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괜찮아, 처음이야(2)
무진은 박상원을 돌아보며 ‘봤지?’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귀여움도 정도가 있었다. 위로나 동정을 해 봤자 나아가지 못한다. 그럴 바엔 현실을 직시하고 고쳐 나가야 했다.
“최소한 나보다는 커야지.”
“키가 전부는 아니라고!”
“키는 그냥 기본 옵션이야. 어깨는 어쩔!!”
“속물들!!”
“맞아.”
무진과 유정은 속물임을 쿨하게 인정했다. 굳이 외모가 전부가 아니라는 미담을 신봉하지 않았다. 흔히 착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외모가 전부가 아니려면 그걸 뛰어넘을 압도적인 능력이 있어야 했다.
키 안 봐, 얼굴 안 봐, 돈 안 봐, 이런 말 하는 애들치고 속물 아닌 경우를 찾기 힘들었다. 진짜로 안 보는 애들은 그런 것 자체를 의식하지도 않는다.
“질질 짜지 마라, 죽는다.”
“와, 안 통하네.”
시무룩한 척 당장이라도 울려고 했던 박상원은 불현듯 웃었다. 이런 경험이 흔하지는 않았어도, 상처받을 만큼 나약하진 않았다. 마법사는 항시 냉철함을 유지해야 했다. 나약한 정신으론 대성할 수 없었다.
“오늘 대체 팩트 폭격을 얼마나 당한 줄 알아! 나 아니었으면 자살했을 거야.”
“신소리 그만하고, 목적이 뭐야?”
“생긴 건 곰인데, 여우 그 자체네!”
“한 대로는 부족한 모양이구나.”
원한다면 기꺼이 주먹을 날려 줄 수 있었다. 박상원이 곧바로 항복을 선언하며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았다.
“나도 키가 크고 싶어서.”
“몸을 살펴봐야 하겠지만, 대충 10cm는 더 크겠어.”
“그래 봤자 160도 안 되잖아!”
“그 정도면 됐지, 키 높이도 있고.”
키 크는 방법, 물론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굳이 도와줄 이유를 못 느꼈다. 오래 사귄 벗도 아니고, 오늘 처음 본 녀석을 위해 시간을 할애할 이유가 있겠나.
“제발 뭐든지 할게!!”
“중급 마도서를 가져와.”
“……날강도!!”
“아니면 말고.”
듣고 있던 유정도 할 말을 잃었다. 중급 마도서의 가치를 안다면 무리한 거래였다. 정말 양심이 살아 있으면 저래서는 안 되는데, 지나치게 당당했다.
반감이 생긴 박상원이 역으로 물었다.
“할 수는 있고?”
“당근, 20cm는 물론이고, 180도 쌉가능하지.”
“……말도 안 돼!”
“대신 180이 되려면 상급 마도서가 필요해.”
“못 하면?”
“총각귀신 되겠지.”
선택은 자유라는, 무진의 배짱에 박상원은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말처럼 쉽게 되었으면 여태 노력한 자신은 뭐가 되냔 말이다.
한데, 지나치게 당당하고 뻔뻔해서 믿고 싶게 했다.
저 압도적인 육체는 무공만으론 만들어지지 않았다. 황천길 주먹에 맞아 봤기에 체감할 수 있는 영역이었다.
“좋아.”
“입으로만 하면 거래가 아니지.”
“난 아버지한테 죽었다!”
“평생 노총각으로 살다 뒈질래? 사나이라면 목숨을 걸어!”
“……할 수 있어! 할 거야!”
아버지한테 뒈지는 편이 평생 노총각으로 살다 뒈지는 것보다는 나아 보였다. 둘 다 사망각이라도, 행복한 꿈을 꾸고 싶었다.
‘하아, 이 미친놈들이!!’
유정은 이런 꼴 보려고 여기에 왔나, 하는 회의감이 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결승전이나 볼 걸 그랬다.
오구오구!
와플이 미쳤다!
***
부천시 원미산 공원.
d급 던전.
남작 레벨의 헌터인 나도후는 공략에 참여했다. 1차 공략대가 절반 이상 끝을 낸 상태라 뒤처리를 하는 형식이었다.
던전은 길드와 파티 공략으로 나서는 게 기본이다. 혼자도 가능하나,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서 최소 3인 1조로 구성했다.
그런데도 나도후는 혼자가 편해서 자유 헌터로서 던전에 들어갔다. 어린 시절의 상처와 각성된 능력을 감추려는 의도도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파티를 맺어서 동급의 던전을 공략했을 것이다.
‘c급 장비나 아이템만 나와도 좋을 텐데.’
나도후는 흩어져 있는 낮은 등급의 마물을 사냥하거나, 발견하지 못한 아이템과 장비를 찾았다.
과거와 달리 근래에는 던전 자체를 문파와 길드에서 운영했다. 공략 시 보상으로 최고급의 장비와 아이템이 나온다면 모를까, 안정화시킨 후에 수수료를 받는 편이 나을 수도 있었다.
그런 식으로 운영을 하다 더는 필요가 없어지면 공략을 해 버린다. 당연히 공략 보상은 운영 주체가 갖는다.
나도후는 조심스럽게 나아갔다. 굳이 위험을 무릅쓰진 않았다. 안전하게 해도 월급쟁이보다는 보수가 좋은 편이었다. 특히 자신의 특기를 활용한다면 먹고사는 데 지장은 없었다.
오오!
운이 좋았다.
단검 하나를 찾았는데, 등급이 c급이었다. 그 자체로 가격이 최소 300만 원은 줘야 했다. 이걸 놓치고 지나가다니, 행운이 따랐다.
두리번, 두리번!
주변을 살펴본 나도후는 단검을 들고 마력을 둘렀다. 안전을 위한다면 밖에서 하는 편이 나았지만, 던전에서 하면 마력 소모가 적고 효율적이었다.
우웅!
제발 되라!
더 높은 등급을 원할 수도 있으나, 그리하면 실패할 확률이 높았다.
웅, 팟!
빛이 사라진 후 단검을 내려다본 나도후는 환호했다. 방금까지 c급이었던 단검의 c+등급이 되었다. 아예 한 단계를 뛰어넘지는 못했으나, 이것만 해도 가격이 2배는 뛴다.
“됐어.”
두 달 치 생활비를 벌었다. 사람마다 기준치가 다르겠지만, 나름 호화롭게 살아도 된다고 보았다.
“거봐, 내 말이 맞잖아.”
“그러네.”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나도후는 급히 돌아섰다. 그 앞에 심상치 않은 기운을 풍기는 자들이 나타났다.
“당신들 뭡니까?”
“뭐긴, 단검을 거기다 놓은 사람이지.”
“……이건 내가 발견한 겁니다!”
“네가 발견하게 둔 거라니까.”
그제야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은 나도후였다. 어떻게 된 전말인지 정확히는 몰라도, 저들은 자신의 능력을 알고 접근한 것이다.
“단검을 주겠소!!”
“됐어, 어차피 다 우리 거니까. 너도.”
입맛을 다시는 다섯 사내의 모습에 나도후는 소름이 돋았다. 단순히 능력을 탐한다고 하기엔 이상했다.
이대로는 위험하단 판단이 서자 나도후는 도망쳤다. 그리고 던전이 갑자기 요동쳤다.
우우우웅!
쩌저저적!
이건 다섯 사내도 예상 못 한 사태였다.
***
-결승전 저녁에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났어. 일반적인 던전 브레이크였다면 기억하지 못했을 텐데. 그날은 달랐어. 공략 후 안정화시킨 던전 간에 공명이 일어나면서 영역이 확장된 거야. 한순간 던전이 개방하면서 일대를 침식해 버렸어.
지금 시간은 저녁 7시.
무진은 결승을 보지 않고 나왔고, 친구들과 카페 타임을 가진 후 헤어졌다. 알력이 작용한 기권으로 화가 나 보였을 테지만. 실제는 지수가 얘기해 준 미래를 확인하기 위해서 원미산 공원을 찾았다.
-할 수 있겠어?
-걱정하지 마.
-처음이잖아.
-레벨업하고 좋지.
애초 이번 사건은 지수가 해결하기로 했었다. 하지만 서열전에서 우승을 해야만 아카데미 보고에 숨겨진 아이템을 찾을 수 있었다. 차후, 그 아이템이 가져올 파급력을 고려하면 반드시 손에 넣어야 했다.
그런데도 지수는 걱정이 되었는지, 재차 물었었다. 애늙은이 같아도 무진은 현재 열일곱 살이었다. 생명의 가치가 지닌 무게는 가볍지 않았다.
-진짜로 하려고?
-당연하지.
-이제 막 배웠잖아.
-다 익혔어.
아직 던전에 출입할 여건도 되지 않았다. 실제로 출입증을 받으려면 3학년을 최상위권으로 이수해야 한다.
임시방편으로 무진은 지수에게서 얻은 역용술과 축골공을 결합하여 [무진류 만변 얼굴천재]를 완성했다.
다만, 첫술에 배가 부르지는 않았다.
그냥 배가 나왔을 뿐.
출렁!
작은 실수로 인해 성형 부작용이 일어났다. 철광석을 깎아 만들었던 육체가 흐물흐물해졌다.
실패긴 한데, 정체를 숨기기에는 제격이라 이대로 하기로 했다. 사실, 만변을 풀고 다시 시전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우우웅!
때마침 반응이 왔다.
무진의 예민한 감각이 일대를 탐색하는 중이었다. 불규칙한 변화가 일어나기 전의 전조 현상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당장은 밝혀지지 않았다고 했지.’
이번에 발생한 던전 브레이크는 새로운 형태의 던전 침식이었다. 사태가 벌어지고 난 후에도 원인 규명을 하지 못했었다. 이후, 기우선 박사의 던전 공명에 관한 연구로 던전 침식의 원인이 밝혀졌다고 했다.
‘하나가 살아나니 주변의 공략된 던전까지 활성화되면서 각성 효과를 일으키는 거구나.’
휴화산인 줄 알고 방심하다 터져 버린 활화산과 같았다. 한순간에 3개의 던전에서 공명을 일으키고, 증폭된 기운이 하나의 던전으로 쏠리며 폭발을 일으켰다. 일순간 일대가 잠식되며 던전의 등급마저 급격하게 올라갔다.
쩌저저적, 꽈아아아앙!
깨진 유리잔처럼 균열이 가던 던전이 폭발하며 일대를 뒤덮는다. 순식간에 한 구에 해당하는 지역이 잠식된다. 공원을 넘어서 주거지까지 닿아 있었다.
‘3,000명 가까이 죽었다고 했지.’
처음 던전이 열릴 때를 제외하면 엄청난 피해였다. 기억력이 떨어지는 지수가 용케 생각해 낸 것도 서열전과 희생자가 겹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또 번호는 물어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런 걸 기억할 녀석도 아니고.
우웅, 파아앗!
던전 브레이크로 침식이 되었고, 차원 굴곡이 발생해 결계가 쳐져 버렸다. 일순 영역이 5배 이상으로 넓어졌다. 외부에서 던전을 공략하려면 시간이 걸린다. 그 시간 동안 평범한 사람들이 버티기는 어려웠다.
쐐액!
출렁, 출렁!!
무진은 던전 밖에서 안으로 이어지는 최단 거리 내에 있었다. 둔탁한 외형과 달리 감각은 극도로 예민해졌다.
던전 안과 밖의 차이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감각의 범위가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를 분석했다.
‘마력은 물론, 각성 입자의 분포도가 다르구나.’
적응의 문제였다. 감각을 제대로만 활용한다면 밖에서보다 안이 더 유리할 수 있었다. 다만, 전체적으로 공기가 부족하고, 중력이 조금 더 무거웠다.
호오.
가는 길에 오크가 보였다.
오크 군락지였다.
군락이라고 하면 최소 100마리 이상은 되어야 했다. 아직 던전 침식을 인식하지 못했는지 오크들도 일사불란하지 않았다.
‘붉은 오크네.’
오크의 종류는 녹색 오크, 붉은 오크, 검은 오크로 구분이 되었다. 색깔에 따라서 전투력의 차이가 컸다. 일단 붉은 오크가 나왔다면 이 던전의 등급은 최소 b급 이상이었다.
슈우웅!
무진은 정리되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붉은 오크의 사각에서 창을 내질렀다. 숨겨 놓은 공력을 창에 실어 실체화를 이루었다. 그 힘의 파장이 군락지를 뒤덮었다.
꽈아아아앙!
일순간에 군락지가 날아가 버렸다.
레벨업!
레벨업!
1레벨에 있던 무진의 레벨이 일순간 10레벨까지 거침없이 치솟아 오른다. 모든 능력치가 잠재 능력의 비율에 따라서 상승했다.
호오!
이거 좋은데.
수련으로 얻을 때와는 달리 공돈 생기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수치도 나쁘지 않았다.
쐐액!
붉은 오크를 전멸시키고 나온 마석은 챙기지도 않았다. 애초에 마물 사냥이 목표가 아니었다.
무진은 계획대로 속전속결을 지향했다.
출렁, 출렁!
고속의 이동에 살들이 뒤로 밀렸지만, 탄력이 굉장했다. 마치 밀렸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면서 가속도를 받는 것 같았다.
‘저놈들인가?’
하나, 둘, 셋, 넷, 다섯!
확인을 끝낸 무진은 주저하지 않고 창을 던졌다.
천운이 따랐다.
던전 폭발과 함께 막혔던 능력치가 한순간에 폭발적으로 늘어나며 2차 각성을 했다. 이제는 쥐새끼처럼 능력을 숨기지 않아도 되었다. 잡아먹을 거리는 주변에 널리고 널렸다. 먹고, 또 먹어서 능력치를 높이면 그만이었다.
‘저놈만 사라지면, 크크크크!’
우리 세상이다!
그것이 방상진의 유언이었다.
슈아앙, 푸슥!
어디선가 날아온 창이 방상진의 몸통을 통째로 날려 버렸다. 하체만 덩그러니 남아서 방향감을 상실해 버렸다.
뒤쪽으로 거대하게 치솟아 오르는 버섯구름은 영화 같은 배경이었다.
우뚝!
멈칫!
다들 서리를 세게 맞은 듯 멈춰 선 후 고개가 돌려졌다. 그 앞에 머쓱한 표정을 짓고 있는 푸짐한 무진이 있었다.
“괜찮아, 처음이야.”
뭔 놈의 처음이, 저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