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함정(4)
더욱이 예상과 달리 마인들이 무진을 압도하지 못하고 있었다. 차라리 단숨에 처리했다면 선택의 여지가 없겠지만, 지금은 또 달랐다.
“네놈들이 한 짓을 나만 알고 있을 것 같으냐!”
너희들의 수작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외치는 도문수였다.
둘이 공멸하기를 바랐던 얄팍한 의도를 들킨 이민용, 정우민, 적운길은 선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저주받을 새끼!”
“이게 다 네놈 때문이야!”
“우릴 원망하진 마라!”
전말이 외부에 알려지면 자신들은 끝장이었다. 그러니 원인 제공자인 무진을 가만둘 수 없었다. 무진이 잘난 체하며 반을 들쑤시지 않았으면 애초에 이런 사태는 일어나지도 않았다.
빠드드득!
지금과 같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일파만파를 원하진 않았는데, 그들은 자책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일로 치부했다.
우우우우우웅!
공력 대결은 팽팽하게 진행되지만, 마공을 쓰는 도문수가 유리해 보였다. 본신의 공력으로 이만큼이나 버티기도 어렵다. 그렇다면 본원진기까지 사용했을 수도 있었다. 조금만 건드려도 폭주하여 터져 버릴 것이다.
스왁!
무진에게 접근하던 이민용, 적운길, 정우민은 섬뜩한 검기를 감지하고 멈춰야 했다.
헉!
그들은 검기가 날아온 방향으로 돌아섰다. 예기치 못했던 생도가 검을 뽑은 채 서 있었다.
검화 천혜진.
혜진의 양옆으로 소유정, 박상원이 언제든 막아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너희들이 어떻게?”
“추해.”
혜진의 싸늘한 대답에 정우민, 이민용, 적운길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갑작스러운 마인의 등장은 둘째 치고, 어째서 얘들이 여기 있는 것인지 하나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체 언제부터?”
“처음부터.”
혜진, 유정, 상원은 저들이 행한 추한 짓을 전부 지켜보고 있었다. 사전에 무진과 말을 맞춘 후, 3구역에 결계 마법을 펼치고 안에 숨었었다.
저들의 추한 행동을 보면서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무진이 신호를 보낼 때까지 기다렸었다. 어정쩡하게 나서면 발뺌할 우려도 있었다. 빼도 박도 못 할 때를 인내하며 기다렸었다.
정우민, 이민용, 적운길은 허둥지둥하며 궁색한 변명을 했다.
“……우리도 어쩔 수 없었어!”
“끝까지 자기들 책임은 아니라는 거네.”
정곡을 찌르는 상원의 빈정거림에 그들은 울컥하며 이를 악물었다. 사태를 처음부터 봤다고 하니 어떤 말을 한들 거짓말에 지나지 않았다.
“우린 속았을 뿐이야!”
“함정에 빠진 거라고!”
“맞아, 무진하고 작정하고 판 거잖아!”
그렇다고 순순히 모든 사실을 받아들일 순 없었다. 어떻게든 책임을 전가하고 작금의 위기에서 빠져나가고 싶었다.
“우리한테 해명할 필요 없어. 아카데미에 영상을 보여 주면 그만이니까.”
“이러지 마! 이러면 너희들한테도 좋을 거 없다고!”
영상이 존재하는 이상, 구차한 변명일 뿐이다. 누가 자신들의 말을 믿어 주겠는가.
“멍청한 놈들, 그런다고 쟤들이 봐줄 것 같아!”
다급해진 것은 도문수도 마찬가지였다.
예상하지 못한 변수의 등장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되었다. 어물쩍 넘어가기에도 문제가 심각해진다. 기습을 해도 부족한 판국에 망설이다니, 멍청한 족속들이었다.
‘게다가 이 새끼는!’
돌아가는 정황을 알기 위해선 무진부터 쓰러뜨려야 했다. 어쩌면 함정에 빠진 쪽은 자신들일 수도 있었다. 지나치게 딱딱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의심스러웠다.
“어쩌나? 이제 전세가 역전됐네.”
“쥐꼬리만 한 내공으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것 같으냐!”
“내력만 답인 건 아니야.”
“어림없다!”
무진이 힘을 쓰려고 하자, 도문수도 이때다 싶어 마공을 전력으로 끌어 올렸었다. 하지만 마주 잡은 두 손이 으스러지면서 내력이 역류했다.
도문수는 내력 대결을 유도한 줄 알겠지만, 이 모든 과정도 무진이 의도한 바였다.
“……이런 말도 ……크아아아악!”
우드득, 우드득!
무진이 힘을 줄 때마다 도문수의 손은 박살 나고 있었다. 으스러진 뼈가 기어이 살가죽을 뚫고 나왔다. 극심한 고통에 도문수는 마공을 제어하지 못했다.
“……어째서?”
“대답해 줄 의무는 없지.”
도문수는 울화가 치밀었다. 이대로 가면 어차피 끝장이란 걸 깨닫자, 최후의 수단을 펼쳤다.
“같이 가자!”
도문수는 [이중폭발]을 발동했다.
무진과 도문수의 중심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내력 대결 중에 이중폭발은 자신의 몸을 담보로 한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었다. 미친 짓이 분명하지만, 궁지에 몰린 도문수는 주저하지 않았다.
푸아아아앙!
내력의 폭풍으로 붉은 선혈이 튀었다.
***
착!
바닥을 짚고 일어선 사내는 비틀거리는 신형을 부여잡았다. 얼굴엔 낭패한 기색이 완연했다. 입가에 흐르는 핏물조차 닦지 못한 채 상대를 노려보았다.
“이런 실력을 감추고 있었다니, 놀랍구나!”
“저도 놀랐어요. 명색이 아카데미 교관이시면서 생도를 기습하시면 안 되죠.”
사내는 아카데미 교관이었다. 아카데미의 까다로운 절차를 통과하여 교관이 되기는 쉽지 않기에 놀라운 일이었다.
‘빌어먹을, 철저하게 당했군.’
인공 던전의 관리 책임자인 조풍산으로선 최악의 선택이 되고 말았다. 만약을 대비해서 기다렸을 뿐인데, 지수가 나타나면서 도둑이 제 발 저린 격이 되었다.
“결계 안에 문제가 있긴 한가 보네요.”
“똑똑하구나. 하지만 차라리 모른 척 지나갔어야 했어.”
“생도로서 불의를 보고도 외면할 순 없죠.”
“그렇게까지 죽고 싶다면, 원하는 대로 해 주마.”
“보셔서 아시겠지만, 쉽지 않을걸요.”
지수의 여유에 풍산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기습적인 수로 이득을 챙겼을지 몰라도, 전력 대결에서 생도는 교관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스륵!
풍산은 병기를 소환했다. 평소에는 사용하지 않은 채찍 형태의 검이다. 검편에 강선이 연결되어 검격을 조절할 수 있었다. 사용하기 편한 검은 아니지만, 완숙한 경지에 이른다면 상대하기가 굉장히 까다롭다.
채채챙, 쩌엉!
풍산의 마력이 예기와 융화되어 날카로움이 배가되었다. 닿는 즉시 공기를 갈라냈다. 그런데도 지수는 거리를 벌리기는커녕 파고들었다.
‘보통이 아니구나!’
서열전 1위라고 해도, 고작 1학년에 불과했다. 한데, 실전과 다름없는 무공과 전투 센스를 갖추었다. 차후 대업에 문제가 될 소지가 다분했다.
“제법이긴 하다만, 아직 멀었다.”
“그딴 말은 절 이기고 나서 하세요.”
“죽여 주마!”
“얼마든지 오세요.”
풍산의 교룡검이 왼손에도 소환되었다. 쌍검이 그의 주특기였다.
슈슈슉, 휘이잉!
강선의 유연함에 따라 검편이 회전하며 공간을 갈가리 찢어 놓는다.
퍼엉, 투아앙!
지수는 신화공으로 육신을 강화하고, 신화천권의 기본형으로 마주했다. 예측하기 어려운 교룡검의 궤적에도 막고, 흘리고, 반격했다.
처어엉!
권기와 부딪친 교룡검이 번갯불을 발출하며 출렁거린다. 비틀어진 궤적의 틈이 어느새 잠기며, 안으로 파고들기는 여의치 않았다.
풍산의 교룡검은 지수의 침투를 허락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백여 합의 공수가 이어지면서 사방이 초토화되고 있었다. 작은 틈이라도 보이면 뱀의 송곳니처럼 교룡검이 목줄을 노렸다.
칼날이 빗발치는 경각에도 지수의 동선은 굉장히 침착했다. 아수라를 겪지 않고선 나오기 힘든 냉철함이다.
“발출.”
원치 않는 교착상태가 이어지자, 풍산은 교룡검의 숨겨진 기능을 사용했다. 지수가 막았다고 확신한 시점에 강선을 끊어 검편을 수리검처럼 날렸다.
타타타탕!
지수의 오른손이 하늘을 향하고, 왼손이 땅을 가리켰다. 신화천권의 호신패, 신화금강의 기본자세였다. 정중동의 금강부동을 이루어 호신강기와 같은 역할을 했다.
후우우!
신화금강을 사용한 지수는 호흡을 빠르게 정리한 후 나아갔다. 검편이 사라진 이때를 놓치지 않았다.
신화천권 단절식 천절격.
심기체를 끊어 내는 신화천권의 극의. 교룡쌍검의 중심이 되는 검심(劍心)에 일격을 선사했다.
퍼엉!
쩌저저적!
다급하게 교룡검을 교차했지만, 그조차도 지수의 예상대로였다. 교룡쌍검이 천절격에 파편이 되어 풍산을 노렸다. 자기의 무기에 자기가 당하는 형국이었다.
타타타타탕!
피육이 꿰뚫리기는커녕 강철과 마주한 쇳소리가 들렸다.
풍산의 속성, [철의장막]이 발동했다. 강력한 방어력을 지닌 철의장막이 파편을 막아 냈다.
큭!
방어할 시간이 부족해서 완벽하진 않았다. [철의장막]으로 막지 못한 파편은 검벽으로 방어했다.
“어떠냐…… 이런!”
“왜요?”
회심의 일격이 성공하지 못했지만, 지수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권격이 실패하든, 성공하든 상관하지 않았다.
슈슈슈슝!
지수의 권이 무수히 많은 그림자를 만들어 내며 풍산의 정면을 가득 메웠다. [철의장막]으로 시간을 번 줄 알았지만, 풍산의 명백한 오판이었다.
‘생도가 맞나?’
애송이들과는 결의가 달랐다. 방심은커녕 빈틈을 보이지 않는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노련하고 완숙한 헌터였다.
퍼퍼펑!
한 번 기세를 내어 주자, 풍산은 속절없이 밀렸다. 교룡검이 부서지면서 병기를 꺼낼 시간조차 없었다. [철의장막]을 써서 물러서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연속으로 사용한 이상, 쿨타임이 지나야 재사용이 가능했다.
“하는 수 없지!”
풍산의 눈빛이 바뀌었다. 내부에 숨겨 놓은 마혈을 개방했다. 상부의 명이 없이는 마혈을 써선 안 되지만, 이대로는 임무를 실패하게 된다.
화아아아아!
마혈의 등급 중 가장 낮은 단계인 적마혈이지만, 개방된 마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풍산의 등급이 한순간 후작에 버금갔다. 실제 후작급 전투력은 아니더라도, 갓 입학한 생도에겐 버거운 기운이었다.
“끝장을 내 주마.”
“졌어요.”
지수가 냅다 도망치자, 풍산은 멈칫하고 말았다. 곧, 살기가 폭발하며 지수를 추격했다. 도망치게 놔두지도 않겠지만, 자신을 기만한 지수를 살려 둘 순 없었다.
“네년이 도망칠 수 있을…… 칫!”
“본색을 드러냈구나.”
도망치려던 지수가 갑자기 선회하더니 풍산의 왼쪽을 점하며 신화천권의 염화식, 화천폭을 펼쳤다. 권에서 뿜어져 나간 화염이 폭격하듯 풍산의 중심에서 폭발했다.
화르르르, 솨아아아!
화염이 솟구치는 일대를 뚫어 낸 풍산이 지수를 향해 쇄도했다. 육신이 화염에 타오르고 있음에도 상관하지 않았다.
퍼퍼퍼퍼펑!
지수는 그럴 줄 알았는지 권격을 쉴 새 없이 날렸다. 화염 속에서 튀어나오는 그림자를 향해 무차별 난타를 시전했다.
“소용없다!”
폭발적으로 상승한 풍산의 마력이 방어막이 되어 사방으로 퍼진다. 지수의 권영난사는 허사로 돌아갔다. 살풀이하듯 전력을 쏘아 낸 지수의 호흡이 가팔랐다.
하아아!
더는 어쩔 수 없기에 지수는 손을 털었다.
“항복이요.”
“닥쳐랏! 그런다고 살려 줄 성싶으냐!”
평소의 조용조용한 풍산을 상기했다면 다른 사람이었다. 열이 받을 대로 받아서인지 몰라도, 흉신악살처럼 보였다. 그렇다고 탓할 수는 없었다. 이 정도로 당하면 온화한 성인군자도 화가 날 만했다. 그만큼 지수가 재수 없기는 하다.
“죽어랏!”
풍산이 빛살처럼 일직선으로 쏘아졌다.
슈우웅, 푸욱!
섬광이 찌르고 지나간 자리에 풍산은 멈춰 섰다.
그는 믿어지지 않는 눈으로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병기에 꿰뚫린 채 바닥에 꽂혔다.
“……마라창!!”
철혈십좌의 일좌 정명길이 손을 뻗자, 창이 되돌아왔다. 그는 무심한 시선으로 풍산을 보고 있었다. 하나,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투기가 거미줄이 되어 풍산을 옥죄었다.
“늦었잖아요!!”
지수는 그제야 숨을 토하며 투덜거렸다.
마라창과 함께 온 아카데미 교장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제보를 받고 오기는 했지만, 예상을 한참이나 상회했다.
“각오는 됐겠지?”
뒷방 늙은이 취급을 받는 교장이었으나, 이때만큼은 매서운 눈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