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 수확의 계절(1)
무진의 창황가 방문은 조용히 이루어지긴 했다. 방과 후 냅다 싣고 창황가로 들어갔으니까.
하나, 창황이 공표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무진이 창황가를 찾았다. 세간의 이목이 쏠려 감추기 어려웠다.
무인은 뒤를 밟히는 걸 극도로 경계한다. 잘못 따라다녔다간 위험할 수도 있었다. 추적은 하지 않는 편이 이로우나, 파파라치들은 돈을 위해서라면 위험도 마다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특종을 얻어 내려고 혈안이었다.
하물며 창황의 공표는 다른 가문과 길드에게도 위협이 되었다. 사방에 눈이 있으니 무진의 창황가 방문은 삽시간에 널리 퍼졌다.
-무사히 나오긴 했네.
-무사하긴 어디가? 사진을 봐, 험한 꼴 당한 것 같아.
-잘난 체하더니, 임자 제대로 만났네.
-명색이 칠대 가문의 창황가라며, 대놓고 애를 갈구는 게 잘하는 짓이냐?
-충고하는 선에서 끝날 줄 알았지, 저렇게 될 줄 알았나.
-이건 좀 아니다. 신입 생도가 건방 좀 떨었다고 저렇게까지 하다니. 우리나라가 법치국가가 맞는 건가?
-겉으론 넝마가 된 것 같아도, 몸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니잖아. 대련을 했을 수도 있지.
-대련이 끝나면 옷이라도 새 걸로 주든가, 최소한 치료는 해 줘야지. 사람을 불러 놓고 저 꼴로 보내는 건 무슨 경우야!
창황가를 찾은 무진이 곤욕을 겪을 수도 있다고는 봤지만, 실제로 험한 꼴을 당하고 내쳐진 채 쫓겨날 줄은 아무도 예상을 못 했다.
무진이 창황가에 굴욕을 선사하긴 했으나, 경위를 따져 보면 생도 간의 정당한 결투에 지나지 않았다. 창황가를 언급한 것도 아니고, 와전되었음을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설령 언행이 지나쳤다 한들, 가문에 초대한 손님을 저런 식으로 대하다니 창황가의 대응이 과했다는 분위기였다.
이쯤 되면 문제를 제기해야 마땅했다.
그런데 권왕가도, 무진도 성토하지 않았다. 창황가의 무도한 행위를 규탄해도 부족한 판국에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당사자는 조용한데, 여론이 시끄럽게 설왕설래했다. 하긴 내 일도 아니고, 남의 일이니, 손가락이 근질근질한 것이다.
-권왕가가 나설 줄 알았는데, 이건 좀 아니다.
-권왕이 없으니까, 권왕가도 쭉정이나 다름이 없네.
-어~~~! 권왕도 없고~~~! 지수도 없고~~~! 외총관은 폐관수련 하고~~~!
-권왕에 가려져 있을 뿐, 가문의 주력이 다 빠지긴 했지.
-그래도 그렇지, 힘들다고 제자를 방치하는 건 아니지 않나.
-실드 치긴 어렵지만, 권왕가로서도 껄끄러운 건 사실이야. 지금도 봐. 창황은 대외적인 시선 따윈 이제 안중에도 두지 않잖아.
-이렇게 되니까, 좀 불쌍한데.
-불쌍하긴, 자기만 잘난 줄 알고 설치니까 그런 꼴을 당하지. 아마 세상이 자기 위주로 돌아가는 줄 알았을 거야.
-거만 좀 떨었다고 피해 주는 것도 아니고, 걔가 공인이냐? 그냥 생도잖아.
-그 정도면 거의 반공인이지, 자기 행실에 책임을 져야 할 때야.
-너희들 학생 때를 돌이켜 봐, 책임을 졌나?
-조금 건방지긴 했어도, 생폭을 근절하고 있잖아.
-그냥 싫다고 해라, 뭘 해도 싫은 거면서.
권왕가에 권왕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이렇게나 컸다.
그러는 와중 무진이 무극 길드의 마제에게 손을 내밀었단 소문이 돌았다. 명예 사부도, 사부이니만큼 마제가 나서서 중재할 수도 있었다. 그런 예상과 달리 무극 길드는 잠잠했다.
-사람 일 모른다더니,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다 가졌던 것 같은데. 한순간에 손절당하고 외톨이가 되어 버렸네.
-권왕가와 무극 길드가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어. 이상과 현실이 다르긴 해도, 최소한 내민 손을 잡아는 줬어야지.
-이제는 좀 불쌍하다.
-누가 누굴 불쌍하다고 하냐. 스폰이 끊기긴 했어도 갠 여전히 성운맹의 의협단주라고. 너희들 앞날이나 걱정해!
-자기중심적인 녀석인데, 걱정해 주면 좋아할 것 같냐. 오히려 같잖다고 비웃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여기는 다들 점쟁이들이네. 본 적도 없으면서 자기 멋대로 판단하고.
무진에 대한 아카데미의 분위기는 나빠져만 갔다. 여전히 성운맹 의협단주로서 기강을 확립하고 있지만, 전과 같지는 않았다.
불과 며칠 만에 모두의 관심을 받았던 걸 상기하면, 세상의 인심이 얼마나 냉혹한지를 알 수 있었다. 이득에 따라서 얼마든지 등을 돌리는 현실이었다.
그런 현실이 누군가에게는 호재로 다가왔다.
반성운맹을 외치는 생도들은 무진의 아성에 균열이 가자 때를 놓치지 않았다. 성운맹에 가려졌던 칠대 가문의 생도들도 서서히 족쇄를 끊어 내고 반기를 내비쳤다.
“무진아, 이러다가 무너지는 거 아니냐?”
“혼자라도 도망치게?”
“누가 그렇대, 굳이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나갈 필욘 없잖아.”
“명분 없는 대의는 모래 위에 지어진 성일 뿐이야.”
“그 모래가 보통 모래냐!”
태수는 작금의 위태로운 구도를 무진이 의도했다고 판단했다. 감추어진 실력만 드러내도 어수선한 흐름은 단번에 정리하고도 남는다. 솔직히 아카데미 생도 전체가 덤빈들, 무진을 이길 것 같진 않았다.
“대체 뭘 노리고 있는 거야?”
“이제라도 옥석을 가려야지.”
“또 생쇼를 하겠다는 거네.”
“선배, 나의 도전을 받아. 인지도를 획기적으로 높일 기회야.”
연기에 맛들렸나?
결투장 주변으로 생도들이 바글거렸다. 이는 당연했다. 입지가 위태롭게 변한 무진이 맹주에게 결투를 신청했기 때문이다. 성운맹주와 임시긴 해도 의협단주는 1-3학년 통틀어 세 손가락 안에 들기도 하고.
하아!
태수는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정말 미치겠다. 의도가 분명히 있는데, 알지도 못하고 이용만 당하고 있었다.
내가 호구냐고 반기를 들어야 하거늘! 거절은커녕 판을 깔아 주고 있었다. 이미 맹주로서의 위엄을 아카데미에 선포한 지 오래였다.
‘내가 널빤지였구나!’
더욱이 슬슬 보여 주어야 할 때가 되었다. 정우철을 우연으로 이겼다는 말이 나오기까지 했다. 성운맹을 흔드는 불순 세력의 이간질을 잠재우려면 실력을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 끝까지 가 보자!’
태수로선 선택의 여지 따윈 애초에 없었다. 무진이 하자는 대로 해야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선배 체면에 후배에게 끌려다닌다고, 그러다 나중에 버림당하면 억울하지 않으냐고? 그렇게 물어볼 수도 있겠지.
‘그럴 녀석이 아니거든.’
왜냐고?
우리의 건방진 후배께선 성운 그룹을 굉장히 하찮게 여기거든. 설마 그러겠냐는 의문은 소용없다. 이 사실을 할아버지와 식구들이 알면 어떤 기분일까? 상상할수록 웃기는 진실이 아닐 수 없었다.
레디, 액션!
연기가 시작되었다.
상념을 멈추고, 어울렸다.
나는 주인공이다.
“선배, 그 자리를 내어 줘야겠어.”
“아직 네겐 벅차.”
“그건 선배의 자만일 뿐이야.”
“자만인지, 자신감인지 확인해 보려무나.”
시작을 위한 그럴듯한 멘트였다.
무진과 태수가 결투에 들어갔다. 시작부터 서로의 전력을 숨기지 않고 발산했다. 만만치 않을 전력이 결투장 안을 위협하고 있었다.
퍼퍼퍼펑, 쿠아아앙!
접근전을 위주로 하는 무진과 태수이기에 권각술에서 불을 뿜는다. 격돌이 이루어질 때마다 결투장이 충격파로 흔들렸다.
“시범인 줄 알았는데, 아닌가?”
“대결 한번 살벌하네!”
“단주에 이어 맹주까지 노리는 거야?”
“친선 대결은 개뿔.”
“탐욕의 화신이구먼!”
무진은 사전에 맹주직을 건 대결이 아닌, 기량을 겨루는 결투로 포장했었다. 맹주라고 하여 꼭 단주보다 강하지 않아도 되긴 하니.
막상 펼쳐진 대결의 양상은 기량을 겨룬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살벌했다. 생사결의 치열한 혈투가 펼쳐졌다. 은유적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피가 튀고 있었다. 언제든 심각한 유혈 사태로 번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방금 봤어, 피가 튀었다가 아무는 거?”
“초속재생보다 더 빠른데.”
“피 튀기고, 아물기를 반복하네.”
“이러다 불상사가 발생하는 거 아냐!”
구경하던 생도들은 한편으로 감탄했다.
무진과 태수의 전투가 예상보다 화끈한 데다가 놀라운 수준의 무위였다. 정우철을 이겼다는 사실에 취해 맹주의 위상을 드높이긴 했어도, 그 이후의 행보에 의문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후루꾸가 아니었네!”
“우리말을 써야지. 뽀록이란 좋은 말도 있고.”
“인터넷 은어가 우리말이냐!”
“요행은 그 맛이 안 살잖아!”
특히 3학년 생도들은 태수의 움직임을 눈여겨보았다. 정우철을 이길 때는 순식간에 끝이 나서 보고 말 것도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태수의 진짜 실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보고도 믿어지지 않네.”
“확실히 정우철보다 한 수 위야.”
“금강불괴의 완성도가 몰라보게 달라졌어.”
“권기를 맨몸으로 막은 건가?”
태수의 실력에 의문을 품었던 생도들의 물음표에 확신을 새겨 준 결투였다. 무엇보다 전투에 무척이나 익숙했다. 무인이나 길드에 소속된 생도가 아닌 재벌의 2세나 3세는 보통 스텟은 높아도 전투 수행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예가 흔하다. 압도적인 역량으로 찍어 누를 줄만 알지, 바닥을 드러낸 전투에선 의외로 꼴불견을 보였었다.
“평소에 대체 무슨 훈련을 하는 거야?”
“재벌 후계의 훈련도 보통이 아니구나!”
“저건 훈련만으로 되지 않을 텐데.”
“방금 봤냐? 살을 주고 뼈를 깎으려고 했어!”
태수를 비롯한 재벌가의 후예를 온실 속의 화초로 여겼던 생도들은 혀를 내둘렀다. 눈앞에서 피가 튀는데도 눈도 깜빡이지 않고 받아치는 걸 보면 소름을 돋게 했다.
“태수도 태수지만, 쟤도 여간내기가 아니긴 해.”
“안됐다고 하는데, 대체 뭐가 안됐다는 거야?”
“안되긴, 지금처럼만 해도 서로 데려가려고 하겠다.”
“권왕가가 잘못 판단한 거 아닌가?”
“권왕가는 지금 제 코가 석 자라고.”
눈이 따르지 못할 스피드와 힘의 파상 공세였다. 속도가 빠른데도 파워의 극의를 체감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굽히지 않는 강 대 강의 일전이었다.
꽈아앙!
최후의 일전을 알리듯, 권형이 폭발을 일으켜 시야를 가렸다. 발판이었던 바닥이 부서진 후 무진과 태수는 거리를 벌렸다.
희비가 교차했다.
“졌습니다.”
“당분간은 자중하도록 해.”
예상대로 태수의 승리로 끝이 났다. 다만, 과정이 워낙 생동감이 넘치고, 사실적이라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태수는 전력을 기울였었다.
‘역시 안 되네.’
패왕의 거력발산과 [역발산기개세]를 극한으로 펼쳤음에도 겉담배처럼 겉패배에 지나지 않았다.
‘한 방만!’
제발, 때려 보자.
***
무진이 패배하고, 일주일이 흘렀다.
성운맹은 일주일 전의 분위기와는 달리 건재함을 과시했다. 맹주가 직접 성운맹을 관리하면서 흔들렸던 체계가 굳건해졌다. 반면, 무진은 의협단주임에도 당분간 일선에 나서지 않았다.
결투할 때 내상을 입었다고 했으나, 성운맹에서 배제된 게 아니냐는 말이 돌았다. 당시 결투를 지켜본 생도들로선 납득할 만했다. 맹주와 단주의 기량 대결이라기엔 목숨을 건 혈투였었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무진은 집중 훈련을 위해서 당분간 쉰다고 했다. 아카데미 수업을 듣고, 곧장 집으로 가서 두문불출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일주일이 흘렀고, 아카데미를 시끄럽게 했던 무진에 대한 소문도 잠잠해졌다. 끓어오른 양은 냄비처럼 빠르게 식은 감도 없지 않았다. 말실수한 개인 방송 bj의 심정이 이럴까? 존재감이 사라진다는 건, 관종에겐 뼈아픈 고통이었다.
성운맹의 핵심 수뇌부도 무진의 집을 찾지 않게 되었다.
의도했다기보다는 맹주의 명이 우선이었다. 성운맹의 불완전한 기강을 세우기 위해서 핵심 수뇌부가 나서야 했기 때문이다. 시간상으로 무진을 찾기가 어려워졌다.
손절당한 무진의 집을 장구용 선배가 종종 찾았다.
장구용 선배는 돌아가는 아카데미의 분위기가 맘에 들지 않는 듯 평소에도 툴툴거리고 있었다. 무진이 만들어 놓은 성운맹을 날로 먹었다는 비판도 서슴없이 했었다.
“밥은?”
“괜찮습니다.”
“말 놓으라니까, 선배보다 내가 불편해.”
“……알았어.”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밥부터 먹자고.”
여전히 말 놓기가 어색한 구용 선배였다. 요리를 차리는데도 식탁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아무거라도 도와줄 일을 찾으려고 했다. 이제는 많이 고쳐진 줄 알았는데, 정서 불안과 어색함이 남아 있었다. 내성적인 태음인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식사 후, 차를 마셨다.
후륵!
무진은 구용 선배의 상태를 세심하게 살폈다. 혹여 문제가 되지 않을까, 염려한 부분이 있었다. 달라지거나, 영향을 미쳤다면 책임을 져야 했다.
‘다행이다.’
구용 선배를 확인한 후, 문자를 보냈다. 그간 준비해 온 일을 망치지 않으려면 시간을 줘선 곤란하다. 안심하고 있을 때, 단숨에 끝을 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