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자취기화(3)
“아주 그냥 속물 납셨구나.”
“아닌 척 위선 떠는 것보단 낫잖아요. 혹시, 그래 주길 바랍니까?”
“바란다면?”
“하지 않습니다.”
한 대 쥐어박고 싶어진 마제였다. 위선을 떨면 곧바로 받아 주려고 했거늘, 영악한 녀석이라 걸려들질 않는다. 자신의 머리 꼭대기에서 놀고 있었다.
연공실에 들어섰다.
마법사의 우중충한 연공실로 보면 오산이었다. 넓고, 반듯하며, 깨끗했다. 공간을 마법으로 나누어서 확장하고, 사용성도 편리했다. 도심의 원룸형 오피스텔에선 반드시 필요한 마법이었다.
“이거다.”
인벤토리에서 꺼낸 물건은 손바닥 크기의 압축된 형태의 보석이었다. 기운이 새어 나오진 않았지만, 검붉은 광채를 발하며 불길한 느낌을 주었다.
[오염된 드래곤하트의 일부]
-??????
드래곤하트는 마나 생명체로 알려진 드래곤의 총화였다. 마법사라면 누구나 바라는 영약임과 동시에 수명을 단축하는 독약이기도 하다.
인간의 몸으로 드래곤하트를 흡수하기란 말처럼 간단하지 않았다. 정제하지 않은 상태로 일부만 흡수해도 육체가 버티지 못하고 터져 버릴 수도 있었다.
드래곤하트의 등급은 만년삼왕을 넘어선다. 등급 외로 구분하는 연유가 있었다. 다만, 완전한 형태의 드래곤하트가 아니라 쪼개진 상태인 데다가 불순한 기운에 오염되었다. 핸디캡이 커서 s급으로 등급이 하락한 것이다.
일반적인 드래곤하트도 독기를 지녔는데, 오염이 되었으니 복용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그렇다고 이 귀한 드래곤하트를 버릴 수도 없으니 따지고 보면 계륵이었다.
“처리하기 곤란해서 주는 것 같은데요.”
“싫으면 말거라.”
“조건이 있나 보군요.”
“앞으로는 부르면 냉큼 달려오거라. 그리하면 내가 직접 드래곤하트를 정화해서 마력으로 변환해 주마. 정 안 되면 나의 특제 마력 정수를 내어 줄 수도 있고.”
“싫은데요.”
“내 말을 잘 따르…… 뭐?”
“싫다고요.”
“왜 싫은데?”
“먹지도 못하는 것에 욕심 부릴 필요 있나요?”
그렇긴 한데.
닥치는 대로 영약을 흡수하던 녀석이 이렇게 간단히 포기한다고?
영약 맛을 본 사람은 절대 영약을 포기하지 못한다. 그건 일종의 마약중독자와 같았다. 오염된 드래곤하트를 이용해서 요 괘씸한 녀석의 버릇을 고쳐 주려고 했더니 또다시 어긋났다.
“드래곤하트가 아깝지 않느냐?”
“정 그렇게 원하신다면 내기를 하실래요?”
“내기?”
“제가 온전히 흡수하면 묻고 트리플로 가고, 실패하면 예슬 선배의 종이라도 되겠습니다.”
“네놈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는 것이냐?”
“마나의 맹세를 하면 됩니까?”
“함부로 말하지 말거라!”
“옆에서 제 마도를 확인할 기횝니다.”
마제는 순간 뜨끔했다. 드래곤하트를 건네주면서 무진의 마도를 확인해 볼 요량이었다. 슬이와 마법 대결을 벌여 이겼다는 말이 선뜻 믿어지지 않았다.
어떤 수를 썼는지, 어떤 의도를 가졌는지 마나회로를 살핀다면 알 수 있었다. 본인 딴에는 감춘다고 해도, 대마법사의 눈을 바로 옆에서 피할 순 없었다.
“마나의 맹세는 됐으니, 흡수해 보거라. 실패한다고 해도 바로 해독해 주마.”
“역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10대 초인이자, 마도의 제왕다우십니다.”
“아부는 됐으니, 똑바로나 하거라. 아무리 나라도 네 능력이 따라 주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니까.”
“아무렴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무진은 마제를 찾아온 순간부터 선물을 받고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의 마도는 진짜배기였다. 그 앞에서 마도를 얼마나 숨길 수 있는지부터 테스트했다.
‘내공으로 마도를 감추는 것도 가능하단 건데.’
마나회로를 돌리는 과정에서도 가능한지는 아직 미지수다. 어디까지 가능한지 한계를 파악하기 위해 마나의 맹세를 거론하며 마제를 압박했다. 덤으로 그가 어떤 성향인지도 알 수 있었다.
“그럼 갑니다.”
“그런데 그 자센 뭐냐?”
“남자는 하체. 스쿼트가 가장 안정적이죠.”
“보통은 가부좌 아니냐?”
“그건 보통이고요.”
마법사도 되도록 결가부좌에서 편하게 변형을 하여 마나회로를 돌린다. 그 자세가 마나회로나 내공심법을 운용하는 데 최적화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간혹, 특이한 자세를 취하는 경우가 있어도, 이 녀석처럼 운동하면서 마나회로를 돌리진 않는다.
훅! 훅!
스쿼트, 런지를 취한 후 드래곤하트를 날름 삼켰다.
주의하라고 경고하려던 마제는 말문이 막혔다. 드래곤하트를 삼키자마자 전해지는 무진의 순도 높은 마력에 기겁했다.
‘이게 무슨?’
드래곤하트는 보석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마나의 순수 결정체다. 흡수하기 위해서는 결정체를 녹이고 정제하여 마력정수로 제조한 후에나 가능했다.
그걸 날름 삼켜 버렸으니, 욕심이 과하거나 자신을 과신한 행위였다. 직속 제자나, 길드의 마법사였다면 경을 쳤을 것이다.
‘오늘의 실수를 교훈으로 삼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 봐야 맛을 안다면, 호되게 당해 봐야 다음에는 정신을 차리기 마련이다.
아마 방금 한 행위를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테지. 그 고통, 당해 보지 않으면 모른다.
젊은 시절 마제도 아끼면 똥 된다는 격언을 새겨 영약이나 정수가 있으면 일단 먹고 봤었다. 그리고 아무거나 먹으면 정말 생사를 오갈 수 있다는 걸 뼈저리게 체감한 적이 있었다.
‘그날 이후로 대마법사로서 각성하긴 했지만.’
정말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악몽 같은 실수였었다.
이젠 꺼진 불도 다시 보고,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영약도 조심해서 먹었다. 아직 살날이 구만리거늘, 슬이가 시집을…… 가야 하는구나. 안 가면 안 되나?
어이쿠, 상념이 길었구나.
어디, 얼마나 죽을 맛인지 볼까?
헉!
헛바람이 나올 뻔했다.
아니, 왜 평온해?
죽을 맛이기는커녕 열반에 이른 득도한 고승처럼 대자대비한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결가부좌가 아닌 스쿼트라 이상하긴 해도, 깨달음을 얻어 단계를 넘어서는 탈각의 증상이었다.
“6계식이었느냐?”
“그런데요.”
“……말을 왜 해! 그러다 마나역류라도 하면 어쩌려고?!!”
“괜찮아요.”
마법도 무공처럼 마나를 회전시키는 과정은 단순하지 않았다. 그 순간만큼은 집중해야 하기에 입도 뻥끗해선 안 된다. 하물며 단순한 마나회전이 아닌 단계를 뛰어넘는 과정이었다. 그 와중에 똘망똘망한 눈으로 자세까지 런지로 바꿔 가며 마나를 돌리고 있었다.
“대체 누가 이렇게 가르친 거야?”
“누구긴요, 사부님이지.”
“아, 그렇지.”
망할, 수긍이 되잖아.
권왕이라면 정말로 이렇게 할 것 같았다.
사실 워낙 막강한 화력에 가려져서 그렇지, 권왕의 마도는 똥망이다. 일례로 상위 화염 마법은 아무렇지 않게 구사하면서 기초 마법은 초짜였다.
엉망진창인 사부 밑에서 제대로 된 마법사가 나오길 기대하는 것 자체 어불성설이거늘.
“그런데 왜?”
마제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왜 이놈이 6계식이냐고! 5계식도 믿어지지 않는 일이거늘.
권왕보다 못한 현실에 마제는 자괴감이 밀려왔다. 기본도 익히지 않은 권왕이 이토록 뛰어난 마도신성을 가르쳤다니 말도 안 되는 이적이었다.
‘정순한데다가, 안정적이고, 탄탄하기까지!’
권왕의 부족한 기본을 고려하면, 무진은 이단의 돌연변이 괴생명체가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상식적인 선을 완연히 벗어났다.
어?
놀람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보고서도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 이어졌다. 방금 분명 6계식이었는데, 탈각을 이룬 7계식이 되었다.
“이게 대체 무슨?”
“드래곤하트의 오염 물질을 제거하니, 드래곤의 잔류사념이 넘어왔어요. 확실히 마도의 조종답네요.”
“그렇지, 마법은 마족과 드래곤에게서 유래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기는 개뿔! 아니, 그게 말이 돼?”
“좋은 걸 받았습니다.”
잔류사념이 남으려면 보통 드래곤하트가 온전해야 했다. 온전하지 않는데도 남아 있다면 특수한 경우다.
“……고룡급!”
“다음 단계로 가겠습니다.”
“뭐?”
실시간으로 마법의 단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6계식과 7계식은 한 단계의 차이지만, 그 갭은 간단히 메울 만큼 가볍지 않았다. 평생 마도를 연구해도 닿지 못하는 예가 부지기수였다.
짜증 나게도 지금 전대미문의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잠깐, 너무 위험해. 이쯤에서 그만하거라!”
“아직 마나의 양이 많습니다.”
어림도 없지.
원래 경지가 7계식에서 8계식 사이다. 지금부터가 중요했다. 단계를 조종해 가면서 격을 이루는 데 중점을 두었다. 쌓아 놓은 마력을 깨달음과 연계하여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완전한 8계식에서 9계식 초반을 노렸다.
우우우우우웅!
무진에게서 엄청난 마력이 발산되었다. 생도 수준을 아득히 넘어섰다. 그럼에도 대마법사의 경지는 가볍지 않은 영역이었다.
곧 마력의 부족을 느끼게 되었다.
마력이 필요하나, 무진은 아쉽지 않았다. 바로 옆에 오래가는 배터리…… 대마법사가 있지 않은가.
“마력이 부족합니다. 어서!”
“이 미친놈이!”
“아시지 않습니까, 9계식에 이르려면 어림도 없습니다!”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야?”
“깨달음이 언제 또 올지 모르는데, 하필 이때 와서는. 하늘이 원망스럽습니다.”
“이 망할 놈이!”
눈 뜨고 코 베인다고 했던가? 대놓고 삥을 뜯기고 있었다. 그런데 안 주기도 애매했다. 믿기 힘들지만, 정말로 대마법사의 경지에 발을 들이려고 하고 있었다.
그러다 넘지 못하고 폭주라도 하는 날엔, 후배 마법사를 질투한 대마법사로 낙인이 찍히지 않으면 다행이다.
-마제표 특제 마력정수
이건 생명이 위급할 때나 대적을 만날 때 마시려고 만들어 둔 건데. 이걸 만들려고 들어간 재료, 비용, 노력을 상기하면 주고 싶지 않았다.
덜덜덜!
수전증도 아닌데, 들고 있는 손이 다 떨린다.
휙!
손이 눈보다 빠르네.
꿀꺽, 꿀꺽!
나도 한 모금만! 다 마시지 말거라!
역시 아끼면 똥 되는구나!
마나회전이나 심법은 마라톤과 같았다. 지친다고 멈출 수도, 돌이킬 수도 없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전력을 다해야 했다. 다만, 도중에 에너지와 수분을 보충할 수는 있어야 한다.
마나를 회전시키면 열이 발생하고, 식히기 위해서는 수분이 필요하다. 마력정수의 차가운 기운이 식도를 타고 들어와 달구어진 마력을 식히는 윤활유 역할을 했다.
이어서 마력 총량이 늘어나면서 마력계수를 자극한다. 단계를 높이는 저장 창고와 통로를 넓히는 작업이었다. 이미 가득 찬 공간을 비우고, 채우고, 확장하는 일은 난이도가 높았다.
조금만 잘못해도 파격이 일어나고, 무너져 내릴 수 있었다. 공든 탑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지지 않으려면 토대를 단단히 해야 했다.
“마력이 부족합니다. 이대로 고갈되면 다 된 밥에 재를 뿌리게 됩니다. 어째서 나에게 이런 시련이. 하늘이 또 원망스럽습니다.”
“그냥 달라고 해라!”
사족은!
왜 연공실로 오자고 했을까? 마제의 후회는 이미 늦고 말았다. 마도를 배우는 구도자로서 외면할 수 없는 단계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