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갑질(3)
“연락이 갔을지 모르겠네요.”
“학부모 간에 유대가 끈끈하진 않더구나.”
“그러게요. 연락 좀 해 주지.”
“동네방네 떠들기엔 창피한 일이지 않느냐.”
사부의 의견에 동의하진 않았다. 창피하기보다는, 자기들만 당할 수 없다는 아주 인간적인 본능이었다. 학부모들도 내리사랑을 원하고 있었다.
“한데, 재산 상태는 어떻게 안 거냐?”
“아는 누님이 정보 조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법이구나.”
“나중에 소개해 드릴게요.”
무진은 양심이 있었다. 가진 재산에서 줄 수 있을 만큼만 요구했다. 그런데도 다들 머뭇거려서 실망스러웠다.
‘재산을 숨기면 안 되지.’
신고한 재산보다 숨긴 재산이 많아서 짭짤하긴 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문서 작성은 기본이었다. 다른 말 하면 자식들의 아카데미 생활이 괴로울 거란 겸허한 충고와 함께.
사부와 웃고 떠드는 사이, 타이거 길드에 도착했다.
화염가나 창황가와 비할 수 없겠지만, 규모는 아주 마음에 들었다.
“어떤 새끼야?”
“뭐야, 너희들!!”
벨을 누르자 험악한 인상의 문신한 돼지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세상 물정 모르는 것들이라 그런지 눈치가 없었다. 딱 보면 알아야지, 이 험악한 세상을 어찌 살려고? 순진한 문신 돼지들이었다.
“사부님.”
“오냐.”
사부님의 충격 다이어트 요법이 나올 차례였다. 연약한 녀석들에게 주먹까지 휘두르진 않았다.
크억!
절대자의 기세를 한 번 맛보면 평생 잊지를 못한다. 아마 볼 때마다 질질 싸게 될 거다.
주르르르!
털썩!
오랜 사우나로 기력이 빠진 듯, 돼지들이 버티지 못하고 기름과 오줌을 배출하며 쓰러졌다. 주변이 아주 흥건하다. 족히 20kg은 뺐을 것이다. 볼품이 없어서 그렇지, 권왕류 충격 다이어트 요법은 확실했다. 요요가 올 때마다 재충전을 하면 된다.
허걱!
뒤늦게 나온 녀석들은 나름대로 식견이 있었다. 보자마자 기겁하며 경기를 일으킨 걸 보면.
사부님의 명성이 하늘과 땅을 울리고 있었다. 이쯤 되면 축지법도 보여 줄 만한데.
“……권왕!”
“호오, 말을 까시겠다.”
사부님의 주옥같은 명언을 무진은 받아 적었다. 그야말로 깽판의 정석이었다. 후일 사부님을 뛰어넘어 청출어람을 기대했다. 확실히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깽판이 오래갔다.
“아닙니다! 저희가 감히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놀라기는, 나 그렇게 무례한 사람이 아니에요. 안 그래, 그래?”
“그렇습니다~~~!”
“귀청 떨어지겠다. 왜 소리를 지르고 지랄이야!”
“……시정하겠습니다.”
“안 들려. 나 늙었다고 괄시하냐!. 왜 모기처럼 말을 하고 지랄이야!”
그냥 지랄이었다.
참으로 근본이 있는 권왕의 관록이었다. 젊은 시절 사부의 화끈한 모습이 상기되었다.
“……어쩐 일이신지?”
“나는 여기 오면 안 되는 거냐?”
“아닙니다!”
“모처럼 군대 좀 가 볼래?”
……우린 면젠대!
안과 밖의 무한 루프를 당해 보면 정신이상이 걸릴 수도 있었다. 이 수법은 하극상이 나오지 않는 이상 답이 없었다.
한데, 상사가 권왕이면 하극상이 되겠나. 막말로 계급장 떼고 권왕과 맞짱을 붙을 수 있는 사람은 우리나라에 10명뿐이다. 10명 안에 들 자신이 있으면 붙고.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건지 원, 여긴 손님 대접이 아주 형편없구나. 다른 가문에도 말해 줘야겠어.”
“어서 들어오십시오!”
타이거 길드의 중간 간부인 노석형은 47년의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지금이야 성질이 많이 죽었지만, 젊은 시절 권왕은 패악질의 끝판 대왕이었다. 최대한 흠잡지 못하도록 대접해야 했다.
“어서 움직이지 않고 뭐 하고 있어!”
노석형의 연락을 받은 타이거 길드는 혼란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소식을 들었어도 어지러울 판국에 갑작스러운 권왕의 방문이었다. 권왕을 귀빈을 대접하는 접견실로 모시고, 외출한 길드장이 올 때까지 숨죽이며 기다렸다.
무진은 길드장과 만나기 전에 타이거 길드를 제집처럼 돌아다녔다. 권왕의 제자임을 알기에 누구도 함부로 건들지 못했다.
타이거 길드를 활보하다, 아는 얼굴을 만났다.
“오랜만이야.”
“네가 어떻게?”
“사부님과 같이 왔어.”
“사부님이라면…… 설마?”
“네가 생각하는 그분이 맞아. 아주 화끈하시지.”
“……어째서?”
“알면서 왜 그래.”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배준상은 뭉크의 절규를 연상할 만큼 기겁했다. 그때 당한 부상을 겨우 회복하기는 했지만, 정신은 그날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분명 잘 해결됐다고 했는데?’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냐며 아버지에게 쌍욕을 먹기는 했지만, 풍신과 적절한 선에서 협상을 봤다고 들었다. 그런데 협상은커녕 길드에 비상령이 울렸다. 하물며 권왕이 방문하는 줄 알았다면 아버지가 외출하시지도 않았다.
“아카데미에서 이번 일을 함구하라고 했잖아.”
“나도 함구하기로 했어.”
“그런데 왜? 혹시, 복수하려는 거야?”
“유치하기는, 나는 은원 따윈 잊었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무진의 태도에 배준상은 울컥했다. 그날 처맞고 나뒹군 게 떠올랐다. 실상, 따지고 보면 이놈의 꾀에 넘어가 개망신을 당했다. 그뿐인가? 간신히 만들어 놓은 칠대가문과의 연줄도 날아갔다. 자신을 볼 때마다 으르렁거리는 정우민, 적운길, 이민용을 피해 다녀야 했다.
“잊었다면서 찾아오는 건 또 뭔데?”
“피해 보상을 해 줘야지. 사람이 다쳤는데 나 몰라라 하는 건 도의가 아니잖아.”
“다치긴 누가 다쳤다는 거야?”
“누구긴, 나지. 그때 폭발로 15년이나 되는 공력을 잃었거든.”
“그걸 누가 믿는다고.”
“여기가 마지막인데, 연락이 없었나 보네. 혹시, 왕따야?”
왕따란 말에 발끈했던 배준상은 낯빛이 굳었다. 마지막이면 앞서 다른 집을 전부 들렀다는 뜻이 되었다. 권왕이 일일이 찾아가는 동안 연락은커녕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좆돼 보라는 거잖아!’
배준상은 배신감에 치를 떨어야 했다. 모든 계획을 세우고, 일정까지 맞춰졌다. 무진이 예상보다 강해서 틀어지긴 했어도, 이런 식으로 나와선 안 되었다. 자기들을 위해서 개처럼 머리 싸매며 노렸는데, 억울하다.
“어쩌냐, 불쌍해서. 아카데미 생활이 고달프겠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거든.”
“그렇다면 다행인데, 애들은 보통 책임을 지고 싶어 하지 않잖아. 어쩌면 누군가에게 책임을 떠넘길지도 모르지. 그편이 수월하기도 하고.”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을 건드리는 무진의 화술에 배준상은 부르르! 떨었다. 따지고 보면 이번 일을 주도한 건 정우민과 적운길이었다. 한데, 화염가나 창황가는 건드릴 수 없으니 그중에서 만만한 대상을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개 같은 것들이!!’
배준상은 분통이 터졌다. 현실을 부정하기에는 자신이라도 그리할 것 같아서 답답했다. 실상 부담감을 가장 손쉽게 털어 낼 방법이었다.
“더욱이 처음부터 알고서 마인과 수작질을 벌였다고 한다면?”
“……헛소리하지 마, 난 아무것도 몰랐다고!”
“놀라기는, 농담이야.”
“농담이라도 해야 할 말이 있고, 안 될 말이 있는 거라고!”
“그렇긴 하지.”
남의 일이라고 쉽게 말하는 무진의 태도에 배준상은 화가 치밀면서도 식은땀이 흘렀다. 실제로 그런 식으로 몰아간다면 자신뿐만 아니라 길드도 영향을 받는다. 지금이야 창황가, 화염가, 혈천 길드가 엮여 있어 함구할 뿐이지, 나중 일은 어떻게 될지 몰랐다.
그런 오해를 피하려면 방법은 하나였다. 당사자가 아니라고 해 주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목이 좀 마르네.”
“잠깐만 기다려. 물 가지고 올게.”
“그럼 삼다수로 부탁해.”
“어, 알았어.”
배준상의 빠릿빠릿한 행동에 무진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의지할 데가 없을수록 선택지는 정해져 있었다. 하는 짓이 맘에 들진 않더라도,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 녀석이었다. 적당히 줄타기하는 포지션을 만든 후에 박쥐처럼 쓰기 적합했다.
‘정보를 흘리기도 좋고.’
상대를 이용하는 수법은 꼭 정공법만 있지 않았다. 역으로 정보를 흘리고, 이용하는 것도 가능했다.
“이크, 주인장이 돌아왔나 보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기운의 파동이었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핵폭탄에 맞먹는 사부였다. 히로시마처럼 원폭을 맞고 싶지 않으면 길드장으로서 최선을 다해야 했다.
다다다다!
배준상도 열심히 달려왔다. 손에 든 삼다수를 무진에게 내밀었다.
“여기.”
“안 마셔.”
“……뭐?”
“널 어떻게 믿어.”
“……?”
치밀어 오르는 울화에 배준상은 목덜미를 잡고 쓰러질 뻔했다. 살다 살다 처음 보는 미증유의 개새끼였다. 자신도 그리 성격이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격이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진짜 좆됐다!’
배신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이런 놈인 줄 알았으면 애초에 시비를 걸지도 않았을 것이다. 호감을 품었던 소유정에 대한 원망이 컸다. 그년만 나타나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권왕도 무진과 다르지 않았다.
콩 심은 데 왕(王)콩이 난 격이다. 타이거 길드장 배정재는 임자 제대로 만났다.
그간 중견 길드의 폭군으로 소형 길드를 쥐 잡듯이 잡았던 벌을 되돌려 받았다. 한편으로 씁쓸한 현실이기도 했다. 권선징악이 되려면 더 큰 힘이 필요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
“짜증 나네. 그런 새끼 하나 보내 버리지 못하고 뭘 하는 거야? 그렇지, 오빠?”
“뭐, 그렇지.”
“정우민, 적운길, 이민용은 좀 하는 줄 알았는데, 병신들이잖아. 그렇지, 오빠?”
“그런 편이지.”
오빠의 뜨뜻미지근한 반응에 유지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 건방진 놈을 보내 버리자고 제안을 한 것은 오빠였다. 갑자기 마음이 변하기라도 한 사람처럼 관심이 콩밭에 가 있는 것 같았다.
“큰오빠가 알면 가만두지 않을걸.”
“여기서 형이 왜 나와?”
“우물쭈물하다간 전부 뺏긴다고. 우리 몫을 챙겨야지.”
“알고 있으니까 그만하고, 가자.”
서열전에서 우승을 차지한 지수의 활약은 가문에서도 연일 회자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뒤를 이을 확실한 후계자의 탄생이라며 치켜세웠다.
열 받는 일이지만, 지연은 주제를 알고 있었다. 어차피 지수는 큰오빠의 몫이었다. 지수의 주변이라도 처리해야 큰오빠가 가문의 후계를 이었을 때 제 몫을 주장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디 가는 거야?”
“가 보면 알아.”
도심의 7층으로 된 상가 건물에 도착했다. 신축이었고, 6층까지는 공실 없이 들어찼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에 도착했다. 장사를 하지 않는데, 카페가 차려져 있었다. 시설만 만들어 놓고 입점은 하지 않은 듯했다.
카페에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어?
방금까지 투명한 유리로 비쳤던 카페의 전경이 사라지고, 전혀 다른 공간이 나왔다. 그제야 결계가 발동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연은 의아했다.
이곳에서 대체 뭘 하려고 오빠가 자신을 데리고 왔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어보려고 하는데, 오빠가 시선을 회피했다.
끼익!
반대쪽에서 문이 열렸다.
“너는?”
“반가워.”
안면은 있지만, 낯선 장소에서 의도치 않은 만남이었다. 지연으로선 예측하지 못한 일이라, 자연히 오빠에게 시선이 갔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냐고.
“지철 선배는 나가 있어.”
“어, 그래도 돼?”
“같이 뒈지고 싶으면 자리에 있든가.”
“나갈게.”
지연의 어이없는 시선에도 지철은 아랑곳하지 않고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그 일련의 동작이 어찌나 빠른지, 잡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돌아가는 사태가 짐작되자, 지연의 안색이 새하얗게 변했다.
“……날 팔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