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 빚을 지우다(2)
“그대가 하는 걸 내가 못 할 줄 알았나. 좀 더 힘을 내 보라고. 마령합신을 이루기 전에 말이야.”
“아직 끝나지 않았다!”
“희망은 좋은 거지, 분발해 보게.”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호오, 야구 좋아하나?”
“시끄럽다!”
한때, 축구 광팬이었던 시조는 으르렁거렸다.
네르가는 시조의 화를 돋우면서 평정심을 계속 흔들어 댔다. 어차피 시간은 자신의 편이기에 느긋했다.
이대로 질질 끌기만 해도 결과는 정해져…… 응?
오싹, 부르르르!
네르가는 솜털을 곤두세우는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정령가의 시조를 농락하며 지나치게 유희를 즐겼던 탓일까?
힐끗 수왕과 장로들의 상태를 보았다. 좀 전과 별로 달라지진 않았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지?
아무 이유 없이 위화감이 들진 않는다. 더욱이 자신의 감각은 예지에 가까웠다.
숫자가 적다?
마령진을 이용해서 분가의 인원을 어둠 속에 숨겨 놓았었다. 분가의 전력이 본가에 비해서 부족하긴 해도. 숫자와 현재 상태를 놓고 보면 본가의 승산은 희박하다. 게다가 데리고 온 10명의 수하가 분가에 합세했다.
없어?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수하들이 전부 사라져 버렸다. 불과 몇 초 사이에 일어난 사태치고는 예상을 확실히 벗어났다.
도대체 누가?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거슬렸던 놈이 있었다.
정령가와는 상관없는 외부인.
“……저놈은 뭐지?”
일격일살이 아니다. 일격에 3명이 죽는다. 일타삼피의 정석이었다. 한데, 빠르진 않았다. 기습적이긴 해도,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 피하지 못한다.
허무하게 당하고 있었다. 마치 제자리에서 꼼짝도 못 하고, 교수대에 묶인 사형수처럼 멈춰 섰다.
저럴 수가 있나?
속성이거나 스킬이라면 가능할 테지만, 일반적인 등급으론 불가능했다. 최소한 ss급 이상이어야 한다.
그만한 속성과 스킬을 일개 생도가 지닐 수 있는 걸까? 그런 의문은 곧 사라졌다.
지금 당장 스킬, 속성의 유무는 중요하지 않았다. 일타삼피로 분가의 전력이 숭덩숭덩 잘려 나가더니, 5분가주와 6분가주만 덩그러니 남았다.
“당황할 때가 아닐 텐데.”
“……이런!!”
분가가 일망타진되기 직전이라, 수왕과 장로들이 시조에게 붙었다. 어느 순간 포위 진형에 갇히게 된 네르가는 어이가 없는 듯 헛바람을 삼켰다.
방금까지만 해도 언제 이길까, 시간을 쟀거늘.
한순간에 반전이 되었다.
차작!
시조의 좌우로 수왕과 장로들이 포진했다.
수왕과 장로들도 얼떨떨하긴 매한가지였다. 분전하긴 했어도, 마령이 심신의 통제를 빼앗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숫자에서 분가에 뒤처졌었다. 이대로 시간을 끌어 봤자, 승산은 많지 않았다.
이제 끝이 나나 싶었던 순간.
구원의 손길이 순식간에 찾아왔다. 시조께서도 다크엘프에 고전을 면치 못했기에 선뜻 납득이 되지 않았었다.
‘대체 어떻게 한 거지?’
‘고전한 우리가 이상한 건가?’
‘어째서 미라처럼 맥없이 당하는 거냔 말이다.’
‘속성이나 스킬 같진 않았는데.’
직접 당해 보지 않았으니, 어떤 수법을 썼는지 판단이 되지 않았다. 더욱이 물어볼 사이도 없이 ‘뭘 멍청하게 보고 있습니까!’라고 핀잔까지 들었다.
훈계가 틀리진 않았다. 이유를 궁금해하기 전에 위태로운 시조를 도와야 했다. 결국, 무진에게 등 떠밀려 얼떨결에 시조의 좌우에 서게 된 것이다.
슥!
도리도리!
그제야 수왕은 딸이 눈에 들어왔다. 정령원에서 의식을 치를 때까지만 해도 주목을 받았으나, 지금까지 존재감이 전혀 없었다. 그 덕일까? 정령가에서 가장 멀쩡한 상태였다.
‘저도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요.’
아빠의 호승심 가득한 눈빛에도 유정은 대답하지 못했다. 안다고 해도 이상하고, 모른다고 해도 이상한 현실이다. 저 자식을 상식적으로 설명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럴 바엔 처음부터 모른다고 하는 편이 마음은 편하다.
‘그래도 얘기는 하고 급발작하라고! 깜짝 놀랐잖아!’
유정으로선 서글픈 가족사가 되고 있었다.
반란이 진짜로 일어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시조께서 건재한 이상, 분가의 반란은 성공할 수 없었다. 하지만 분가 전체가 반란에 가담했고, 외부 세력을 끌어들였다.
‘저 자식이 없었으면 정말 좆될 뻔했잖아!’
그렇다고 해도 살인을 삼시 세끼 밥 먹듯이 저지르고 있었다. 사람이 사람 같지 않게 뒈지고 있어서 비현실적이었다. 게임이었으면 정말 좆같이 한다고 욕을 먹었을 것이다.
‘한시라도 빨리 끝내야 해!’
반란을 일으키긴 했어도 분가도 가족이나 다름이 없었다. 평소라면 저들의 죽음에 안타까운 마음이라도 가졌을 테지만, 유정에겐 엄마가 더 중요했다. 정령원에서 지지부진하다가 엄마가 죽는다면 평생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다.
하아!
숨을 가다듬은 시조도 한결 부담을 덜었다. 참으로 터무니없는 녀석이긴 해도, 가문의 은인임은 분명했다. 조금만 시간을 더 끌어 준다면 승산이 있었다.
후후후.
이 와중에 포위당한 네르가가 웃고 있었다. 다만 여유로웠던 이전과는 달랐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스산함을 머금고 있었다. 의도한 대로 흘러갔던 흐름이 비틀리자 본색을 드러냈다. 시조의 파상 공세를 물 흐르듯이 피해 가며 무너뜨렸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재밌군, 재밌어. 아주 재밌어. 이래야 사는 재미가 있는 거지.”
“곧 재미없게 해 주마.”
시조의 살의에도 네르가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마치 얼마든지 해 보라고 시위하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받아 주었으니, 이번에도 받아 주겠다는 듯했다.
“……위험, 피햇!”
시조가 반응하자, 수왕이 그 즉시 바람의 장벽을 이중 삼중으로 세웠다.
꽈아아앙!
네르가의 정령 마법 흑마의 헬 익스플로전이었다.
시간과 거리를 제어한, 공간 폭발. 일순간 8계식의 폭발을 중첩하여 일으킨다.
쿨럭!
먼저 대응한 수왕의 배후를 장로들이 연계했음에도 상당한 충격이었다. 모두 내상을 입었는지 핏물을 토했다.
꽈땅!
유정도 힘을 보태다가 뒤로 밀린 채 엉덩방아를 찧었다. 풍야와 화야를 소환하여 대비하지 않았다면 엉덩방아로 끝나지 않았다.
‘언질을 주지 않았으면 위험했을 거야!’
유정의 정령이 역소환당하지 않은 것은 사전에 무진의 신호가 있어서다. 만약 다 같이 정령을 소환했다면 다크엘프가 재차 공격할 타이밍이 생겼을 것이다.
후후후!
화야와 풍야가 연계한 화염폭풍을 향해 네르가가 날카로운 송곳니를 보였다.
“혼혈치곤, 제법이군.”
“어딜 가는 것이냐!”
시조의 포효에 고개를 돌린 네르가는 같잖은 듯 비웃었다.
“조금 놀아 줬더니, 한도 끝도 없이 기어오르는군.”
“그것이 네놈의 본심이구나!”
네르가가 화염폭풍을 흩어 내고 쇄도하자, 시조로선 다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수왕이 네르가의 낌새를 알아채고 수인(水刃)을 시전해 시간을 벌었다. 하나, 헬 익스플로전으로 입은 내상이 더욱 심해졌다.
펑펑펑!
네르가와 본가의 전력 대결이 되었다. 구도는 180도로 달라졌다. 네르가 혼자서 시조, 수왕, 장로들 외 유정을 상대해야 했다. 수적으론 일방적인 구도였지만, 본심을 드러낸 네르가는 이전과는 판이했다.
꽈아앙, 부르르르!
정령가와 네르가가 생사결을 펼치는 동안 무진은 싱거울 정도로 압도하고 있었다. 일방적인 살육전이었다. 일거에 모조리 다 쳐 죽이고 6분가주만 남았다.
주춤, 주춤!
6분가주 정상기는 지독한 악몽을 꾸는 기분이었다. 도무지 현실적이지가 않았다. 잘난 체하는 본가를 제압하여 우월감을 맛보려는 찰나 일장춘몽이 되었다.
아니, 이게 말이 되느냔 말이다.
상대는 고작 생도에 불과했다. 그것도 성좌의 선택도 받지 않은 저학년의 생도에게 분가주들이 맥을 못 추고 살해당했다.
영종도 아카데미가 우리나라 엘리트의 성지라고는 하나, 스무 살도 되지 않은 괴물을 탄생시킬 순 없다.
“……무슨 수작을 부린 것이냐?”
“이런 수작, 홀드.”
알고 싶다면 알려 주는 것이 인지상정.
무진은 원하는 대로 마법을 걸어 주었다. 1계식의 마법도 9계식 마도와 만나면 어떻게 되는지를 직접 체감하도록.
헉!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살고 싶어서 필사적으로 방비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걸렸다.
정상기는 소환한 땅의 정령을 바라보았다.
정령 노갱이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미안!
망할!
정령까지 마법에 당했다.
정상기로선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이었다. 여태 맥없이 당한 이유가 마법이었다니!
게다가 고작 홀드였다. 1계식에 불과한 마도가 이렇게나 굉장한 힘을 발휘해도 되느냔 말이다. 제발 상식적이었으면 했다.
“해결됐지?”
“……비겁한 놈!”
“스킬이나 아이템도 아닌데 비겁하다니. 혹여 내가 마법사란 걸 숨겼었나?”
“……닥쳐, 닥치라고!”
정곡을 찔렸는지 정상기는 얼굴을 붉히면서도 거칠게 소리쳤다. 그러나 곧 현실을 깨닫게 되었다. 지금 분노를 터뜨릴 때가 아니었다. 살려 달라고 빌어도 부족한 판국에 억울해서 이성을 잃었다.
“죽은 분가주들과 달리 알려 줬으니까, 답답하지 않게 갈 수 있겠지.”
“……오지 마라! 살인자가 되려는 거냐!”
“새삼스럽게 무슨 소리야.”
다 죽이고, 한 놈 살린다고 살인자가 아닌가? 영화에서나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중대 단위를 희생할 뿐.
패륜의 대가는 죽음이 당연했다. 가족을 배반하고 잘 먹고, 잘 살면 아름답지 않았다. 그러니 가족을 배신할 때는 신중히 선택해야 했다.
“대가리를 박살 낼 거야. 지옥에 가서 아들들과 행복하게 살아.”
“……이 악마 같은 놈, 저주할 테다!”
“저주는 무서운데, 역시 소멸당해야겠는걸.”
“웃기지 마라,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릴 믿을…… 흐억!”
무진은 보여 주었다.
그간 소멸력을 많이 다듬었다. 어디까지 소멸이 가능한지 시험해 보고 싶었다. 실험체가 되고 싶다는데, 사용하지 않으면 손해였다.
“……그냥 죽여 줘!”
“늦었어!”
아무도 안 보는 순간, 무진은 주먹을 뻗었다. 무형무음의 소멸력은 정상기의 머리를 관통하여 지나갔다. 다른 시체와 달리 대가리를 잃진 않았다. 다만, 혼이 사라졌는지, 껍데기만 남은 육신이 기력을 잃고 쓰러졌다.
하아, 하아.
미약하지만 숨을 쉬고는 있었다.
정상기가 살아 있자, 무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완전한 소멸은 아직 불가능했다. 당장은 영혼의 일부를 지운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실망하진 않았다. 사람은 실수를 통해 배우고, 연습하다 보면 완벽해질 것이다.
악당이 환생, 회귀, 빙의, 전생하지 못하는 그날을 위해서.
우드득!
확인을 마친 무진은 정상기의 목을 분질렀다. 가족들과 한날한시에 갈 수 있어서 행복하겠지. 패륜의 씨앗은 대가 끊기는 편이 세상에 이로웠다.
저벅.
꿀꺽!
무진이 방향을 틀어서 다가오자 소씨, 강씨 형제는 마른침을 삼켰다. 다른 이들과 달리 이미 한 짓이 있기에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사람이 저렇게나 간단히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기겁했다.
‘그런데 이렇게 막 죽여도 되는 거야?’
‘사람은 함부로 죽여선 안 되는 소중한 존재라고!’
적이라고 막 죽이면 법이 왜 필요한가? 사람은 누구나 정당한 절차에 의해서 판결받을 권리가 있었다.
그것이 설령 살인자일지라도.
우린 그렇게 배웠다고.
소씨, 강씨 형제는 모처럼 주먹보다 법을 옹호했다. 평소 주먹이 더 효과적이었지만, 가해자에서 피해자가 되었을 때 법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이봐.”
“예? 왜 그러시는지?”
“호오, 예의가 발라졌네. 주먹 앞에 예의가 생긴다더니. 옛말 틀린 거 없나 봐.”
“……그런!”
그렇게까지 예의가 바르진 않다고 항변해야 하나?
소씨, 강씨 형제는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대답은 해야 했다. 수틀리면 이놈이 어찌 나올지 판단하기 힘들었다.
한편으로.
‘우리 죽을 뻔했구나!’
‘요단강을 건너지 않은 게 다행이었어!’
이토록 무지막지한 킬링머신에게 시비를 걸고도 살아남았단 사실에 소씨, 강씨 형제는 안도해야 했다. 자신들 같았으면 살려 두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런데 구해 주기까지 했다. 평생 갚지 못할 은혜를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