 대장장이일 것이다.
하지만, 가슴만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구 주제에 목을 방어하기 위한 부분을 만들어 착용자를 배려하고 있는 것과, 날카로운 부분의 단조가 뭉개지지 않고 날선 느낌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역시 무기를 만드는 것이 본직인 대장장이구나-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건 뭔가요?"
조각상들 사이로 만들다 만 듯한 조각상이 하나 보였다. 촉수에 촉수에 촉수에 날개를 닮은 촉수를 가진 초현실적인 생명체의 조각상을 보며, 벨은 도대체 무엇을 만든 것일까 아주 잠시간 고민하다가, 고민해봐야 답이 안나온다는 것을 깨닫고 물었다.
"우주의 딸?"
"그건 도대체 뭔가요?"
"아름다운 아가씨?"
에스트가 자기도 모르겠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혹시나 영감이 떠오를까 싶어서 체스터의 가면을 쓰고 만들었더니 저런 것이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금방 다른 방면으로 영감이 떠올라서 완성만 시키고 버려두었지만.
"릴리가 기다리겠어. 어서 가 봐."
"아, 네. 다녀오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부리나케 달려나가는 벨의 뒷모습을 보며, 에스트는 언제까지고 벨이 저렇게 달릴 수 있기를 바랬다. 마음이 꺾여 멈추는 일이 없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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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장난하나."
"뭐가 이상해?"
로키는 자기 신상을 보며 에스트에게 쏘아붙이듯이 물었다. 자신이 주문한 것은 파룸의 여신 피아나의 신상이었지, 불의 신 로키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니 내가 주문한것이 무엇인지는 기억하고 있제?"
"파룸의 여신 피아나."
혹시나 싶어서 물어보았지만, 역시 주문이 바뀌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신상을 깎아놓고서 당당하게 파룸의 신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어째선지 더욱 열에 뻗쳤다.
"아니, 마. 내 신상을 깎아준 것은 고맙다 안카나. 카는데, 내 주문은 개무시가 뭐가?"
"완성이라고 한 적 없어."
"아? 그기 뭔 헛소리고. 이건 암만 봐도 완성품 아니-"
에스트가 품속에서 커다란 몽둥이를꺼내들었다. 에스트가 아노르 론도의 숨겨진 지하실에서 하벨 기사의 갑옷과 함께 얻을 수 있었던 불길한 힘이 가득 담긴 몽둥이였다.
로키가 멍한 표정으로 몽둥이는 갑자기 왜 꺼내는 걸까, 저런 몽둥이를 어떻게 품속에 숨기고 있었을까, 하는 얼빠진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에스트는 몽둥이를 높게 들었다. 금방이라도 로키의 신상을 때려부술 기세였다.
로키가 정신을 차렸다.
"야, 야야야야야! 잠만, 잠만만 멈춰 바라!"
"응?"
"니, 니가 지금 내 신상을 때리 뿌사삘라카는 이유를 세 가지만 대바라."
"네 신상 아니라니까."
에스트가 쿨하게 이유를세 가지나 알려달라는 로키의 부탁을 무시하며 다시 몽둥이를 쥔 손에 힘을 넣으려 했다. 로키는 깜짝 놀라 에스트의 팔을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 몽둥이를 붙잡고 멈추게 했다가,
"히, 히익?! 머, 머꼬, 이게!"
자기도 모르게 펄쩍 뛰며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몽둥이가 담고 있는 것은 사교의 힘. 힘 없는 인간이 오직 신만을 죽이기 위해서 만들어낸 불길하기 그지없는 불씨에서 태어난 힘이었다. 그 악의적인 의도가 가득 담긴 무기를 만진 순간, 로키는 잘 모르지만서도 그 무기의 존재이유와, 에스트가 지금 저지르려고 하는 일에 대해서 이해해버리고 만 것이었다.
"니, 니 지금 신적 강하식 할라카는 기가!!"
"피아나는 존재하지 않는 신이잖아? '이젠 존재하지 않는다'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무슨 차이가 있어?"
"야, 얌마! 그러면 하필 왜 내 신상인데! 흉내뿐이라케도 두고 내는 못본데이!"
"괜찮아. 머리는 단 한 조각도 남기지 않고 박살낼테니까. 그럼신상이 원래 너였는지 아니면 피아나인지 알 게 뭐야."
로키는 경악했다. 틀린 말이 아니라서 부정도 할 수가 없었다. 로키는 트릭스터의 본성에, 존재하지 않는 신상의 신상-그것이 어떤 모습이건 간에-을 만들어서 그녀의 파밀리아 단장에게 건네고, 그 다음 일어날 예측 불허한 IF의 일에 대해서 잔뜩 기뻐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자신의 신상이 박살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기 문제가 아니다! 니가지금 할라꼬 하는 일은 나를 신적 강하 시키는 일이 아니가!"
"아냐. 조각상을 완성시키는 일이지."
"마, 마..."
로키는 울상이 되었다. 겨우 에스트 하나가 저런다고 해 봐야 로키가 당장 신적이 강하되어 하계로 영원히 떨어지게 될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기분이 더러운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니는 왜 하필 내 신상가지고 그카는데! 맨날 헤스티아 그 자식것만 만들다가 오늘만 이카는 이유가 먼데!"
"이 살벌한 무기로 헤스티아의 조각상을 부순다고? 안 돼. 절대로 안 돼."
"살벌한 거 잘 알고 있네! 카믄 내 거는 왜 되는데!"
"...그냥?"
에스트는 생각하기 귀찮다는 듯이 대답하더니 곧바로 사교의 클럽을 휘둘렀다. 만담 비슷한 문답이 이어지고 있던 탓에 완전히 방심하고 있던 로키는 자신의 신상이 박살나 흩어지는 모습을 보며 가슴이 찢어지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문디시키... 이 빌어먹을 눔의 시키..."
"자, 네가 원하던 피아나 신상이야."
"씨벌눔의 시키... 그 와중에 대가리는 완벽하게 깨 놓았구만..."
상반신이 날아간 로키의 신상은 피아나의 신상이 되었다. 덤으로, 에스트가 맹세한 대로 머리는 조각 한 점도 남기지 않고 박살나 있었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너무 깔끔한 탓에 로키가 욕을 내뱉을 정도였다.
"아, 이번 조각상은 무료야."
"니 지금 내 놀리고 있는거 맞제?"
로키가 박살난 피아나의 신상을 안고서 펑펑 울며 물었다. 에스트는 킥킥 웃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