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필벌(3)
“그러니 걱정 안 되게 훈련을 하자니까요. 강기를 사용하고 싶지 않으세요?”
무진은 젓가락에 강기를 둘렀다. 빨주노초파남보 색깔별로 강기를 시현하면서 유혹했다. 설상가상으로 서커스를 하듯 허공섭물로 빈 그릇을 차곡차곡 싱크대에 놓았다.
심상의 구현까지는 보여 드리진 않았다. 너무 먼 일을 거론하면 가까운 경지를 놓치는 수가 있었다.
차근차근, 일보 스텝은 강기였다.
“……유혹하지 말거라!”
“부장실에서도 뒷담화를 감청할 수 있습니다.”
“……그건 좀!!”
“인사고과가 편해지겠지요. 적아의 구분도 쉽고요.”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듣고 싶지 않은 일면도 있기 마련이다. 없는 자리에선 황제도 욕한다는데, 감청은 비인간적이었다.
그러나 사람을 상대하는 것 자체가 피곤한 일이다. 회사는 총칼이 없는 전쟁터. 누가 아군이고, 적군인지 분리할 필요는 있었다. 앞에서만 아부하고 뒤통수치는 간신은 미리 쳐 내야 제맛이었다.
당하기 전에 먼저 친다. 과거나 현대나 가장 필요한 덕목이다. 당하고 나서 반격한다고, 피해가 복구되진 않는다. 상처뿐인 승리보단 선수필승이었다.
“내 아들이지만 아주 요물이야, 요물!!”
“저는 아버지가 뒤통수를 쳤으면 쳤지, 맞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 걱정은 하지도 말아. 아비를 좀 믿어!”
“아버지는 믿죠. 한데, 세상은 믿을 수가 없어요. 특히 윗놈들은.”
“그렇게 따지면 나도 윗놈이다!”
무진은 아버지의 능력은 인정했다. 대놓고는 말 못 해도 여전히 집안 배경이 능력이 되는 현실이다. 배경 하나 없이 실력만으로 대기업 임원이 되었으니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하나, 세상이 어디 능력만으로 돌아가나? 중소기업뿐만 아니라, 대기업도 혈연, 인맥, 파벌로 돌아간다.
그들에게 아버지는 능력 있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필요가 다하면 자기들 입맛에 맞도록 치워 버릴 수도 있다.
‘충성을 바라면 안 되지.’
줄 거 주고, 받을 거 받는 사이가 최선이었다. 괜히 감정을 이입해 봤자 회사의 부속품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일례로 나 없으면 안 돌아간다는 마인드는 구시대적인 발상이었다. 정말로 가족 같은 회사면 지분이나 경영권을 내줬어야지.
‘능력만 봤다면 이사로 진급하셨어야죠.’
진급 심사에서 떨어진 날을 무진은 잊지 않았다. 아버지는 내색하진 않았으나 몸은 정직했다. 정박을 찾아가지 않는 심장 박동과 유달리 빠른 피의 유속이 억울한 속내를 드러냈다.
당시엔 소주 됫병으로 대작하고 싶었으나, 불행히도 열두 살이었다. 한창 질풍노도인지라.
“약점은 많이 알수록 좋은 거예요.”
“그러다가 빨리 죽을 수도 있지.”
“안 죽게 해 드릴게요.”
“너 때문에 빨리 죽겠다고.”
아카데미를 가기로 결정한 이후로 아버지의 훈련 일정을 본격적으로 짜고 있었다. 최대한 주말을 활용하되 일상 훈련이 필요했다. 하나씩 배워 가는 재미를 들이는 것이다.
‘공력이 넘치면 다음은 쉽지.’
효율을 중시하는 아버지의 성향을 알기에 일단은 공력부터 주입했었다. 아버지라면 공력의 낭비를 원치 않으실 테고, 어떻게든 효과적인 사용 방법을 찾으려고 할 것이다.
강력한 병기를 지니고도 쓰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미 무진의 덫은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아버지가 극구 반대하지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설거지를 끝내고 방으로 들어와 의자에 앉았다.
10분쯤 지나 지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승 축하해.”
-어떻게 전화 한 통을 안 해?
“바쁠 것 같아서.”
-전화받을 시간은 있거든.
“극성맞은 사부님이 잘도 가만히 있었겠다.”
-……그건 맞아!
손녀 바보가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진 않을 테고, 최소 15박 16일은 잔치를 벌일 위인이었다. 손녀가 우승한 썰을 친구들한테 풀어놓지 못해 안달일 테니 말이다. 인근의 양로원은 꽉 잡고 계시겠지.
“아이템은?”
-[종속의 보도]라고 해.
“어떤 스킬이 있는 건데?”
-나중에 보면 알 거야.
그리움이려나? 지수의 목소리가 굉장히 들떠 있는 걸 보니 궁금하기는 했다. 그래도 알려 줄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 주는 것도 동료의 미덕이었다.
-그보다 잘 해결된 거 맞지?
“목격자가 있긴 하지만, 괜찮아.”
-목격자? 그게 누군데?
“곧 만나게 해 줄게.”
-만나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날 주군으로 모시겠대. 그래서 그러라고 했지.”
-……미친놈!
설명이 길어지진 않았다. 지수에게 역용한 사진을 전송했더니 바로 수긍하고 넘어갔다. 사진으로 판단하기에는 갭 차이가 지나쳤다. 그걸 보고 무진을 찾는다면 어떤 모습을 해도 숨기지 못한다.
-그런데 중계자가 있었다고?
“제거했으니까, 별 탈은 없을 거야.”
-정말로 있었구나.
지수는 시간대에서 충격을 받았다. 준비 기간이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대체 언제부터 어디까지 손을 댔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렇기에 암울했던 미래가 이해되기도 했다.
“이렇게까지 신중한 걸 보면 속 빈 강정일 수도 있겠지만, 네 말대로라면 반대일 공산이 더 크겠어.”
-당분간은 신중히 행동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
“지나치게 소극적이면 중요한 변곡점을 놓칠 수도 있어.”
-야, 누나 말 좀 들어!
통화는 그쯤에서 끝을 냈다. 한껏 흥이 오른 사부님이 지수를 찾고 있었다. 사부의 목소리만 들어도 얼마나 좋아하는지가 보였다.
‘중계자의 시야가 던전에선 사용되지 않았을까?’
놈들이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는지를 확인해야 했다. 그래서 중계자를 죽였다. 정확히 찾아온다면 중계자는 네크로맨서의 술식인 패밀리어로 봐야 했다.
‘공부를 좀 해 놔야겠어.’
흑마법 계열은 무지하다시피 했다.
중세나 소설에서는 금단의 술법으로 여기지만, 현재의 흑마법사는 공개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흑마법과 네크로맨시를 이용해서 다양한 형태의 병리학적 성과를 올렸기 때문이다. 사후 세계를 신봉하는 자들도 적지 않았고.
***
던전 브레이크에 의한 침식을 조사하기 위한 조사대가 꾸려졌다. 정부, 가문, 길드의 합동조사단이었다.
사례가 없어서 이번 던전 브레이크에 대한 관심이 컸다.
정부 산하 던전을 관리하는 정명석 팀장이 총지휘를 맡았다. 칠대가문과 대형 길드에서 파견된 인사는 정 팀장을 따라야 했다.
이는 정부, 가문, 길드 간의 암묵적으로 협의한 사안이었다. 실제로 가문과 길드 사이에서 사사건건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정부는 중재자로서 역할을 해 왔었다.
정 팀장 휘하의 이재성은 던전 내 흔적을 살펴보았었다. 이재성은 팀 내에서도 날카로운 안목과 명석한 추리력을 지녔다.
“죽은 사람들은?”
“던전 내 출입 명단과 CCTV로 인상착의와 동선을 분석했더니 식견(食犬)과 유사합니다.”
“개새끼들이 잡히지 않은 연유가 있었군.”
“하급 던전을 위주로 신분을 위장하고 다녔던 모양입니다.”
“잘 죽었네, 씨발 놈들!!”
대단한 놈들은 아니더라도, 살인 사건에 연루되었다. 한데, 다른 범죄와 달리 살인에 대한 증거가 나오지 않았었다.
“이것 참, 녹색도 아니고 적색 오크 군락지가 나올 줄이야. 등급이 a급까지 올라갔다는 소리잖아.”
“그 오크 군락지가 순식간에 초토화되었습니다.”
“누군지 알겠어?”
“그게 좀 문제입니다.”
“어떤 점이?”
“강환을 사용했습니다.”
강기의 흔적들이 곳곳에 있었고, 강환에 의해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겨났다. 새겨진 흔적들을 이어 붙이면 한 사람으로 귀결되었다. 이 정도면 최소한 후작급 이상의 헌터였다.
“후작급이면 용의자를 특정하기 어렵진 않잖아.”
“그렇기야 합니다만, 창강과 창환의 운용이 놀라우리만치 대단합니다. 이처럼 능수능란한 창술은 국내로 한정했을 때 한 곳뿐입니다.”
크흠.
정 팀장은 침음했다.
곧 칠대가문에서도 사람이 올 것이다. 그들에게 정황을 설명해야 하는데, 의혹의 중심에 설 가문이 정해졌다.
과연 순순히 인정하려고 할까? 답은 나와 있었다. 그럴 이유가 없기에 문제였다.
“일단은 모른 척해. 괜히 분란 조장하지 말고.”
“걔들도 눈이 있는데 모른 척한다고 되겠습니까?”
“우리가 유도하면 곤란하니까 그렇지.”
“칠대가문이 언제부터 우리 말을 들었다고.”
칠대가문도 눈이 있으면 알아볼 테니, 나서서 마찰을 일으킬 이유는 없었다. 대형 길드에서 물고 늘어지지 않도록 조율하는 선이 적정했다.
‘골치 아프군.’
대체 어떤 새끼야?
차라리 악당이라면 맘이라도 편할 텐데. 악인을 처리하고, 던전 브레이크를 공략했으니 상을 내려야 마땅했다.
제법 훌륭한 짓을 해서 속을 썩였다.
‘너도 우리들의 다정한 이웃이냐?’
***
요긴하게 쓰일 특성이었기에 관측기를 붙였다.
기회가 생기면 빼내 오려고 했거늘, 시작부터 어긋나 버렸다. 그렇더라도 일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빈자리는 다른 도구로 채우면 그만이다.
문제는 관측기였다.
도구를 감시하고, 데려오는 용도라 전투력 자체는 대단치 않았다. 그러나 은신, 은폐, 잠입에 관해서는 일가견이 있었다. 등급에 따라서 관측기를 파견했었고, 여태 실패한 적이 없었다.
관측기의 소실은 예상치 못한 낭패였다.
희박한 가능성이나, 누군가 알고 움직였다면 골치 아팠다. 전면에 드러내기엔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다.
‘영혼 연결을 해야 했나?’
관측기가 본 기억을 되짚어 볼 수는 있으나, 항시 영혼을 연결하기는 어렵다. 하나도 아닌, 수백의 관측기를 확인하려면 막대한 심력을 소모해야 했다.
더욱이 던전의 차원 굴곡을 뚫고 들어가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결국, 던전 밖으로 나온 후 기억 검토를 통해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드륵!
십영이 조사를 마치고 돌아왔다.
“알아냈느냐?”
“천극창의 파멸세로 보입니다.”
“그럴 리가. 대체 어떤 놈이?”
“던전 인근 영상을 확인해 봤지만, 현재로선 불명입니다.”
십영의 보고에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관측기의 소실보다 문제가 더 심각했다. 확인된 사안만 봐도 특정하기가 어렵다. 더욱이 천극창의 파멸세를 펼치려면 강기를 사용할 줄 알아야 했다.
칠대가문 내에서도 강기를 사용하려면 최소 후작급으로 봐야 했다. 그런 존재가 많을 리는 없을 테고.
“창황가를 조사할까요?”
“섣불리 행동하지 마. 당장은 조사대로서 의무를 다해.”
합동조사단은 정부, 길드, 가문으로 구성이 되었다. 창황가에 관측기를 붙여 놓았다가 들키는 날엔 더욱 복잡하게 꼬일 수도 있었다. 우선은 조사대의 분석을 토대로 신중히 움직여야 했다.
‘지금이 아니더라도 대가를 치러 주마.’
대세는 막을 수 없으나, 대계가 늦어졌다. 흠이 없는 완전무결을 바랐기에 화가 치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