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작당(2)
아니라고!!
왜 말을 안 믿어!
아니라고!!
누차 말하지만 아니다.
흥분을 가라앉힌 나도후는 차분히 말했다.
“올 사람이 있으니, 다른 자리로 가 줬으면 합니다.”
“올 사람이 접니다.”
“참 나, 여기 올 사람은…… 설마?”
“그때와 다르죠.”
무진의 본모습에 나도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한번 보면 잊기 힘든 풍만함과는 다른 충격을 주었다. 옷을 입고도 단단함이 전해졌다. 사람이 이렇게나 달라질 수 있다니, 9계식의 폴리모프라도 사용했나?
하면 같이 온 여성은?
어디서 본 얼굴이었다. 사람 관계가 희소한 나도후에게도 강인한 인상을 심어 준 여인…… 여생도가 떠올랐다.
“……권화!!”
“알고 있군요, 내 동기인 유지수입니다.”
“아, 그렇군요…… 예?”
“전 강무진입니다.”
“권화의 호위무사는…… 둘째 치고 동기라면서요?”
“그런데요?”
이게 무슨!!
나도후는 둔기로 뒤통수를 세게 처맞은 얼굴이 되었다. 이런 상황은 계산에 두지 않아서 허망했다. 자신이 그토록 기다렸던 은인이자 배경이 되어 주실 분이 고삐리였다니!!
“진짭니까?”
“아니라고 하면요?”
“진짜군요!!”
“실망했다면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시면 됩니다.”
무진의 축객령에도 나도후는 혼비백산한 영혼을 추스르지 못하고 있었다. 예상된 범위라도 사람이라면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다. 상식적으로 그날의 신위를 상기하면 이제 막 입학한 생도를 떠올릴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거 보여 주려고 데려온 거야?”
“그날은 진심인 줄 알았지.”
“까먹고 있었으면서 뭔 진심?”
“조사가 끝날 시간을 계산하고 있었어.”
지수의 핀잔에 무진은 구구절절 설명해야 했다. 넋이 나간 나도후를 보고 있자니 신뢰도가 급격히 떨어졌다.
이러면 연계한 플레이가 조금은 엇나가게 생겼다. 나도후를 기점으로 자금 마련을 위한 계획을 세웠거늘.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야?”
“일어나자.”
무진과 지수가 떠나려고 하자, 나도후는 정신이 들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직감이 뇌리를 스쳤다. 게다가 아직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불필요한 시간은 원치 않습니다.”
“제가 말하면 어쩌려고 그럽니까?”
“말할 겁니까?”
“그렇진 않습니다.”
“됐네요, 그럼.”
본인은 모르겠지만, 방금 나도후는 요단강을 건넜다가 다시 돌아왔다. 비밀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았다. 약속을 지키지 않겠다면 입막음은 당연지사.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급하시군요.”
“그럴 때잖아요.”
“……그렇군요.”
열일곱 살에 노회한 어른처럼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가랄 수도 없는 노릇이긴 했다. 중2병이 심화 단계로 넘어가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한편으로 너무나 당연한 모습에 압도당하고 있었다. 대화할수록 도저히 열일곱 살로 보이지가 않는다.
“제게 다른 선택권은 없군요.”
“이상한 말씀을 하는군요. 선택은 오롯이 본인이 해야 합니다. 남에게 미루는 건 비겁한 행동입니다.”
나도후는 번개에 감전된 사람처럼 전율을 느꼈다.
지극히 타당한 말을 하고 있었다. 선택이란 항시 본인이 해야 했다. 남에게 이끌린 선택은 언젠가 반드시 후회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주군으로 모신다고 했으나, 상대는 고작 열일곱 살이다. 어른이 돼서 생도에게 책임을 떠넘긴다면 부끄러운 행동이었다.
‘그래, 맞아. 내가 선택해야 했어. 그냥 회피하고 싶었던 거구나!’
개새끼들한테 잡아 먹힐 뻔했던 이유가 상기되었다. 선택하지 못한 억압된 삶에 익숙해졌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무진이 선택해 주기를 바랐다.
“주군으로 모시겠습니다.”
“지금이 조선 시대도 아니고, 형 동생으로 하죠. 다른 사람이 보면 곤란하기도 하고요. 그러니 말 편하게 하세요.”
“너도 편하게 해.”
“알았어, 도후 형.”
일이 잘 해결됐지만, 지수는 여전히 못 미더운 기색이었다. 나도후를 신뢰할 시간도 능력도 검증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꿀꺽!
권화의 심드렁한 눈빛에 나도후는 마른침을 삼켰다.
생긴 건 영락없는 소녀인데.
‘왜 누나 같지?’
***
하아, 하아!
숨이 목구멍까지 차오른다. 몸 구석구석에 남은 상흔에선 피가 흘렀다. 당장 지혈부터 해야 하나, 그럴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 숨겨 놓았던 [구명의 징검다리]를 사용해 공간을 점프하지 않았다면 살아남지 못했다.
s급 장비인 [죄악의 심판자] 이명의 보도를 확보했다는 말을 듣고 너무 성급히 행동했다.
과거의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고, 조급함에 이성을 잃었었다. 그 한순간의 판단미스와 살쾡이의 야심을 몰라본 대가였다.
‘천진우, 이 씨발 놈!!’
자신의 뒤를 봐줄 조력자이자 동생을 얻은 줄 알았더니, 은혜를 원수로 갚는 쓰레기 같은 놈이었다.
찌릿!
살아야 한다는 극한의 본능이 위기를 감지했다. 제인은 그 즉시 밟고선 자리에서 튀어 올랐다.
슈슈슈슈슝, 파앙!
탄환처럼 공기를 관통한 가시가 지면에 박히고, 폭발을 일으켰다. 허공으로 날아올랐던 제인은 스텝 부스터를 발동해 거리를 벌렸다.
스왁, 사르륵!
어둠을 잘라 낸 예리한 선이 제인의 목을 노렸다. 간발의 타이밍이었다. 머리카락이 잘려 나가며 사르르 떨어져 내린다. 조금만 늦었으면 머리가 몸에서 분리되었을 상황이었다.
그걸 인지할 사이도 없이.
퍼엉!
지면에 착지했던 제인은 둔탁한 충격을 받으며 튕겨졌다. 순간적으로 [어둠의 장막]을 쓰지 않았다면 뭉개졌을 수도 있었다. 제인은 바닥을 내리구른 후 반동으로 튀어 오르며 [어둠의 창]을 발출했다.
퍼퍼퍼펑!
목숨을 노리는 3연격에도 반격을 가한 제인의 대응이 놀랍기는 했다. [혹한의 저주]를 흡입해서 몸 안에 기능이 현저하게 떨어지지 않았다면 위험했을 수도 있었다.
“과연, 쉐도우 길드의 주인답군.”
“그레이 길드의 병신들이구나!”
“호오, 멀쩡히 죽고 싶지 않은가 보군.”
“네놈들이 행여나 그러시겠냐!”
제인에겐 최악에 최악을 더하고 있었다. 이번 일에 쉐도우 길드와 동등한 그레이 길드, 총통 길드가 합세했다.
제인을 막아선 이들은 그레이 길드의 행동대장 격인 천형삼살이었다. 별호 그대로 하나씩 기형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는데, 잔혹하기로 악명이 자자했다. 실제 저들에게 당한 목표물 대부분이 얼굴, 팔, 다리에 심각한 상처를 입고 공포에 젖어 죽어 갔다.
촤자자작!
천형삼살만 오지 않았다. 그레이 길드의 길드원 30명이 포위 진형을 갖추었다. 목숨을 노린 연격이지만, 시간을 끌려는 의도가 명확했다.
사륵!
곧, 총통 길드의 사신 탁세원이 길드원을 이끌고 뒤를 막아섰다.
저벅, 저벅!
어둠이 짙게 깔린 던전 경계 속, 상대를 확인한 제인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개자식,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
“그런 표정은 참 유감스럽습니다. 오히려 저를 자랑스럽게 생각해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자기 뒤통수도 관리 못 한 책임을 아랫사람에게 떠넘기는 행위는 옳지 못합니다.”
깔끔한 정장 슈트에 반듯한 인상의 모범생처럼 생긴 사내, 쉐도우 길드의 2인자 천진우였다.
악의라고는 담기지 않은 젠틀함이 제인의 신경을 건드렸다. 마치 이 모든 사태의 잘못이 자신에게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키워 준 짐승도 은혜를 안다고 하거늘, 저 새끼는 짐승만도 못한 쓰레기였다.
“너 같은 새끼를 믿은 내가 병신이다. 됐냐!”
“이만 곱게 가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알다시피 번거롭고 불필요한 싸움입니다. 그 상태로 얼마나 버티겠습니까? 편히 가 주십시오. 그러는 편이 저로서도 마음이 덜 아플 겁니다.”
“좋아, 이리 와서 내 멱을 따 봐.”
“저는 징그러운 걸 잘 못 봅니다. 게다가 뭘 숨겨 놓았을지 몰라서 싫습니다.”
제인도 기대는 하지 않았다. 법 없이도 살 것 같은 멀끔한 모습처럼 뒤처리가 완벽한 놈이었다. 하지만 순순히 잡혀 줄 마음 따윈 없었다.
“같이 가자! 개새끼야!”
제인이 별안간 달려들자, 천진우는 히죽였다.
예상했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도망쳤다면 오히려 까다로운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솔직히 여기까지 도망친 것도 대단했다. 1차, 2차의 함정 연계가 아니었다면 곤란했을지도.
응?
덤벼들던 제인의 몸에서 쏟아져 나온 물체가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천진우의 안색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젠틀함과 악귀는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했다.
아수라처럼 변한 천진우였다.
“뇌정…… 이 미친년이!”
저걸 터뜨리겠다고?
이 일대를 날려 버릴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더욱이 폭발의 범위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존재가 제인이었다. 터지는 순간 살 조각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다.
뇌정폭을 가지고 있을 줄도 몰랐지만, 다 잡았다고 너무 몰아붙인 대가치고는 뼈아프다.
“모두 피햇!”
순간, 일대를 밝히는 섬광이 번쩍이며 폭발이 일어났다.
번쩍, 꽈아아아앙!
암전이었던 시야가 온통 하얗게 변하며 귀를 찢어발기는 굉음에 평형감각마저 흐려진다.
솨아아!
빛이 사라지고 난 직후, 천진우의 얼굴은 악마처럼 구겨져 있었다.
“빌어먹을 년이 끝까지 속을 썩이는구나!”
동귀어진을 자행한 제인이 사라졌다.
알고 봤더니 뇌정폭은 빛과 굉음을 응집해 놓은 가짜였다. 이성을 잃고 미친년처럼 쇄도했던 모습도 의도한 것이다.
마지막까지 방심 못 할 쌍년이었다.
휘이잉!
산의 정상까지 도주했던 제인은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아야 했다. 가짜 뇌정폭으로 시야를 가리고, 쿨타임을 채우기 위해 시간이 걸리는 [구명의 징검다리]를 펼쳤었다.
최대한 거리를 벌려서 인적이 있는 곳까지 도망치려고 했지만, 총통 길드의 사신의 눈을 피하지 못했다. 놈이 [구명의 징검다리]의 다음 지점을 비틀었다.
사신의 주특기가 바로 추적술에 있었다. 목표물을 원하는 장소로 유인하여 몰아넣고, 당황하는 모습을 즐기는 악취미를 지녔다.
“지저분한 새끼!”
“칭찬으로 듣지.”
평소 몸 상태였다면 절대 하지 않을 선택이었지만, 제인으로선 뾰족한 수단이 없었다. 이제 마지막 도박만이 남아 있었다. 여기서 살아난다고 해도, 사지가 멀쩡할지는 모르겠다.
사신이 시간을 끌려고 하자, 제인은 결심을 굳혔다. 다른 놈들까지 도착하면 더는 도망칠 수도 없다.
“각오가 섰나 보군.”
“같이 죽을 자신은 있고?”
“그럴 리가. 시체만 가지고 가면 될 일이다.”
“대체 누가?”
사신은 그쯤에서 대화를 멈추었다. 제인의 궁금증을 풀어 주진 않았다.
제인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 확실한 증거가 없기에 아니기를 바라고 있었을 뿐.
‘살아남으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아!’
제인이 접근하려고 하자 사신은 되레 거리를 벌리며 기회를 노렸다. [구명의 징검다리]를 쓸 때를 노리는 게 분명했다. 두 번이나 사용했으니 타이밍이 잡힌 것이다.
움찔!
찰나, 사신은 이상한 위화감에 사로잡혔다.
제인이 아닌 다른 방향에서.
인지하려는 때.
쐐애애액!
푸욱!
찌르고 나간 창이 복부를 관통하며 맹렬히 회전했다. 단숨에 사신의 상·하체를 찢어발겼다.
크아아악!
그 어떤 고통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던 사신이었지만, 하체가 멀어지면서 떨어져 내리자 비명을 질렀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극세사처럼 날카로운 직감 [고양이의 발그림자]가 특성이었다. 극도로 예민한 감각을 이용해 사신으로 불리며 무수히 많은 살인을 완료했었다. 암습을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당하리라고는. 사신답지 않은 허무한 최후였다.
“……도대체 ……커어어억!”
“알아서 뭐 하게.”
창은 사신의 입을 뚫어 내는 것으로 부족해 머리통까지 박살 냈다. 산산이 부서져 버리는 뇌수와 선혈을 끝으로, 남아 있는 길드원들을 모조리 도륙했다.
슈아앙, 퍼어엉!
어둠을 뚫어 내는 수십의 창영이 당황하는 총통 길드원의 숨통을 끊어 낸다. 찌르고, 회전하고, 휘두르는. 봉과 다른 공세적인 형태의 창술이 밤을 공포로 몰아넣는다.
“……살려 ……아아아악!”
그야말로 일방적인 살육전이었다. 도망갈 틈조차 주지 않는다. 가장 최단의 거리로 숨통을 끊어 냈다.
사신부터 죽여서 혼란을 만들고, 흐트러진 빈틈을 노렸다. 압도적인 무위 못지않은 실로 완벽한 전투수행이었다.
부르르르!
그 엄청난 광경에 제인은 몸서리가 쳐졌다. 피육으로 이루어진 사람이라고는 생각이 되지 않았다. 한 호흡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검의 파편만이 남았다.
하아!
도망쳐야 한다는 간절함조차 사라졌다. 그런 낌새만 보여도 사신과 다르지 않은 꼴을 면치 못할 것 같았다.
대체 어디서 이런 괴물 같은 자가 나온 거지?
최소 후작 이상, 어쩌면 공작일 가능성도 있었다. 멀쩡한 상태에서도 도망치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저벅!
움찔!
괴인이 다가오자 제인은 숨이 넘어가는 줄 알았다. 다소 심드렁한 무심함이 심혼을 옥죄었다. 언제든 쓸어버릴 수 있다는 오만한 패도였다.
서걱!
창을 휘두르자, 바위가 무처럼 잘려 나가며 반듯한 터가 생겼다. 인벤토리에 창을 넣은 무진은 바위 터에 앉았다.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상태창을 확인했다.
“17레벨이라, 제법 쏠쏠하네.”
“……?”
방금 뭐라고 한 거야?
17레벨? 말도 안 되는 헛소리였다. 최소 90레벨 이상으로 봤었다. 어쩌면 100레벨이 넘을 수도 있었다. 그 정도는 되어야 가능한 전력이었다. 겸손함에도 정도가 있지, 기만에 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