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권왕유가(2)
“몰라뵈었습니다. 공주님.”
“끝까지 할 거 아니면 그만해.”
집안의 대소사를 관리하는 한길수는 무진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평소 아가씨와는 지나치게 대조적이기 때문이다.
진작부터 가문의 차기 주인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실력과 카리스마 모두 완벽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가문 내에서도 아가씨와 손속을 나눌 무인은 많지 않았다.
‘흥미로운 녀석이군.’
그런 아가씨를 갈대처럼 흔들어 대는 걸 보니, 관심을 끄는 재주는 타고났다. 말투가 다소 무례하긴 해도, 따로 조용히 충고하면 될 일이었다.
지금은 선약이 먼저였다.
“아가씨, 전대 가주님께서 개인 훈련장으로 오시랍니다.”
“왜요?”
“제가 대답해 드릴 사안은 아닙니다.”
“곤란한데.”
할아버지의 직접적인 개입에 지수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자칫 일이 꼬일 수도 있었다. 다만, 할아버지도 교양이 있으니 첫 대면부터 주먹을 날리진 않으리란 다소 안일한 판단을 내렸다.
‘전력을 다하시진 않을 테고.’
저절로 곡선을 그리는 입꼬리를 지웠다. 지수는 아무렇지 않게 무진을 재촉했다.
“가자.”
“나는 가주님을 뵙고 자초지종을 설명해 볼게.”
“장유유서라고 했어.”
“……?”
허를 찔린 무진에게서 급격한 표정 변화가 일어났다. 뜻을 알고 말했을 리 없다는 단호함에 금이 간 것이다.
“그 표정 뭐야?”
“알잖아.”
할아버지, 파이팅!
교양은 버리세요!
전대 가주의 거처는 권왕유가 내에서도 심처에 속했다. 어찌나 꼭꼭 잘 숨겨 놓았는지, 통로가 미로처럼 어지럽고, 담벼락으로 겹겹이 포장되었다. 침입자가 길을 잃고 헤매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집사장은 중간쯤에서 일이 있어 헤어지고, 지수의 안내를 받아 권왕의 개인 연무장을 찾았다.
‘엄청나구나.’
칠대가문의 영향력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 이상으로 건물의 규모와 구조까지 평범하지 않았다. 기존의 견적을 뒤엎고 새롭게 견적을 내야 했다.
‘평당 5억은 되겠어.’
차후, 부동산과 주식은 건실한 미래를 위해 반드시 배워야 하는 투자 기법이었다. 어떤 이들은 이를 불로소득이라고 규정하는데. 남의 돈 먹기가 쉬웠다면 누구나 부자가 되었겠지.
꾸준한 공부와 경험이 누적되어야 자기만의 노하우를 완성할 수 있으며, 과정이 그리 녹록지 않았다. 용기 없는 무지한 사람에게는 백번 떠들어 봤자 무용지물이기 때문이다.
띠릭, 드르르!
사람을 인식하는 자동 센서가 달려 있었다. 지수가 화면에 얼굴을 비추자 문이 열렸다.
‘연출이 참.’
불을 꺼 놓고 있었다. 연무장 안은 빛 한 점 들어오지 않아서 어두웠다. 문이 닫히자 칠흑 같은 어둠이 무진과 지수를 삼켰다.
“네 이놈!”
어설프게 변조된 사극 톤이 터져 나왔다.
기차화통을 삼키셨나.
의도치 않게 대역죄인을 맡은 무진은 간격을 조절하더니 돌아서며 지수를 앞으로 밀어냈다.
헉!
다급한 음성이 들린 후 궤적이 바뀌는 걸 알아챈 무진은 지수를 연이어 움직였다.
이익!
부지불식간 무진의 방패막이로 전락한 지수는 비켜서려고 노력했지만, 뜻대로 되진 않았다.
지르고, 피하고.
끝나지 않을 무한대의 대치에 지수는 한숨이 나왔다. 자신이 무진을 간과했음을 인정해야 했다.
“할아버지!”
“이런!”
안타까운 탄성이 터지며 연무장에 불이 들어왔다. 어둠을 방패 삼아, 안타까운 사고사로 위장하려고 했거늘. 시도를 해 보기 전에 역으로 당했다. 마치 당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으니, 그딴 개수작은 하지도 말라는 명백한 도발이었다.
“합격.”
“영상을 인터넷에 올리겠습니다. 권왕 어르신.”
“……?”
“농담입니다.”
적당히 후학을 시험하는 선으로 후려치려고 했던 유장산은 헛바람을 삼킨 채 농락당하고 말았다.
예상치 못한 연이은 사태에 어두웠단 사실을 잊어버렸다. 하지만 그마저도 농으로 치부해 버렸으니, 되로 주고 말로 받은 격이다.
“맹랑한 녀석이로다.”
“갑자기 주먹이 날아오면 본능적으로 피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물며 권왕 어르신의 주먹질입니다. 그걸 맞고 버틸 수 있는 중학생이 있을까요?”
“우리 지수는 가능해!”
손녀 바보란 걸 무진은 연무장에 들어오자마자 알아챘다. 인사도 하기 전에 주먹부터 날아왔으니 확인 사살이나 다름없었다. 설마 하면서 유도했더니 손쉽게 걸려들었다.
“그래서 내세웠습니다.”
“빌어먹을!! 생긴 것과 달리 주둥이가 활발…… 응?”
화를 내려던 유장산은 무진을 바라보더니,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왜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벗어 봐라.”
“……?”
이번에는 무진도 당황했다.
방패막이가 되었던 지수도 덩달아 얼굴을 붉혔다. 차마 못 볼꼴을 봤다는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혐오가 바탕에 깔렸다.
유장산은 고개를 저었다.
“육체극의, 일형! 프런트더블바이셉!”
“……할아버지!”
양팔로 알통을 만들고 머리 쪽으로 근육을 세우자, 무복이 견디지 못하고 터지며 팽팽한 타이즈를 드러냈다.
보아라, 이 위대한 근육의 예술을!
“어떠냐?”
“조금 부족한데요.”
질 수 없지.
무진도 상의를 조심스럽게 탈의하며 육체극의, 삼형 사이드체스트를 완성했다. 드러내지 않을 때는 소심하나, 드러낼 때는 과감하게.
야, 이 미친놈아!
왜 할아버지한테 호응하고 지랄이야!
“호오, 놀랍도다!”
“무공으로 완성된 근육은 아니군요.”
“무공만으로 어떻게 이런 근육을 만들어. 과학적인 영양 섭취와 보충제에 이은 하드 트레이닝 덕이지.”
“제자들이 아쉬워하겠는데요.”
저 몸이 권왕가의 무공으로 완성되었다면 너도나도 살도 뺄 겸 전국에 체인점을 냈을 텐데.
보여 주기식의 속은 썩은 근육과는 달리 무공에 최적화된 형태로 진화했다. 달리 보면 무공과 빌더의 조화를 통한 만상의 극의, 극한의 육체였다.
탁탁!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 무진과 유장산은 서로를 인정했다. 또한, 화해의 제스처로 두 팔로 서로를 안았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가슴, 등, 허리의 근육을 탐색했다. 육체를 단련하는 자라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순도 높은 인사법이었다.
‘허, 이놈 보게!’
‘근래에 만난 분 중 최곤데.’
무진과 유장산은 근육만을 보지 않는다. 하수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근육의 밀도, 데피, 골격, 균형을 모두 확인했다. 부족한 부분을 찾기 힘들 만큼 둘은 육체의 완성도가 높았다.
이대로 피트니스 강사만 해도 돈벌이가…… 될지는 모르겠다. 몸만 좋다고 되는 건 아니라고 들었다.
“하체가 건실하구나.”
“등의 데피가 놀랍네요.”
“그 미세한 차이를 느꼈느냐?”
“당연하죠.”
“오랜만에 사내다운 녀석을 봤도다.”
“저도 그렇습니다.”
이게 대체 뭔 소리야?
지수는 둘의 대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다짜고짜 주먹질할 때는 언제고, 저 뜨거운 눈빛 교환은 뭐냐고?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끈끈한 사제처럼 느껴져서 역겨웠다.
“따로 하는 훈련은 있고?”
“정석을 따르되, 제 몸에 맞는 훈련을 하는 편입니다.”
“그렇지, 그것이야말로 무초식의 극의지.”
“확실히 권왕 어르신은 말이 통합니다. 요즘 것들은 겉만 번지르르하지, 내실이 없거든요.”
“어르신은 무슨, 형님이라고 불러라.”
“예, 형님!”
아, 진짜!
형님이라고 부르라는 할아버지나, 부르란다고 넙죽 형님이라고 하는 무진이나!
족보 꼬이는 소리를 계속하고 있었다.
지수는 이런 총체적 난국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할아버지의 요란법석을 적당한 선에서 무마하려던 계획이 보기 좋게 빗나갔다.
‘할아버지, 저 사랑스러운 지수라고요!’
누가 보면 무진이 손자인 줄 알겠다. 할아버지가 저리 환대를 할 줄 누가 알았으랴.
번번이 예측을 빗나가고 있어서 지수의 속을 태웠다. 그러고 보면 무진과 다시 만난 이후로 계획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젠장, 약 올라!’
문제는 계획대로 되지 않았는데도 최상의 결과가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무진과 할아버지의 사이가 좋으면, 그것이야말로 바라는 바였다.
그러나 저 얄미운 녀석이 보란 듯이 우쭐할 것을 상기하니, 지수는 속이 쓰리다 못해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하나, 완벽하다고 해서 허락할 순 없다.”
“오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와 지수는 회사 동료와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사내 연애는 옳지 못한 일 아니겠습니까.”
“믿어도 되는 게냐?”
“제 몸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확실하군.”
어디가?
저런 식으로 말하는데, 받아들이면 더 이상하잖아.
지수로선 하나도 이해가 되지 않는 대화법이었다. 이걸 두고,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다고 하는 건가?
뭐가 이따구냐고!
“한데, 3분할이냐?”
“평소엔 한 번에 다 하지만, 급하면 분할도 합니다.”
“삼대는?”
“기본으로 10t 정도입니다. 그 이상은 기구를 구하기가 어려워서요.”
“좋을 때야.”
“형님도 정정하십니다.”
저거 농담 아니었어?
지수는 아버지와 함께 만나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앞섰다. 아버지가 무진에게 숙부라고 부르는 꼴을 어떻게 봐.
“할아버지, 장난치지 마세요.”
“우리 세계에 장난은 없다.”
“아빠가 미치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요!”
“흠, 그건 고민이 되는구나.”
“소고기는요?”
“심각하군. 이런 난관이!”
그딴 걸 난관으로 여기지 말라고요!
그냥 손녀의 친구로 편하게 대하면 되잖아요. 왜 거기서 진지하게 고민을 하냐고요.
넌 또 왜 진지해?
근육으로 꽉 들어찬 로댕처럼 고뇌에 찬 무진의 조각상이었다. 지수는 이 인간들이 자신을 놀리려고 작정한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너도 적당히 해!”
“단백질은 중요해. 소고기 안에 단백질이 얼마나 많이 포함되어 있는 줄 알아. 비싸서 그렇지.”
“매일 근손실이나 나라!”
“해서 될 말이 있고, 안 될 말이 있는 거야. 심하잖아.”
운동하는 사람에게 최악의 욕은, 근손실이었다. 겉으로 보여 주는 몸과 달리 근육량은 빨리 늘지 않는다. 또한, 어느 정도가 되면 더 늘리기도 힘들었다. 0.1g의 차이가 매우 크게 다가왔다.
지수의 난동이 심해지자, 무진은 타협점을 찾았다.
“비밀 친구로 하시죠.”
“그러자꾸나.”
유장산이나 무진이나 호칭에 연연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저 맘에 드는 사람을 만나서 반가웠을 뿐이다. 살면서 느끼게 되겠지만, 맘에 맞는 사람을 만나기가 수월치 않았다.
둘이서라면 호형호제하며 술도 마시고, 술도 마시고, 술도 마시고.
“하면, 네 녀석이구나.”
“그렇습니다.”
“과연 보통이 아니야.”
“저보단 못해도 지수도 제법입니다.”
“하하하, 내 손녀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지수를 그리 평하는 녀석은 처음이구나.”
단순히 완벽한 육체라서 마음이 동했다고 보긴 힘들다. 물론, 9할의 동요는 있었다.
그 이전에 무진의 움직임이 놀라웠다. 손녀를 방패로 내세운 비겁한 짓임에도 능력만큼은 진짜배기였다.
유장산은 무진이 들어올 때부터 감각을 제어하고 있었다. 허점을 노리긴 했어도, 실로 놀랍도록 기민한 대처와 정확한 판단력이었다.
손녀의 뛰어남을 알기에 주변에 똥파리가 끼지 않을까 노심초사했거늘, 황금 덩어리가 굴러들어 온 격이다.
“각성을 한 이후가 더 기대되는군.”
“지수에게 민폐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사내다운 구석도 있고.”
“하고자 한 이상, 최고가 되려고요.”
무진은 본심을 숨기지 않고 밝혔다.
유장산은 무진의 투쟁심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자신 이외에는 안중에도 두지 않을 강인함이었다. 어찌 보면 세상을 모르는 철부지의 호언장담일 수 있으나, 이것이야말로 권왕이 추구하는 패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