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 흑역사 치유사(2)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던 곽상배는 물론 박격 길드원들은 울컥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유사삼형제에게 놀림을 받으면 대미지가 기본 10배 이상이었다.
“안 죽인다니까.”
“그러면서 이러는 연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길드원에게 흑역사를 주었잖아. 너도 한번 당해 봐야지.”
“설마 저 병…… 김태천과 대결이라도 하라는 거요?”
“이기면 없던 일로 해 줄게.”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까?”
“내가 약속을 밥 먹듯이 깨기는 해도, 지키려고 노력은 하는 편이야.”
끝까지 소인배 모드를 풀지 않는 무진의 화법에 박격 길드원은 치를 떨었다. 진짜 이겨도 되는지 의문이 들었다.
다행히 그런 의문을 깨 주기는 했다.
“이겨야 할 거야. 지면 뒷감당이 안 될 테니까.”
“약속이나 지켜 주시오!”
“조심해야 할 걸. 어릴 때완 다르거든.”
“염려하지 마십시오!”
곽상배는 죽다 살아난 기분이었다. 혹시나 미쳐서 죽이지 않을까, 팬티를 살짝 지렸었다.
화를 내거나 무서운 얼굴이 아닌데도, 강 부장이란 자는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유형이었다.
‘다르긴 개뿔. 이계라도 갔다 왔나!’
귀환자라는 건 소문만 무성할 뿐, 밝혀지진 않았다. 억만 분의 일의 가능성이 저런 찐따 새끼한테 생길 리 만무했다.
당장은 보는 눈이 있으니 적당히 패는 선에서 승부를 볼 작정이다.
‘다시 내 밥이 되어 주어야겠다!’
상배는 흉흉한 기세를 발산하며 태천에게 다가섰다.
나이가 들었다고 자기가 뭐라도 되는 양 설치는 놈에게는 매가 약이었다. 함부로 나대면 어떻게 되는지 깨닫게 해 줄 요량이다. 사회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좋게 인사하고 끝났으면 좋았잖아. 네가 괜한 소리를 하는 바람에 이렇게 된 거야!”
“그래서 내 탓이다? 하아!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예전이나 지금이나 개새끼…… 음, 낙타 새끼네!”
“아주 그냥 매를 버는구나! 그때나 지금이나 개긴 걸 후회하게 해 주마!”
“강 부장님이 무섭지 않나 봐.”
“……비겁하게 또 꼰지르겠다고?!”
“왜 이래, 다구리나 치던 놈이. 언제는 이기면 장땡이라며.”
태천이 무진을 거론하자 상배는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시하려고 해도 뇌리에 새겨진 무심함 속의 잔혹함이 떠올랐다.
자신들 따위는 손가락 하나로 쳐 죽일 수 있는 초인들. 마음이 돌변하기라도 하는 날엔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었다.
“개입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받았다!”
“어쩌냐, 난 쉐도우 길드 소속인데.”
“이 새끼가 진짜! 적당히 패려고 했더니,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난 적당히 팰 생각 없으니 맘대로 해라.”
기가 죽기는커녕 꿋꿋이 말대답하자 상배는 울화가 치밀었다.
더는 참을 수 없기에 속성인 [광기]를 발산하며 스킬 [발목을 잡다]를 발동했다.
솨아!
기선을 제압하며, 다리를 잡아채 반응을 제한하려는 의도였다. 성질이 나기는 했어도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상배였다. 나름 잔머리를 굴릴 줄 알았다.
“죽엇!”
적당히 상대하려던 계획은 기억에서 지웠다. 화가 치민 상배는 태천의 얼굴을 향해 냅다 주먹을 질렀다.
초반 제압을 통한 일격필살, 상배는 선빵의 정석을 지켰다.
‘여태 이걸 맞고 버틴 놈은 없다!’
당연하겠지만, 처음부터 상대가 안 될 것 같으면 시도도 하지 않는다. 만만하고 이길 만한 상대만 골라서 짓밟았으니, 그 말도 틀리진 않았다.
슈우웅!
성공을 자신했던 상배의 얼굴에서 당황이 번졌다. 주먹에서 느껴져야 할 손맛이 전해지지 않았다. 공허한 헛스윙을 깨달았을 때 태천이 정면에 없었다.
“여기야.”
“언제?”
피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기에 더욱 당황했다.
얼빠진 대답을 하기 전에 물러서기라도 했어야지. 머뭇거렸던 그 0.1초의 낭비가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를 체감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쐐애액, 빠아악!
……?
상배는 멍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순간적으로 기억이 사라졌다. 초단기 기억상실로. 고통마저도 현실을 인지하지 못해 잠시 마취되었다.
곧 마취가 풀리고, 기억이 재생되자.
크아아아아아악!
일시 정지에서 풀린 고통이 상배의 전두엽을 강타하고, 대뇌를 미친 듯이 흔들어 댔다. 동공마저 착시를 일으키며 혼란 그 자체였다.
즉시 연유를 파악하고, 반격을 취해야 했다.
빠아악, 빠아아악!
상배의 저항을 태천은 허락하지 않았다. 손에 든 칼집으로 미친 듯이 두들겼다. 복날에 개를 패는 건 올바르지 않아도, 상배는 패도 되었다.
낙타가 멸종 위기종에 반려동물은 아니잖아.
퍼퍼퍼퍼퍼퍽!
머리를 막으면 배를, 배를 막으면 머리를!
멍청한 놈이 반응속도가 한 발짝씩 느려서 슬랩스틱코미디가 되었다. 일부러 저러기도 힘들 텐데, 절묘하게 박자가 느려서 무차별로 처맞았다.
“메르스 걸린 낙타같이 생겨서는! 넌 처음부터 맘에 안 들었어!”
태천은 그간의 설움을 칼집에 실었다. 죽이지는 않아도, 과거의 고통을 이자 쳐서 갚아 줘야 했다.
여전히 고치지 못한 그 못된 일진병을 고쳐 주고 말겠다.
극약 처방이니 달게 받아라!
하나, 과욕은 항상 선을 넘기 마련이다. 시작은 훈계조였지만,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언어폭력이 섞였다.
“널 낳은 부모님이 불쌍하다. 아니지, 너 같은 새끼를 낳은 부모도 병신이지, 그냥 다 같이 죽어 버려!”
때리다 보면 화가 풀리고 심신의 청경을 찾아야 하는데, 눈이 돌아갔다. 때릴수록 화가 나고 이성을 잃어 갔다.
“……살려 줘, 잘 못…… 크아아악!”
“잘못했으면 처맞아야지.”
상배는 커다란 착각을 했었다. 태천이 찐따는 맞지만, 무진에게 칼을 배운 후 급이 달라졌다. 예전의 모습만 보고 달려들었으니, 패가망신은 자명한 결과였다.
중견 길드도 아니고, 고만고만한 길드의 길드원 따위가 악명이긴 해도 쉐도우 길드를 건드린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지나치게 일방적인 구도가 되었다. 더 맞으면 죽을 것 같자 무진이 나섰다.
이제라도 말리는 건가?
남동천은 조금 기대했다. 곽상배가 비록 멍청한 짓을 하긴 했어도, 이쯤 했으면 화도 풀렸겠지.
어미 아비를 죽인 불구대천의 원수도 저렇게까지 모질게 패진 않는다. 어릴 땐 다들 싸우면서 크잖아.
찐따나 왕따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 가지고 이러는 건 너무했다.
“김 사원, 때릴 때 때리더라도 포션은 발라 주고 때려.”
“아! 감사합니다, 강 부장님!”
크헉!
남동천과 길드원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기대할 사람에게 기대해야 했다. 잘못 걸려도 단단히 잘못 걸렸다. 저런 소인배들에게 찍히면 답도 안 나온다.
상배는 대체 어쩌자고 저딴 인간들을 알은체한 거야. 세월도 지났겠다, 모른 척 지나갔으면 됐잖아.
‘어쩌겠어, 지 팔자인 것을!’
남동천과 길드원은 도와주겠다고 나서진 않았다. 애먼 불똥이 튀지 않기를 바랄 뿐. 모든 죄를 상배가 안고 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이 바닥의 의리는 그 정도가 최선이다. 길드원을 위해 목숨까지 걸진 않는다.
“네 조상들도 하나같이 병신들이었겠지! 그러니까 너 같은 병신이 나왔겠지!”
그래도 저건 선을 넘은 거 아닌가? 병신 같은 상배를 욕해야지, 왜 멀쩡하게 돌아가신 조상들까지 싸잡아서 욕을 하냐.
조상 때문에 욕먹는 건 봤어도, 후손 때문에 욕을 먹는 광경은 좀처럼 드물었다. 이만하면 곽상배의 조상은 민족의 배신자쯤은 되어야 했다.
꺼어어어!
거의 반송장을 만들어 놓았다. 이만하면 급 차이가 거의 두 단계 이상일 텐데. 상배는 대체 무슨 깡으로 나선 건지 이해가 되지 않을 지경이다.
“리커버리를 써 줄까?”
“아닙니다. 이젠 만족합니다.”
회복 아이템을 주겠다는 무진의 말에 남동천과 길드원들은 얼어붙었다. 죽은 놈 살려서 또 패겠다는 거 아닌가.
무진은 남동천에게 물약을 3개 주었다.
“이만하면 부족하진 않을 거야.”
“……감사합니다!”
진짜로 병 주고 물약 주었다.
한데, 물약이 중급 이상이었다. 떨떠름하긴 해도 항의하기도 어려웠다. 불구만 되지 않으면 중급 물약 한 병이면 회복할 수 있었다.
“가 봐. 다음에 보면 깎듯이 90도로 인사하고.”
“그러겠습니다.”
박격 길드는 곽상배가 회복하고 정신 차릴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당장은 사기도 많이 떨어졌고, 수습할 시간이 필요한 상태였다.
너무 충격적인 광경을 봐서 그런지 공략할 의욕도 생기지 않았다. 남동천은 이 상태가 꽤 위험하다고 판단해 공략을 잠시 멈추었다.
무진은 유사삼형제와 안개 던전의 중심을 향해 나아갔다. 앞서간 정부의 던전 공략팀의 뒤를 쫓는 셈이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안개가 짙어지는 가운데, 유사삼형제는 의문이 들었다.
“굳이 시비를 걸 필요가 있었을까?”
“아까는 미쳐서 날뛰더니, 인제 와서 연유를 묻는 거야?”
“속은 시원하지만, 시간 낭비였잖아.”
“던전 공략팀과 거리를 벌려야 해서.”
“역시 의도가 있었구나!”
“의도가 있든 말든, 흑역사를 지웠으면 된 거 아닌가.”
다른 이도 아니고 공과 사가 철저한 무진이 시간을 허투루 소비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었다. 어쩌면 던전에 들어올 때부터 문제가 터질 걸 염두에 두었을지도.
“던전 공략팀에 문제가 생긴다는 거야?”
“확실하진 않아. 다만, 가능성이 클 뿐이지.”
“하아, 살려 준 게 맞나 보네.”
“내가 이렇게나 사람의 목숨을 소중하게 여겨요.”
박격 길드의 기를 빼 놓고, 부상자를 만들어서 시간을 뺏는. 6.25를 비롯한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발목지뢰 전술과 일맥상통했다.
“차라리 정부 요원에게 말하지.”
“던전에서 위험한 일이 발생할 수 있으니 이만 물러나세요, 라고 하면 되는 거지?”
쩝!
던전의 오픈은 불규칙적이다. 언제 발생할지도 모르는데, 물러서라고 하면 순순히 물러설까? 그에 합당한 근거가 있어야 했다.
하지만 무진에겐 증거는커녕 심증만 있었다. 심증이 현실이 된다면 모를까, 설득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내 다리 내놔.
-내 팔 내놔.
-내 눈 내놔.
-내 코 내놔.
-내 입 내놔.
안개에 뒤덮인 일대에서 기이한 소리가 들렸다. 자세히 들어 보면 그냥 생각하는 대로 들리는 경향이 있었다. 마치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을 증폭하여 현실로 만드는 것처럼. 실제로 저런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서걱!
-백색 슬라임 1킬.
안개 던전의 마물, 백색 슬라임이었다. 전체적으로 슬라임과 다르지 않았지만, 색깔이 백색이었다. 카멜레온처럼 안개에 동화되어, 기습적으로 달려들면 처리가 곤란한 난이도가 있는 마물이다.
그래서 앞서 들린 말이 얼추 예상되는 것이다.
슬라임은 끈적끈적한 젤 형태의 둥그런 모양으로 얼굴과 사지가 없는 건 사실이었다.
마물 공략은 순조로웠다. 무진이 굳이 나서지 않아도 유사삼형제에겐 그리 어렵지 않았다. 기본 칼질과 스텟의 상승으로 셋이 함께라면 b급 던전도 공략 가능했다.
서로 극혐하면서도 이상하게 조합이 잘 맞는다. 이게 바로 하고 싶은 일과 잘하는 일의 차이일까? 되게 하기 싫은데, 막상 하면 잘하는 선례였다.
서걱! 서걱!
칼질 하나 배웠을 뿐이거늘, 천생 백정들처럼 잘 썰었다. 기본이 이래서 중요하다. 제아무리 빠른 속도와 현란한 기교도 기본이 받쳐 주지 못하면 속 빈 강정에 불과했다.
-거대 백색 슬라임 킬.
-던전 공략.
-2차 각성 유령던전으로 진화.
적당히 보조를 맞추며 마물을 처리하는 가운데, 던전의 보스를 공략했다는 알림이 있었다.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2차 각성으로 유령던전이 되었다. 그러자 썰어 놨던 백색 슬라임이 반투명하게 변하더니 유령으로 진화했다.
서걱, 서걱!
이제는 잘라도 잘라도 안 죽는다. 이미 죽었기에 죽지 않았다. 부관참시를 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혼을 벤다는 개념으로 칼에 마나를 집어넣어서 휘둘러.”
“우리는 아직 의념을 다룰 줄 몰라!”
“누가 의념을 담으래? 반드시 죽이겠다는 일격필살의 의지를 담으라는 거지.”
“그게 말처럼 되나!”
기본 칼질로 상대했을 때와는 난이도가 급격히 달라졌다. 마나를 담아야 하며 베겠다는 의지를 실어야 했다. 죽인다는 각오만으로 일격필살이 되지도 않는다. 말처럼 간단히 행할 수 있으면 다들 고수가 됐겠지.
“그래도 해 봐. 나중에 도움이 될 거야.”
“알았어, 해 볼게.”
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고, 최대한 무진의 충고대로 비슷하게라도 해야 했다.
‘이런 기회는 흔치 않지.’
강제긴 해도, 연무장에서 훈련할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성취를 얻을 수 있었다. 지금처럼 배우고 성장하는 시기에는 금상첨화였다. 아는 것과 해 보는 것의 차이가 그만큼 컸다.
‘박격 길드를 배후에 둔 이유가 이거구나.’
유사삼형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진이 얄미운 동생이긴 해도, 선은 분명히 지키는 녀석이란 걸. 그래서 믿고 의지할 수 있었다.
서걱! 끼요요욧!
칼에 마나와 의지를 담자 아까와는 달리 유령슬라임이 베인다. 재생하면 어쩌나 했지만, 다행히 그대로 소멸했다.
“확실히 3배는 더 힘들어!”
“조금만 방심하면 베이다 말잖아!”
“단칼에 안 죽이면 합쳐진다고!”
유령슬라임이 처치 곤란한 연유는 완전히 베지 않으면 안 죽이니만 못하다는 점에 있었다. 타격을 입었다 싶으면 다른 유령슬라임이 흡수해서 힘을 키웠다.
“너희들이 무슨 고스트 합체 로봇이냐!”
하나하나에 세심한 칼질이 필요했다. 당연히 소모되는 마나와 체력이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빠르다.
지치고 힘들 때 무진이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기는 했다. 한계까지 밀어붙이기는 해도, 죽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놀랍게도 지치면 지칠수록 자기도 모르게 체력과 마나를 비축하는 최적화를 이루었다. 본능적으로 조금이라도 소모를 줄이는 최적의 경로를 찾아갔다.
“익숙해졌으면 됐어.”
오늘은 한계까지 밀어붙이지 않았다. 무진의 손가락에서 발출된 탄지공 300발이 유령의 이마에 구멍을 내 주었다.
스르르르르!
미친!
이제까지 했던 모든 노력이 공허한 삽질처럼 보이는 건 착각이 아니었다. 저렇게 간단히 해결할 수 있다니, 격의 차이를 재차 실감했다. 인생은 원래 실전이라고 하는데, 저건 대체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무형탄지공이야. 노력하면 될지도 몰라.”
“무조건 된다고 희망이라도 줘야 하는 거 아니냐?”
“됐고, 주변에 결계를 쳤으니까 쉬고 있어.”
“너는 어쩌려고?”
“보스를 찾아야지. 그리고 이 기운을 잘 느껴 봐. 공부가 될 거야.”
무진은 유사삼형제에게 자신의 기운을 일부 나누어 주었다. 사실은 주었다기보다는 심어 놓았다는 표현이 적합했다.
자기만의 길을 가는 대종사급 아니면 정해진 길로 가는 편이 효과적이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