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 성장(2)
“교류전이 얼마 안 남았구나.”
“지나친 압박은 호환·마마처럼 정신 건강에 안 좋다고! 차라리 나를 패!”
“좋지.”
“농담이야. 헤헤헤!”
패란다고 진짜로 패냐고 투정해 봤자 의미 없다. 이미 처맞고 누워 있을 테니까. 생명의 위기를 탈출한 상원은 겨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좀 더 몰아붙이면 올해 안에 5계식도 가능하겠어.’
무진은 상원에게 맞는 방법으로 대해 주고 있었다. 상원은 자유롭게 풀어 주기보다는 타이트하게 압박할수록 능력을 발휘하는 타입이었다.
‘당분간 방패막이가 되어 줘야겠어.’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 하는 법이다. 상원은 전투력 향상과 감투를 얻었다. 생도로선 최선의 결과였다. 그렇다면 대외적으로 욕 좀 먹어도 괜찮잖아.
무진은 성운맹을 전폭적인 신뢰가 아닌 이득에 의해 맺어진 이합집산으로 보도록 만들 심산이다. 특히 지수와 태수 선배와의 관계는 주고받는 명확한 선을 그었다. 이를 위해 임시로 의협단주를 맡았고, 태수 선배와 경쟁했다.
‘빌미를 주기에 딱 좋지.’
범위를 좁혀 놓았기에 누가 됐든, 치고 들어온다면 역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 단, 이러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태수 선배의 발전이 필요했다.
우리가 드러내는 만큼, 태수 선배는 그 이상으로 강해져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상대방에게 전략이 노출될 수 있었다.
‘태수 선배는 쉽지.’
상원과는 비슷하면서도 약간 다르다. 태수 선배는 과시욕이 강한 데다 의존성이 강하다. 주변의 눈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데다, 실패하지 않으려는 강박관념이 심했다. 진 회장이 칭찬할수록 본인 스스로 심한 압박감을 받는다.
‘당분간은 나설 필욘 없겠지.’
무진은 성운맹을 규격화, 즉 플랫폼화해 놓았다. 대량생산의 부속품처럼 하나가 빠져도 다른 하나가 부족한 부분을 채워 넣을 수 있었다.
사회든, 기업이든 특출 난 개인에 의해 판도가 바뀌기는 하나, 그 1명이 빠졌을 때의 부작용이 크다. 특출 나진 않더라도, 시스템을 구축해 대체할 인력이 지속적으로 나오도록 만들어야 했다.
‘관행이 무조건 나쁘다고 볼 순 없지.’
성운맹의 뿌리는 마조군단이며, 강력한 내리사랑으로 무장했다. 사랑으로 포장해도 결국은 폭력이라고 비판할 수는 있으나, 성과는 확실했다.
‘졸업할 때까진 괜찮겠지.’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고, 졸업한 이후까지 고려하진 않는다. 정 안 되면 그 전에 해체하면 그만이다. 무책임하다고? 사람이든 사회든 시간 앞에서는 무력하다. 어떤 정책도 완벽할 수 없으며, 현시점에 맞추어서 개선해야 했다.
‘준상이는 정식 맹원으로 승격시키고.’
다시 음지로 스며든 반성운맹을 관리하려면 준상이에게도 걸맞은 자리를 주어야 했다. 그래야 저들이 준상이를 더 좋게 평가할 테니.
굳이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상원과 준상이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맹주가 된다면 나쁘진 않잖아.’
비록 반성운맹일지라도.
***
일본과 중국의 생도들이 공교롭게도 같은 날에 입국했다. 보통은 교류전의 개최 날짜를 고려하여 시차 적응을 위해 5일 전에 입국하는 편이나, 이번에는 15일이나 앞당겼다.
또한, 자국에서와 비슷한 환경과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사전에 훈련 장소를 대여했다. 국제전이기는 해도 생도 간의 대결이었다. 들어가는 비용이 과하다. 중국과 일본이 이번 교류전에 임하는 자세를 엿볼 수 있었다.
중국은 구대문파와 팔대세가의 생도로 구성했으며 소림사가 이끈다고 했다. 예상된 범위였다. 예전부터 소림사는 중국 내 태산북두를 자처했으며, 구대문파와 팔대세가의 아성은 견고했다.
일본은 십대검가와 아카데미의 상위 서열로 구성이 되었는데, 특이하게도 십대검가에서 대표를 내세우지 않았다. 자존심이 강한 십대검가였기에 상당히 이례적인 경우에 속했다.
“주의해야 할 상대는 예상대로 소림입니다. 출전 생도인 일룡, 일진, 일우는 소림의 72종 절기를 읽힌 천재승으로 명성이 자자합니다. 그중에서도 일룡을 특히 경계해야 합니다. 그는 후기지수의 단계를 넘어섰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고유 속성은 아직이야?”
“중국에서도 교류전을 대비해서 우리 쪽 조사단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대략적인 판단으론 사자후와 금강불괴로 보고 있습니다.”
“중국은 소림만 주의하면 되는 거야?”
“그럴 리가요. 구대문파와 팔대세가는 경시할 수 없는 상대입니다. 눈에 띄는 점은 이번에 팔대세가의 주축은 남궁이 아니라 제갈이 차지했습니다. 진법, 결계, 술법에 유의해야 할 듯싶습니다.”
계속되는 질의에도 남생도는 조사한 자료를 객관적으로 검토하여 여생도에게 차분히 설명했다.
두 생도는 선후배라기보다는 수직적인 상하가 뚜렷해 보였다.
포니테일로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여생도는 순백의 피부와 아름다운 외형으로 절로 눈이 가게 했다. 더욱이 주변을 지배하는 고귀한 기품을 지녔다.
반전이라면, 개구쟁이처럼 눈빛을 바꾸자 순식간에 분위기가 바뀌었다는 점이다. 방금까지는 냉철한 이성의 소유자처럼 보였거늘,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여하튼 아름다운 여자의 변신은 무죄였다.
“그래서 자신 없어?”
“검사는 겨뤄 보기 전까지 확신은 금물입니다.”
“겸손한 척 깔아뭉개는 이중인격 하야토답네.”
“제가 또 언제 그랬습니까?”
“지금 말대답하는 거야?”
“……아닙니다.”
억울한 누명에도 하야토는 감히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닫았다. 여생도가 비록 후배긴 해도, 격이 다른 고귀한 혈통이었다.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은 중요하지 않다.
“한국은 어떤데?”
“교류전의 대표가 1학년 여생도입니다.”
“호오, 나하고 같잖아.”
“제법이지만, 어찌 감히 미츠키 사마와 비교가 되겠습니까.”
“이중인격에 아부도 잘하네.”
“……사실을 전할 따름입니다.”
10년 전만 해도 한국이 교류전에서 우승하기도 했지만, 최근에는 일본과 중국의 다툼에 꼽사리 끼는 형식이었다. 특히 개인전에서는 차이가 꽤 벌어진 상태였다. 중국도 이제는 한국을 라이벌로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경계해야 할 대상이야?”
“권왕이 다음 후계자로 선택했다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권왕이? 이거 놀랍네.”
“다만, 유지수 생도를 제외하면 어렵진 않습니다.”
“결국 하찮다는 거구나. 과연 십대검가의 대표인 천검의 하야토야.”
“저는 그런 뜻으로…… 아닙니다.”
만담이 되었지만, 미츠키는 화면에 나온 유지수 생도를 또렷하게 눈에 담았다. 움직임이 확실히 일반 생도와 달리 능숙하다.
하물며 다름 아닌 권왕의 뒤를 이을 후계자다. 근래에 들어 한국의 각성자가 예전만 못하다는 평가를 받지만, 권왕은 예외적인 대상이었다.
“받은 건 돌려줘야겠지.”
“맡겨 주십시오. 권왕의 이름을 가져오겠습니다.”
“검가에서 권왕을 왜 가져? 욕심이 지나친 거 아냐?”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중국을 경계하는 것과 별개로 한국과의 결전은 반드시 완승해야 했다. 대일본의 한복판에서 난장을 깠던 권왕의 만행을 아직도 기억하는 이들이 있었다.
“기억에 남는 선물을 해 주자고.”
“아무렴요.”
미츠키의 해맑은 미소에 하야토는 소름이 돋았다.
저 천진함에 속으면 곤란했다.
***
허억, 허억!
호흡이 깊고 가파르다. 흐르는 땀은 열기에 발화되어 소금기가 얼굴에 그대로였다. 너무 힘이 들다 보니 이명까지 들린다. 앞에서 뭐라고 하는데, 잘 들리지도 않았다.
“자세 흐트러지네, 똑바로 해야지, 고거 했다고 힘들어하기는.”
“……우린 네가 아니라고!”
“이래서야 아버님의 복수를 할 수 있겠어?”
“넌 양심도 없냐!”
유지철, 유지연은 요즘 죽을 맛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관심의 대상에서 벗어나서 숨통이 트였으나, 근래에 많이 한가해진 무진의 눈에 띄면서 지옥이 펼쳐졌다.
“정권 지르기 천 번은 쉽잖아. 이렇게 하면 5분 안에 끝나는데 왜 그걸 못 하니?”
“중력이 5배잖아!”
“난 10배야.”
“……우린 네가 아니라고!”
“누차 말하지만, 난 너희의 원수다. 원수를 눈앞에 두고도 복수심을 불태우지 않는다니. 이 불효막심한 것들.”
남매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에 기가 막혔다. 저게 지금 할 소린가? 아버지와 형을 폐인으로 만들어 유폐한 건 그렇다 쳐도, 원수라면서! 이래선 안 되는 거 아닌가? 원수가 왜 복수를 안 한다고 설치냐고?
누차 말하지만.
저놈은 미친놈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원수의 자식들을 자기가 훈련을 왜 시키냐고? 복수를 당해 줄 것도 아니면서.
‘차라리 말이나 하지 말지!’
‘왜 다 알려 주냐고!’
돌아가는 사정을 아예 모르지 않기에 남매는 답답했다. 그냥 우리는 쥐 죽은 듯이 살고 싶다고.
처음에는 남매도 이렇진 않았다. 어쨌든 무진에게 복수심을 가지고는 있었다. 하지만 겪으면 겪을수록 이 광기 가득한 미친놈과는 상종하지 않는 편이 낫다는 걸 깨닫게 했다.
지금도 봐라.
저게 어떻게 그 무지막지한 훈련을 막 끝낸 사람이란 말인가. 숨조차 헐떡이지 않고, 할아버지의 머신을 조지고 있었다.
쓰읍, 맛있다.
쓰읍, 맛있다.
봐라, 공기 먹고 맛있단다.
헐떡이는 숨을 간신히 조절하는 남매와는 차원이 다른 종자였다. 더욱이 가리지도 않는다. 조각 같은 육체는 보는 이로 하여금 혀를 내두르게 했다. 사람 같지도 않은 가공할 육체였다. 저걸 보고서 어떻게 복수심을 불태우냐고?
날이 가면 갈수록 격차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럴 거면 따라붙을 여지라도 주든가.
“교류전에 나가지 못하더라도, 도전은 해 봐야지. 이래서야 가문의 수치로 남을 수밖에 없어.”
“그걸 왜 네가 걱정해!”
“아무짝에도 쓸모없으면 암중 세력도 다가오지 않을 거 아냐. 너희들의 가치를 증명 좀 하자.”
“우릴 미끼로 쓰진 말라고!”
“조금이라도 가문에 도움이 돼야지. 복수는 하지 않더라도, 가족을 버릴 셈이야?”
“이 악마 같은 놈!”
아버지와 형을 인질로 잡고 있었다. 너희들이 필사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대놓고 협박했다. 이러니 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사람 구실 좀 하자, 왜 이렇게 약하냐.”
“네가 무식하게 강한 거야!”
“어허, 사부님의 혈통은 나약하지 않아.”
“올려치기 좀 그만해!”
남매는 훈련이 끝나면 쉬고 싶었다. 당연하게도 무진은 남매의 바람을 깡그리 무시했다. 훈련 다음은 무조건 대련이었다.
무진은 툭툭! 가볍게 주먹을 뿌렸다.
퍼억, 쿠다다당!
까아악!
남매는 동네북이 되어 무진의 주먹을 받아 내야 했다. 동서남북 어디로 가도 주먹이 기다렸다.
맞고, 또 맞고.
이러면 골병이 들어야 하거늘.
힐, 리커버리.
이 망할 놈이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회복시키고, 패고, 회복시키고, 패고.
따지고 보면 대련 시간은 30분을 넘지 않는다. 그저 남매의 시간이 흐르지 않을 뿐이다. 이렇게 시간이 상대적이다.
“시간 참 빠르네. 벌써 끝날 때야.”
“진짜 끝이야?”
“그래. 복수심을 불태우라고, 이대로 낙오자로 살 거 아니면.”
“잔인한 새끼!”
작정하고 약을 올리는 거면 차라리 낫다. 무진이 하는 말은 구구절절 옳았다. 맞는 소리만 하고 있으니 더 화가 치밀었다. 외면하면 그만인데, 외면해서는 안 되는 현실이라 답답했다.
“독수공방하시는 어머니를 생각해.”
“지옥에나 가 버려!”
“다 너희들 잘되라고 하는 말이야. 안 그래?”
“맞다, 씨발…… 까악!”
“말 예쁘게 하고.”
무진은 인간의 잠재력을 믿는 편이지만, 관성을 무시할 순 없었다. 남매는 여태 나태하게 살아왔던 버릇을 버리지 못했다. 가족의 복수를 외치던 얼마 전과는 달리 현실에 매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