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 성장(1)
우여곡절이 많은 해다. 10년 동안 일어난 사건보다 올해가 더 파란만장했다. 마인이 등장하지 않나, 가문 간의 유혈 사태가 있지 않나, 교관이 암중 세력과 결탁하지 않나.
자칫하면 큰 화를 불러올 사건들이었음에도, 의외로 무난하게 지나갔다. 마인은 제거되었고, 가문 간의 다툼도 잠잠해졌고, 암중 세력과 결탁한 교관도 찾아냈다.
여론이 예년보다 시끄럽고, 갑론을박은 많았으나 전체적으로 따지면 오히려 좋아졌다. 아카데미가 자발적으로 생폭을 방지하면서 덩달아 학폭에 대한 인식도 달라졌다.
간혹, 지나치게 극단적이라는 반론이 있었으나 가해자를 옹호한다는 비판만 받았다.
교류전은 다사다난한 올해의 방점을 찍을 마지막 행사였다. 대형 사건들을 감안하면 교류전을 취소해도 이상하지 않았으나, 예정대로 진행하게 되었다.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지만, 한중일의 교류전은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상징이었다. 국가의 위상이 달린 만큼, 교류전을 취소했을 때의 파장을 고려했다.
-올해만 해도 터진 사건들이 심상치 않은데 이대로 해도 되나?
-그래서 교류전을 취소하라고? 일본하고 중국이 참 좋아하겠다.
-그러다 교류전에서 사건이 터지면 어쩌려고? 뒷감당은 되냐?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냐? 사건이 터지지 않도록 안전에 만전을 기하면 되는 거잖아.
-취소하면 시일도 빠듯하고 너무 늦어. 그러면 걔들이 우리 사정 봐주면서 이해하고 넘어갈까? 난 아니라고 보는데.
-우리나 걔들이나 똑같지. 물어뜯기 좋아하는 본성 어디 안 가지 않나.
정부 입장에선 안전이 중요하지만, 여론도 무시하기 어려웠다. 당장 내년에 치러질 선거를 고려하면 교류전을 무사히 치러야 했다. 가장 큰 이유는 교류전에 대한 자신감이 컸다. 1학년이 주축이 되었지만, 돌아온 권후에 대한 기대감이 높았다.
-학년은 중요하지 않아, 우리에겐 권후가 있다 이거야.
-이번 기회에 짱깨와 쪽발이의 기세를 꺾어 보자!
-야구와 축구가 사라져서 다행이지, 솔직히 그때 열 받아 뒤지는 줄 알았다.
-축구는 짱깨도 만만치 않아! 걔들 노발개발이잖아.
-대체 몇 년 만이야, 이번에야말로 우승해 보자! 나 권후한테 전 재산 올인했다!
-우리가 벼르는 만큼 중국과 일본도 만만치 않아. 다들 예전과 다르다고 해.
-권후만이 아니잖아, 생도들의 기량 자체가 높아졌어.
1학년이 3학년을 이기는 하극상에도, 전체적인 기량 자체는 상향된 것이다. 특히 생폭이 근절되면서 잠재력을 억압받았던 생도들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짧은 기간임에도 생도들 간에 자극제가 되어 시너지 효과를 나았다.
-이게 다 무진이 때문이다.
-어, 무진충 또 등장했네.
-무진 가라사대, 내가 있기에 생폭이 근절되었도다. 반박 시 너희들이 틀림.
-씨발, 존나 짜증 나는데 인과가 딱딱 맞기는 해.
-성운맹주와 권후가 상징이긴 해도, 실제적으로 성운맹을 이끌었던 건 무진이잖아.
-그새 잊은 거야, 잘난 체하다가 고꾸라진 걸!
-잘난 걸 잘났다고 하지, 그 나이 때에 겸손해야 하냐. 우리나라는 이게 문제야. 자신감을 겸손하지 못하다고 찍어 누른다니까. 이래서야 독창적인 사고가 가능해!
-자신감이라기보다는 완장질에 가깝지 않나. 그러니까 위기에 처했을 때 아무도 돕지를 않지.
-그래서 잘한 일까지 매도해서 기를 죽이냐? 얘가 사람을 죽였어, 법을 위반했어? 따지고 보면 규칙대로 행동한 거잖아.
무진에 대한 호불호는 반반으로 나뉘었다. 그렇더라도 면학 분위기를 조성하여 생도들의 기량을 끌어올린 공적은 인정했다. 교류전에서 성과를 올린다면 등에 날개를 다는 격이었다.
낙동강 오리 알 신세에서 벗어났으니 이제부터는 날뛰리라 예상했었다.
경악스럽게도 모두의 예상과 달리 무진은 한발 물러서서 조용히 다녔다.
세상이 만만한 줄 알고 나대다가 호되게 당한 후 정신 차렸다는 말이 돌았다.
성운맹의 생폭 방지 캠페인은 계속되었다.
다만, 운영 주체가 달라졌다.
의협단주로 복귀한 지수를 필두로 운영되리라 보았으나 완전히 빗나갔다. 상원을 의협단의 수석 조장으로 임명하여 권한을 주었다.
아니, 왜?
모두를 의문에 빠지게 하는 선택이었다. 이럴 거면 재수 없기는 해도 무진을 앞세우는 편이 나았다.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정이기는 했다.
하나, 일전 의협단주와 맹주의 대결을 돌이켜 보면 이해가 되었다. 맹주의 승리로 끝나긴 했지만, 앙금이 남아 있을 수 있었다.
부단주로 강등된 무진과 맹주의 알력 다툼을 의협단주인 지수가 묵인한 것이다. 때마침 지수는 현재 가문의 일로 성운맹에 집중하기 어렵다고 했다. 일련의 사정이 맞물려서 의혹에 신빙성을 더해 주었다.
그렇더라도 상원의 고속 승진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었다.
걔가 뭔데?
상원이 의협단의 수뇌부긴 해도, 지수와 무진처럼 압도적인 성과를 올리진 못했다. 성운맹의 입지가 탄탄해지고, 영향력이 커질수록 직위에 관심이 커질 수밖에 없다.
개나 소나, 아무나 시키면 쓰나!
수석 조장이면 맹주, 단주, 부단주 다음이었다. 잘만 하면 다음 대 맹주를 노릴 수도 있거늘, 왜 이놈이지?
혜진이는? 유정이는?
설왕설래가 많은 연유에는 생김새도 한몫했다. 상원의 실력과는 별개로 초딩 같은 이미지에 신뢰가 가지 않았다. 일례로 초딩이 고딩의 복장 단속을 한다고 상상해 봐라.
-대로에 침을 뱉지 않습니다.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버립니다.
-생도는 담배를 피우지 않습니다.
-수업 시간에 늦지 않도록 합니다.
-규정에 어긋난 복장은 곤란합니다.
의협단이 늘 해 왔던 일을 상원도 했었다.
규정을 위반한 생도는 편치 않은 띠꺼운 표정을 지었다. 물론, 의협단의 행사에 대놓고 반기를 들진 않았다. 성운맹과 척지면 여러모로 곤란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네가 그렇게 실력이 좋다며.
-수석 조장의 기량 좀 보자.
-우리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이기겠지.
-결투장으로 올라와.
상원에게 하루에도 몇 차례씩 결투 신청이 들어왔다. 1학년이라 선배의 결투 신청은 거절할 수 있으나, 마냥 거절하기에는 의협단의 수석 조장이란 타이틀이 걸렸다.
상원은 결투를 받아들여야 했다.
-보기보다 강한데.
-쥐새끼처럼 잘도 피한다.
-아슬아슬하지만, 또 지질 않아.
-4계식이면 제법이지 않나.
-그래도 단주와 부단주와는 비교된다.
-언제까지 버틸지 궁금하긴 해.
상원은 비기는 한이 있더라도 패하진 않았다. 비긴 상대도 3학년이라서 낙담할 필욘 없었다. 1, 2학년에서는 10할의 승률을 자랑했다.
상원이 필사적일수록 무진은 한가로웠다. 은인자중하며 수업에서도 튀지 않았다. 기가 한풀 죽었다는 세간의 평가가 있었지만, 아카데미의 가을 정취를 만끽했다.
피골이 상접한 상원이 앓는 소리를 했다.
“무진아, 이러다 나 죽는 거 아닐까?”
“부조 넉넉히 할게.”
“말이 그렇다는 거지, 이건 좀 너무하잖아! 내가 동네북도 아니고.”
“힘들면 4인방에게 양보해.”
초췌한 얼굴의 상원은 입맛이 썼다. 의협단원일 때도 사방에서 도전자들이 넘쳤는데, 수석 조장이 되니까 하루가 멀다고 결투장이 날아왔다.
피 말리는 결투의 연속이었고, 이기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다. 여유가 넘치다 못해 한가로운 무진과는 대조적이었다.
남은 하루하루가 전쟁인데, 위로는 못 해 줄망정.
“힘들면 우리한테 양보해도 된다.”
“우리가 너보다는 잘하겠지.”
“솔직히 너보다 못하면 인간 아니지.”
“너한테 수석 조장은 안 어울려.”
때는 이때다 싶은 4인방이 히죽이며, 상원의 약을 바짝 올렸다. 편하게 살고 싶으면 양보하면 그만인데, 저 얄미운 면상들을 보고 있자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딴 소린 날 이기고서 해!”
“4 대 1 콜?”
“치사하게 뭔 개소리야?”
“우린 하나거든.”
“이것들이 자웅동체냐!”
상원은 1 대 1이라면 4인방을 이길 수 있었다. 그러나 4 대 1이 되면 필패였다. 솔직히 2 대 1도 버겁다. 4 대 1이면 절대 못 이긴다. 단순히 숫자만 늘었다고 보면 곤란하다. 4인방의 4인 합격은 혜진이와 유정이도 승부를 장담하지 못한다.
‘얘들은 언제 이렇게 강해졌지?’
처음 봤을 때와는 상전벽해였다. 각자 떨어져 놓고 보면 부족해 보이는데, 둘이 됐을 때, 셋이 됐을 때, 넷이 됐을 때 아예 다른 녀석들이 된다.
서로의 불완전함이 메꿔지면서 시너지 효과를 보이자 상당히 까다로웠다. 결투가 다인(多人)이 아닌 1 대 1이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낭패를 볼 생도투성이다.
무진은 선의의 경쟁을 선호했다. 친구라면 응당 서로의 뒤통수를 노릴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발전을 하지, 서로 좋은 말만 하면 그 나물에 그 밥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양보할래?”
“누가 양보한대!”
상원은 즉각 대답했다. 양보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하려면 진작에 했어야지, 승진을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었다.
‘설마 둘 다 안 할 줄이야!’
최소한 유정이에게 잘 보이려면 직급이라도 높아야 할 것 같아서 덥석 받았다. 단원과 조장의 차이가 크진 않지만,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데 무진과 지수가 일선에서 한발 물러섰다. 자연스럽게 그다음 차례인 수석 조장이 의협단을 맡게 되었다. 대외적으론 맹주가 직접 꽂아 넣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상은 둘 다 귀찮아서 하지 않은 것이다.
‘사실을 알면 다들 놀라 자빠지겠지.’
성운맹과 의협단은 거쳐 가는 자리에 불과한 듯, 무진과 지수는 안중에도 두지 않고 있었다. 워낙 큰물에서 노니 성에 차지 않을 수도 있지만, 따지고 보면 그렇지도 않다.
성운맹은 생폭 방지를 기반으로 가문과 재벌의 후원을 받는다. 생도가 만든 친목회라고 하기에는 영향력이 막강하다. 그 모든 인프라를 만들어 놓은 당사자가 정작 미련을 두지 않으니 아이러니할 수밖에.
설령 알려진다고 해도 미담밖에 나오지 않을 거다.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초탈함으로 포장되겠지.
무진이라면 충분히 그리하고도 남는다.
‘그 고생을 하고 이제 와서 싫다고 할 수도 없잖아.’
맹주 선배의 공표로 감투를 썼고, 부모님도 좋아하셨다. 돌이키기에는 너무 멀리 온 것이다. 수석 조장을 달아 주겠다고 할 때 눈치를 챘으면 모를까.
‘대체 몇 수 앞을 내다보는 거야?’
상원은 무진의 심계에 소름이 돋았다. 자신에게 쏠리는 여론을 어떤 식으로 조절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이게 말이 쉽지, 일반 생도가 할 수 있는 일인가?
‘그런데 나만 독박을 쓰잖아!’
비기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패하면 안 된다.
상원은 날마다 살얼음판이었다.
다크서클이 턱과 마주한 상원을 보고도 무진은 미안해하지 않았다. 상원이 원하는 대로 해 주었기 때문이다.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윈윈 전략이라 더더욱 좋다.
“강해지고 싶다며?”
“그렇긴 하지.”
“맞고 싶지 않다며?”
“그랬지.”
“그러면 답 나왔네.”
무진과의 특훈은 자의가 아닌 타의, 폭력, 강압, 회복이었다. 상원은 훈련에 들어갈 때마다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다.
처맞고, 집에 가서 끙끙 앓고. 골병들어도 이상하진 않았지만, 빌어먹게도 성과는 좋았다. 매 앞에 장사가 없다고 전투력이 늘었다.
그때와 비교하면 특훈 일정을 현저히 줄였다. 그런데 한 줌의 여유는커녕 휴전선 경계 근무처럼 수석 조장을 수호하려면 쉴 틈이 없다.
‘내 발등, 내가 찍었구나!’
상원도 안다. 무진에게 항의해 봤자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는 걸. 사나이는 가치를 인정해 줄 때 비로소 감동하게 되는 법인데, 이게 참 애매하다. 인정받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