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종신 고용?(2)
투귀는 과거 권왕에게 도전했다가 만신창이가 되었었다. 둘 다 적당히를 몰랐기에 숨통이 끊어지기 전까지 싸웠다. 까딱 잘못했으면 요단강을 건넜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투귀의 긴 인생에서도 그때의 싸움은 손가락 안에 꼽을 만큼 소중하고 강렬했다.
“어떤가?”
“선약이 있지 않나.”
“금방 끝날 걸세.”
“그렇긴 하지.”
과거의 설렘이 상기되었다. 권왕과의 싸움을 기대하는 투귀였다. 그 전에 제자의 오만함을 깨우쳐 주기로 했다. 다방면으로 유능한 녀석인 건 분명하나, 건방이 하늘을 찔렀다. 나중을 위해서라도 훈계가 필요했다.
“어서 시작하자꾸나.”
“그러시죠.”
발밑을 조심하지 않는 투귀의 설레발에도 무진은 침착하게 대응했다. 사전에 마법을 보여 준 연유도, 나중에 마법 때문에 졌다는 핑계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다. 사람이란 상상력조차 벗어난 현실과 마주하면 변명을 대곤 했다.
“양보는 없다.”
“그럼요.”
쐐액!
같잖은 허례허식은 버렸으나, 안목을 좀 더 키웠으면 했다.
무진은 치고 들어오는 투귀의 주먹을 상체의 움직임만으로 피한 후 카운터를 날렸다.
슥, 빡!
꽈아아앙!
긴장하며 지켜봤던 김삼진은 ‘뭐지?’라는 표정이었다. 복싱의 기본인 슬리핑의 ‘슥’과 스트레이트를 뜻한 ‘빡’은 완성되었다. 문제는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사부님이 광기로 도배되어 쇄도할 때까지는 보였다. 그다음 연결 동작이 버퍼링인 줄 알았는데, 결과적으로 다운로드 완료였다. 이래서 윈도우 업데이트가 멈췄다고 전원을 함부로 끄면 곤란한 것이다.
쿠다다다당!
연무장의 벽면으로 시원하게 날아갔던 투귀는 부딪히고 튕겨 나와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다 엎어졌다.
무진의 힘 조절 실패였다.
“아쉽네요. 잘 쳤으면 천장을 봤을 텐데.”
“내가 이겼다.”
권왕과 무진은 투귀와 싸우기 전에 앞뒷면 내기를 했다. 간단하게 책 위에 동전을 쳐서 앞이 나오면 무진이 먹고, 뒤가 나오면 권왕이 먹는 게임이었다. 치고 들어올 때 피하고, 카운터를 먹일 때까진 좋았으나 중력가속도를 계산하지 못한 패착이다.
“방학도 끝났구나.”
“놀지도 못하고 제가 고생이 많습니다.”
“젊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했어.”
“사부님의 젊은 시절을 가주님께 들었습니다.”
크흠!
개망나니로 소문이 나지 않은 것만 해도 천운이었다. 지금은 그래도 성질이 많이 죽은 것이다. 나이 먹고도 젊을 때의 객기 그대로면 사람들이 노망났다고 하겠지.
헙!
공상과학에서 현실로 돌아온 김삼진이었다. 보고도 믿어지지 않아 차라리 상상의 나래를 펼쳤었다. 여전히 현실은 바뀌지 않고 제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사부님~~~~!”
현실을 인식한 김삼진이 투귀를 부르며 달려 나갔다. 어찌 된 연유인지 보이지도 않았지만, 사부님의 상태를 확인부터 해야 했다.
무진과 권왕의 태평함과는 비교가 되었다.
“나보고 김 회장을 만나라고?”
“형식상이니까, 너무 닦달하지 말고요.”
“끄응, 난 그런 답답한 자린 질색인데.”
“나중에 잘되면 대련으로 보답할게요.”
“내가 뭔 힘이 있겠느냐, 네가 하자면 하는 거지.”
권왕으로선 좋은 시절 다 지나갔다. 이제는 제자의 말에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제자와의 대련은 그 어떤 유혹보다 강렬했기 때문이다.
“사부님, 정신 차리세요!”
김삼진은 사부를 뒤집어 깐 후 상태를 봤다. 오른쪽 얼굴에 새겨진 선명한 권흔(拳痕), 허망하게 흘러내리는 타액, 방향을 잃은 흰자위까지.
프로파일링 결과, 기절이었다.
다행히 숨은 쉬고 있었다. 김삼진은 조심스럽게 상체를 일으켜 세운 후 손바닥을 등에 대고 기력을 발산했다.
우웅!
크헉!
숨이 트이면서 막혔던 기혈의 맥이 흐르고 기력이 발산되었다. 입을 통해 빠져나가는 기력이 상당했다. 그렇다면 전력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소리가 된다. 동시에 내외력이 원래의 상태로 돌아갔다.
“……이게 무슨?”
단지, 정신은 돌아오지 않았다. 왜 자신이 연무장에 앉아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얼굴이다. 마치 거대한 충격이 뇌를 때려, 영혼이 정지된 것 같았다.
“사부님이 졌습니다.”
“……졌다고? 대체 어떻게?”
“저도 잘, 그저 쓱빡이었습니다.”
“뭔 빡?”
녀석을 향해 빛살처럼 쇄도해 들어갔던 건 기억이 나는데, 그다음이 없다. 마치 클라이맥스 없이 열린 결말로 끝나는 기분이었다. 제자의 설명에도 이해가 되기는커녕 더욱 오리무중이었다.
뭘 해 보기라도 했어야지.
“이럴 순 없어!”
이해가 안 되니, 결국은 현실 부정이었다.
무진은 그런 투귀를 스윽! 본 후 사부를 돌아봤다.
“왜 나를 보는 게냐?”
“알면서?”
“알긴 뭘 알아! 몰라!”
“알 텐데요.”
“귀여운 척하지 마라, 그건 나도 못 참겠다!”
권왕은 투귀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건 외면한다고 해서 외면할 수 없는 냉혹한 현실이었다. 자신도 수도 없이 반복하고 나서야 겨우 받아들였다.
“엥?”
“왜요?”
“내 제자지만 너무 사악하구나.”
“그 사부에 그 제잡니다.”
다음이 눈에 훤한 권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뻔한 레퍼토리와 반복되는 스토리였다. 그런데도 시청률 60%의 고공 행진을 달리는 막장드라마와 같았다. 너무 궁금해서 안 보려야, 안 볼 수가 없거든.
“……속성이구나!”
무진은 이번에도 사부를 돌아보며.
“그렇다는데요?”
“그렇구나.”
현실을 부정하고, 왜곡할수록 상황이 더욱 악화되기만 했다. 잔혹한 진실을 알고 있기에 권왕은 입맛이 썼다. 자신의 전철을 고스란히 밟고 있는 투귀의 명복을 빌어 주었다. 동인천행을 타야 하는데, 용산행을 탄 격이다.
“다시 하자! 이건 사기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아요?”
“보기는 어디…… 난 아니다!”
“독사도 그랬죠.”
속임수를 밝히지도 못하고, 무조건 우기다가 저세상으로 직행하고 말았다.
투귀는 옆에서 전말을 지켜봤기에 말문이 막혔다. 그제야 먼저 간 독사의 심경이 어땠는지 공감이 되었다.
반박하려면 판을 뒤집을 만한 조커라도 있어야 하는데, 이놈은 스페이드 로열스트레이트 플러쉬였다.
게임 끝이다.
그걸 어떻게 이기냐고? 말로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 어떤 변명도 소용이 없다.
투귀의 평소 소신과도 맞지 않았다. 전장에서 방심해서 졌다는 말은 핑계에 불과했다. 그걸 자신이 하고 있으니 살아온 삶을 자기 스스로 부정한 꼴이었다.
‘알지, 그 심정!’
권왕도 알고, 투귀도 알고, 먼저 간 독사도 알고.
투귀가 화술이라도 좋으면 모를까, 이건 말빨이 궁극에 이른 프리토킹의 신이 온다고 해도 불가능했다. 차라리 복불복의 표절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재대결을 해 주면 원하는 걸 다 들어주마!”
“계약에서 공수표 남발은 위험해요. 다행히 전 그렇게 무책임한 사람이 아니랍니다.”
단지, 전에 작성한 계약서에 주석을 달았을 뿐이다. 어쩐지 계약서의 공백이 넓었던 건 기분 탓이 아니었다.
-갑과 을의 관계는 직장의 상사와 부하로 정립한다.
괜한 말을 하지 않았나? 내뱉은 말이 후회되었던 투귀는 문장을 읽어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간 이놈이 보여 주었던 면면을 상기해 보면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어때요?”
“그렇게 하자.”
“너무 쉽게 생각하신다. 직장 상사의 나이가 어리면 아닌 척해도 당사자로선 부담이 될 텐데요.”
미국이나 서유럽과 달리 우리나란 여전히 나이가 직급과 연관이 있었다. 나이 어린 유능한 상사라고 해도, 하급자의 나이가 많으면 서로에게 부담이 되었다.
“직급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더냐? 아예 말을 까거라!”
“효자로서 그럴 순 없죠.”
경로사상이 아니고?
제자의 수작을 가만히 듣고 있던 권왕은 실소가 터져 나왔다. 투귀를 보니 제자의 나이를 강 과장으로 알고 있는 듯했다. 나중에 고딩인 걸 알면 어쩌려고? 저리 공수표를 남발한단 말인가. 아무래도 계약서의 광활한 공백이 서울의 러시아워처럼 빼곡해지지 않을까 상상해 봤다.
무진은 도장을 찍고, 투명 스티커까지 붙였다. 조항 하나하나가 나중에는 자산이 되기에 빼도 박도…… 한 점의 의혹도 있어선 안 되었다. 계약은 상호의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했다.
“바로 시작하죠.”
“네놈이 먼저 오거라.”
이번에는 투귀도 신중을 기했다. 기습적인 선수로 끝을 내려다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 녀석이 어떤 식으로 무공을 펼치는지 관찰한 후 판단하기로 했다.
‘내가 너무 서두른 게야!’
장단점을 분명히 파악하고 약점을 찔렀어야 했다. 천병공의 극의는 상황에 따른 순간순간의 판단력에 있었다. 녀석을 권왕에게 가는 발판으로 보지 말았어야 했다. 대적 상대로서 얕보지 않고 전력을 다하기로 마음먹었다.
‘다시는 지지 않는다!’
스포츠의 명대사를 되새긴 투귀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감각을 개방하여 제공권을 확보했다. 양손에 장착한 건틀릿은 언제든 발출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슝!
빡!
쐐애애액!
한눈팔지 않았던 정신이 승천한 후, 연무장으로 날아가 버렸다. 날아가는 도중 의식은 사라졌기에 고통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고층 아파트에서 떨어질 때 의식을 잃은 것처럼.
쿠다다당!
부딪히고, 튕기고, 구르고.
삼(3)고 완성한 후, 투귀는 천장을 보았다. 이번에는 힘 조절까지 완벽했다.
허허!
권왕도 어처구니없이 바라보았다. 저건 애초에 막을 수 있는 종류의 수법이 아니다. 그렇다고 처음보다 빨랐냐? 그렇지는 않았다. 자신도 제자에게 몇 번이나 당해 보고 나서야 사기라는 걸 깨달았었다. 물론, 어중간한 초절정이 비빌 경지와는 거리가 멀다. 최소한 그 이상은 되어야 막을 수 있었다.
쿨럭!
조마조마해하며 관전하던 김삼진은 사레에 걸린 듯 헛기침을 하고 말았다. 보고도 믿어지지 않는 광경을 또 보았다. 섬광이 일직선으로 나아가는 것 같았는데, 사부도 같이 날아가 버렸다. 그것이 대결의 시작과 끝이었다.
“사부님~~~!”
김삼진은 처음보다 민첩하게 움직여 사부를 깨웠다. 이번에도 의식이 돌아오면서 기력이 발산되었다.
“사부님이 졌습니다!”
“이거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데.”
분명 똑같은 일이 있었다. 이걸 두고 데자뷔라고 하지 않나? 물론, 개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투귀는 기억을 돌이킬수록 어처구니없는 현실과 마주했다.
“……이럴 수가!”
또 졌다고?
불가사의한 비현실이었다. 어떻게 자신이 한 방에 쓰러진단 말인가? 그나마 이번에는 왼쪽이라, 좌우 균형이 맞기는 했다. 이걸 노렸다면 이 새끼는 정말로 개새끼다.
“끝나고 짜장면 드실래요?”
“갑자기 무슨 짜장이냐?”
“먹방을 보는데, 군침이 돌더라고요. 오늘 먹지 못하면 내일이 안 올 것 같은 기분, 뭔지 아시죠?”
“그래 봤자 짜장이지.”
맞는 말이긴 하다. 먹방을 볼 때는 다섯 그릇은 뚝딱인데, 막상 가서 먹으면 역시나 웃기는 짜장이었다.
무진과 권왕의 시답지 않은 대화였다. 그걸 지켜보는 투귀는 억장이 무너졌다. 자신이 짜장보다 못하다는 사실에 치가 떨렸다.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린 거지?’
중간 과정을 알아야 하는데, 도저히 모르겠다. 투귀로선 처음 겪어 보는 막막함이었다. 권왕과 싸울 때도 이런 느낌은 받지 못했다. 하물며 그 제자한테 도저히 넘지 못할 막막함을 느꼈다.
“거짓말이다!”
권왕이라면 어렵사리 이해라도 하지, 제자에게 손도 못 써 보고 당하다니. 특이 멀티초월신성의 속성을 이용한 사기가 분명했다. 어쩌면 이 모든 게 짜고 치는 환상일지도 모른다. 왜 당했는지 모른다면, 피해자는 바로 나였다.
“빌어먹을!!”
양 볼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현실이라고 아득바득 우기고 있었다. 네가 아니라고 하면 고통이 사라지냐고 비아냥거리는 것 같았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냐?”
“지금 비기를 알려 달라는 거죠?”
“……그건 아니고!”
“무협지 속 세상은 아니더라도, 남의 비기를 알려 달라는 말을 다른 분도 아니고 어르신께서 하실 줄은 몰랐네요.”
“내 말은 그게 아니고?”
두 번이나 어이없이 지다 보니 투귀의 혓바닥만 궁색해졌다. 입을 나불거릴수록 혓바닥이 부끄럽다고 자꾸 목구녕으로 말려 들어가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