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7화 〉Interval (57/71)



〈 57화 〉Interval

우라노스는 넓은 홀이 있는 왕좌에서 이슈타르가 천계로 돌아갔음을 깨달았다.
그것도 같은 신의 공격에 의한것이 아니라, 불사자의 공격에 의해서.

우라노스는 지금껏 주시해왔던 불사자가 선을 넘은 것이 아닌가 하고 자그마한 우려심을 품었다. 그는 유희를 위해서 하계에 내려온 신이 아니었기에. 던전을 틀어막은 오라리오를, 오래된 심연을 틀어막은 던전을 감시하러 내려온 감시자였기에, 더욱 그 심려는 깊어졌다.

우라노스가 고민하던 사이, 펠즈가 스르르 나타났다.

"어떻게 되었나."

"프레이야도 로키도 해산했어. 불길은 잡혔고."

"그런가."

아주 오래 전, 불사를 연구하고, 불사를 얻었지만, 자신의 주신에게 잃게된 현자. 겨우내 얻어낸 불사를 되찾기 위해서 다시   연구를 거듭해, 끝내 자신의 등에 검은 저주의 고리를 새길  있었던 우둔한 자.
또 하나의 불사자의 모습을 보며, 우라노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헤스티아 파밀리아 쪽은 어떻게 할 셈이지?"

"방관이다."


우라노스는 펠즈의 모습을 보더니, 마음을 정한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리 대답했다. 방금 전까지 그의 마음 속을 어지럽히던 우려따위 온데간데 없었다.

"신을 죽였다고? 괜찮겠어?"

"이미 죽어 천계로 송환된 이슈타르와 아직도  아래에서 들끓고 있는 오래된 혼돈. 어느 쪽이 더 중한가... 더 말할 것도 없다."

"흠."

"지금 시대는, 어느 때보다도 많은 영웅이 필요하다. 설령, 그 영웅이 악마라고 할 지언정, 쉽사리 버릴  없다."

외눈의 흑룡과 갈등의 페유디아에게 헤라와 제우스를 잃은 이후, 얼어붙어있던 시대가 너무나도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천 년간 활동을 정지하고 있었던 오래된 심연이 다시 끓기 시작했고, 마검을 잃고 몰락했던 라키아 왕국은 최근 들어 페유디아가 살아돌아온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로 그 기세를 유래없는 정도로 키워나가고 있었으며, 던전은 더 이상 기도만으로는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너무나도 시대의 흐름이 빨랐다. 제우스와 헤라와는 달리, 혼돈이 던전에게 덮인 뒤에, 던전이 바벨으로 덮인 뒤에나 뒤늦게 찾아온 어리숙한 신들이 무엇을 알겠냐마는, 그래도 고작 아지랑이에 겁을 먹고 전 병력을 내보낸 로키와 프레이야에게 적지않게 실망하고 말았다. 믿음직스럽지 못했다.


"그것이 설령 네 마법을 빼앗는 일이 되더라도."

"농담이지?"

우라노스가 펠즈의 등에 새겨진 불사의 낙인을 보며 말하자, 펠즈는 그건 절대 무리라는 듯이 웃었다. 아무래도  신은 이 낙인에 대해서 정말로 단편적인 것만 보고 있는 것 같다며. 실상을 알게 된다면, 오래된 혼돈도, 라키아도, 외눈의 흑룡도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는 것을 알 텐데.
저들이 오라리오의 파멸을, 세계의 파멸을 가져올 수도 있는 존재들이라고 한다면,  불사의 낙인은 두 말 할 나위 없이 확실하게 파멸시키는 증표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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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트의 기분은 며칠 전부터  좋지 못했다. 정확히는 검게 꿈틀거리는 자를 벤 날 이후부터였다.
하루히메가 구해지고, 정식으로 헤스티아 파밀리아에 입단했다. 홈에서는메이드, 던전에서는 서포터의 역을 맡으며, 하루하루 활기찬 모습으로 파밀리아의분위기를 북돋우고 있었는데, 유독 에스트만은 계속 공기가 내려앉은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검게 꿈틀 거리는 자가 자연 발생-불가능하겠지만-한 것이 아니라, 누가 만들어낸 돌을 매개체로 탄생한 심연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심연의 존재가 바깥에서, 혹은 내부에서 오라리오를 바라보고 있다고 한다면, 쉬이 넘어갈 수 없었다.

에스트가 며칠 째 오라리오를 돌아보긴 했지만, 내부에선 심연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애초에 그런 걸 만들어 낼 수 있을 만큼 아이템 제작에 뛰어난 재능이 있다면, 자신의 기운을 숨기는 아이템을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이며, 애초에 에스트는 심연에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푸우욱 담겨버렸던 적이 있었기에, 바로 코앞에서 마주치지 못하면 제대로 감지조차 못 할 게 분명했다.


"...어떡하죠."

"눈이 무서워. 지금 말 걸었다가는  일 날거야."

헤스티아에게서 선물받은 하얀 원피스를 입고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에스트는 반쯤 넋이 나간 모습을 하고 있었다. 책을 읽는 것인지, 그냥 눈을 뜨고 있는 것인지 구별이 안갈 정도로 안좋은 상태였다.

며칠째 저러고 있다는 것이 더 문제였다. 아침이 되면 나가고 저녁이 되면 들어오고, 밥은 먹는 것인지, 잠은 제대로 자고 있는 것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분위기가 무서워서 말도 못 걸고 있는데, 헤스티아의 경우 그나마 저녁이 되면 파밀리아 홈에 착실히 들어오고 있는 것이 오히려 감사하게 느껴질 지경이었으니 말 다했다.

그 분위기를 못마땅해하는 파룸이 하나 있었다.
물론 에스트가 뿜어내는 부정적인 기운이 아니라, 에스트에게 말도 못 거는 소심한들에게 대한 못마땅함이었다.


"...에스트 씨!"

"야, 야, 릴리스케!"

"릴리?!"

릴리가 다가가 시선만으로책을 꿰뚫어버릴 기세의 에스트에게 말을 걸었다. 여기저기서 허투른 짓 하지 말라는 듯이 그녀를 제지하는 소리가 나왔지만, 릴리는멈추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어쩐지 릴리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목소리가 높아져 있는 것은 역시 자신도 조금 겁이 난다는 반증이었을 것이다.

"왜?"

에스트는 릴리의 큰 목소리에, 곧바로 고개를 돌려 물었다. 반응은 있었지만, 시꺼먼 분위기가 여전히 비오듯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눈동자에서는 빛이 보이질 않았고, 꺼림칙했다.

"릴리에게도 검을 가르쳐 주세요!!"

"...?"


릴리가 외쳤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경악했다. 에스트에게 말을 건 것은 둘째 치더라도, 이 상황은 어떻게 보면 릴리가 '하루히메도 있고, 릴리는 이제 서포터 안 할래요!' 하고 외치는 것과도 같은 소리였기에.


"창도 좋고, 방패도 좋고, 활도, 마법도 다아아 좋아요! 그러니 릴리를 가르쳐주세요, 에스트 씨!!"

"..."

다아아-를 말하며 팔을 크게 벌리는 릴리를 보며, 에스트는 책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릴리의 돌발행동에 입을 쩍 벌리고 경악하는 가족들의 모습도 둘러보았다.
그러더니,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아하... 아하하하... 아하하하하하... 뭐야... 쿡, 아하하하하하하."

"에스트 씨?"

"아냐, 미안해, 릴리."


심연을 막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을 잊지 않는 것도 중요했다. 그런 간단한 사실을 왜 잊고 있었을까. 에스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밀리아 단원들의 면면을 보다가, 한때 사용하다, 용사냥꾼의 활과 고의 활을 얻게 된 이후  쓰지않게 된 롱보우를 꺼내어 릴리에게 건네었다.

"벨은 알고 있겠지만, 나에게 가르치는 자질은 없어."

"네, 넷! ...네?"

"그렇지만, 최대한 도움을 줄 수 있도록 노력은 해볼게."

"네!"


자기 신장보다 아주 조금  작은 활을 받아든 릴리가 기세좋게 외쳤다. 그런 릴리의 얼굴을 보는 에스트 역시 상당히 풀어진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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