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6. 아카데미의 폭군(2)
여하튼.
먹음직한 먹을거린데도, 다들 1번 타자는 망설였다. 자고로 먼저 맞는 매가 가장 아프다고 했다. 권왕을 어떤 식으로 상대할지 간을 보고 싶어진 것이다.
‘어떻게 된 게 그 녀석이 말한 내용에서 한 치를 벗어나지 못하냐.’
하라고 하면 하기 싫고, 하지 말라고 하면 하는. 사람의 마음이란 게 참으로 간사했다.
이놈은 대체 어떻게 아는 거야? 인생의 쓴맛, 단맛, 신맛을 다 봐도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기 어려운 일이거늘.
마제는 조용히 빠져 있다가.
“쫄았나?”
알려 준 대로 발작 버튼을 눌러 주었다.
작게 속삭였을 뿐이지만, 이 안에 있는 이들이 어디 보통 사람들인가. 각성자 중에서도 선별된 인재로 경력을 성공적으로 쌓아 길드장이 된 이들이었다. 귓구멍에 살이 찌지 않은 이상, 외면하지 못했다.
벌떡!
다들 마제를 노려보며 언성을 높였다.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오!”
“혼잣말인데.”
……이 망할 인간이!
막상 발끈하며 일어섰지만, 정작 뭐라 할 말이 없어졌다. 혼자 한 말이고, 대상이 정해지지 않았다. 너희들한테 한 말이 아니라니, 성질을 내 봤자 정곡을 찔렸다고 광고하는 격이었다.
“자자, 오늘은 이만합시다.”
분위기가 어수선해지자, 천제는 이쯤에서 끝내기로 했다. 결론은 나왔고, 어차피 할 사람은 하게 되어 있었다.
후우우.
홀로 남겨진 천제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맘 같아서는 담배라도 한 대 태우고 싶은데, 거실에서 피우다 걸리면 아내한테 혼난다.
당장 권왕가에서 주도권을 빼앗아 오기는 힘들어도, 나중을 위해서 연합하려고 했거늘.
“완벽하게 당했군.”
권왕의 도발은 마제가 꺼내 든 심계가 분명하다.
연합하지 못하도록 선을 긋고, 본인은 쏙 빠지는. 이제 길드 연합은 개인플레이를 하게 될 테고, 권왕에게 끌려다닐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단순히 마제가 권력욕이 없다고 하기엔 권왕의 무위가 상상을 초월한다. 안목이 높을수록 상대의 무위가 보이기 마련인데, 천성안(天星眼)으로도 권왕의 전투력이 측정되지 않았다.
“당분간은 어렵겠어.”
대길드장이 될 계기를 마련해야 했지만, 마제로 인해서 물거품이 되었다. 아쉽지만 당분간은 내색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포기하진 않았다. 후대를 위해서라도 천상 길드는 우리나라 최강의 길드여야 했다.
터벅, 터벅!
거실에서 소주 한 병을 까서 새우 스낵과 마시던 천제는 아들의 축 처진 발걸음에 의아해서 물었다.
“아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니까, 아빠는 몰라도 돼!”
윽!
평소 안 그랬던 아들이었다.
오늘도 평정심을 유지했던 천제는 상처를 받았다. 아들에게 소원하지 않도록 노력했기에 충격이 더 컸다.
-나는 크면 아빠처럼 될 거야!
-나는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역시 아빠가 최고야!
그랬던 아들이 몰라도 된단다.
“민준아, 엄마한텐 말 못 해도 아빠한텐 해야지.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이래?”
“……그게.”
팔불출을 숨기고 집에서만 내색하시는, 내숭 100단 아버지의 헌신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장민준이었다. 엄마보다 아빠가 더 좋았던 시절도 있었고. 당연히 기간은 매우 짧았다. 아무리 아빠가 잘해 줘도, 엄마보다 좋을 순 없다.
하나, 나이 들어 뒷방 늙은이 취급 받기 싫은 아버지의 눈물 나는 노력을 외면하긴 힘들었다.
아버지는 다 저런가?
미래가 암울하긴 하다.
여하튼 아빠는 자신을 위해서 영약, 포션, 스킬, 아이템, 장비를 아끼지 않았다. 이번 교류전에 성과를 올리지 못해 좌절했을 때 아버지는 아끼던 마나 포션을 내어 주셨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장민준도 호박씨 내공이 상당한 편이다. 외부에선 절대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다. 어떻게든 평정심을 유지했다.
“아빠, 나는 천재가 아니었어.”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했어? 네가 천재가 아니면 누가 천재라고!”
아빠한테야 천재지.
자식보고 병신이라고 할 부모는 많지 않다. 그건 아동 학대잖아. 고슴도치도 제 자식은 귀엽다고, 아버지 눈엔 천재로 보이겠지.
“지수는 알지?”
“권왕의 손녀답더구나.”
“그럼 평지풍파는?”
“지수의 호위 무사가 아니더냐. 요즘은 뜸하지 않나?”
“아빠도 정보력이 늦네. 지금 아카데미가 그 녀석으로 인해 난리야.”
“그놈이 또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데?”
“아주 그냥 살판났지.”
장민준은 아카데미에서 벌어지는 일을 소상히 설명해 나갔다.
아들에게 전말을 들을수록 천제는 헛바람을 삼켰다. 권왕의 제자가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사고뭉치긴 해도, 이번엔 예상을 훨씬 초월했다.
“졌다고?”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았어. 나만 맞은 것도 아냐. 6학년 생도도 전부 당했어.”
“고학년이면 용신가의 자제도 있을 텐데.”
“정산 선배도 상대가 안 됐어. 요즘엔 지수하고 짝으로 선배들을 두들겨 패고 다니고 있어.”
“교관들은 뭐 하고?”
“결투장에서 합법적으로 패는데 교관님이라고 별수 있나.”
장민준이 의기소침한 이유였다. 신입생으로 들어올 때만 해도 아카데미를 내 세상으로 만들겠다는 원대한 포부가 있었지만, 지금은 맞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나약한 생도에 불과했다. 더군다나 무진만이 아니라 그 주변까지도 완전히 달라졌다.
‘확실히 보통이 아니긴 한데.’
근래에 워낙 다사다난했고, 길드에 위기가 찾아오면서 아카데미에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 짧은 사이에 아카데미에 커다란 풍파를 일으켰다.
‘권왕이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교류전에서 소외된 아들을 위해서 어렵게 구한 영약, 만다라의 정화를 내어 주었다. 한 방울만으로도 마력을 크게 늘려 주는 sss급 영약이었다. 복용 후 아들은 체질까지 개선되어 생도의 기준을 넘어섰었다. 이제는 지수에게 밀리지 않겠다 싶었는데,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설마 또 영약을 복용시켰나?’
무진의 전적은 화려했다. 만년삼왕과 드래곤하트만 해도 평범한 각성자는 평생을 기다려도 오지 않을 천고의 기연이었다. 권왕은 최고의 영약을 마나 흡수력도 변변치 않은 녀석에게 복용시켰다. 당시에는 영약 낭비라는 비판이 많았지만, 이제야 빛을 보는 듯했다.
‘어쨌든 대기만성이군.’
그만큼 처먹었으면 각성할 때가 되긴 했다. 하지만 아들과 길드의 미래로선 더더욱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지수에 이어 무진까지 각성했다면 차후, 권왕가는 천하제일가가 될지도 모른다. 권왕 다음이 없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권왕의 심모원려가 보통이 아니구나.”
“예?”
“너는 아비만 믿고 수련에만 몰두해. 내 만다라의 정화보다 더 대단한 영약을 구해 보마.”
“……고맙습니다, 아빠.”
고맙긴 한데, 영약만 먹는다고 만사형통을 바라기엔 무리였다. 마력이 늘면 승산은 있겠지만, 무진의 전투력이 상상을 초월했다. 스킬과 아이템의 조화가 극한에 이르지 않으면 어림도 없었다.
‘그 자식, 내외일체를 이룬 것 같던데.’
그렇다고 의욕에 불타는 아빠 앞에서 장민준은 차마 하지 못하겠다고 말 못 했다.
팔불출과 파파보이의 상성은 답답함이었다. 먼저 포기해 주기를 바라기에 될 턱이 없다.
***
시간은 상대적이긴 했다.
불과 엊그제만 해도 2학년이었는데, 어느새 3학년 2학기도 중반이 흘러갔다. 열여덟 살과 열아홉 살의 차이가 이렇게나 컸다. 열일곱 살 때는 못 느꼈지만, 열아홉 살이 되니 시간 가는 게 무서울 지경이었다.
3학년은 시작부터 화려했다.
무진은 저학년과 고학년의 불문율을 무너뜨렸다. 고학년은 저학년을 도발하거나 건드려선 안 되지만, 무진이 먼저 나댄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여태 태수 선배와 친구들이 방패막이가 된 것도 있지만, 사실 무진을 손수 징벌하기에는 명분이 부족했다. 설령 이기더라도, 성좌의 선택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저 단순 화풀이에 지나지 않았다. 혹여, 그날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지기라도 하는 날엔 개망신이었다.
슈우우웅!
퍼어어엉!
결투장을 뒤흔드는 울림, 강력한 내력을 운용한 포격이었다. 분노한 레드 드래곤이 브레스를 쏘아댄 것처럼! 결투장 안을 뜨겁게 달구었다. 흡사 네이팜탄으로 바닥을 깔아 놓은 듯 활활 불타오른다.
저벅, 저벅!
화염 속 결투장 바닥은 백렬탄처럼 전소할 때까지 꺼질 줄 모른다. 그럼에도 감각이 없는 사람처럼 무진은 무심히 걸어 나왔다.
화염이 닿는데도 타지 않는 신기한 광경이었다. 다만, 자세히 보면 무진을 뒤덮은 투명한 막이 있었다.
“수고했어.”
-별거 아냐.
최상급 정령이 된 요나가 수막을 형성했다.
요나는 주변을 뒤덮은 화염을 휘저었다. 작렬했던 화염이 맥을 못 추고, 태풍 앞의 성냥불처럼 소멸했다.
솨아아!
화염이 사라지고, 무진이 여유롭게 옷을 털었다.
부들부들!
공세를 가한 김정산은 이를 바득바득 갈며 치를 떨었다. 방금 사용한 수법은 가문의 진산절예 적룡도법의 적룡포였다. 용혈을 기반으로 하여 속성과 스킬을 조합했었다.
전력을 다한 기색이라도 있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툭툭! 옷을 터는 모양새까지 꼴 보기가 싫다. 마치 옷에 묻은 하찮은 먼지로 취급당하는 기분이었다.
스윽!
무진이 선배를 보며 말했다.
“이젠 내 차례지.”
“……네놈이 나서면서 그딴 소리를 해!”
정곡을 찔린 무진을 대신해 요나가 쇄도해 들어가 김정산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주인과 정령은 이심전심이었다.
요나는 정령술을 사용하기보다는 무진류를 펼쳤다. 짬짬이 요나에게 맞추어서 무공을 가르친 보람이 있었다. 정령이라는 틀에 박힌 전투 방식은 효율적이지 않았다. 때에 따라서 변화를 주어, 대응을 난해하게 만들 필요성이 있었다.
퍼퍼퍼퍽!
내력은 정령력으로 대신해서 수강(水剛)이 되었다. 압축된 정령 수강의 파괴력은 강기와 비등하거나 그 이상이었다.
요나의 상대로 일개 생도는 역부족이다. 실제로 최상급 정령은 최소 백작급 이상의 전투력을 갖추었다. 정령이 무공에 이어 심리전까지 쓰니, 적이 되면 굉장히 골치 아팠다.
“오른손잡이라도 왼쪽과 균형을 맞추어야지. 최적화 훈련을 게을리하니까, 전투 중에 자꾸 왼쪽에 빈틈이 생기잖아.”
훈계처럼 들리지만, 실상은 주먹부터 나갔다.
퍼억!
무진의 주먹이 김정산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가르침은 주지만, 봐주진 않는다. 드래고니안 오러, 용혈로 방어하기 전이었다. 갈비뼈가 바싹 튀긴 치킨처럼 바사삭! 소리가 들렸다.
크아아아악!
갈비뼈는 내장을 보호하는 육체의 중요한 골격이다. 이 부분이 부서져서 내장을 잘못 찌르면 천공이 생겨 뒈질 수도 있었다.
“흐억…… 안다고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좌우의 균형은 달인의 기본 조건이다. 교관이 학기 초부터 꾸준히 강조한 가르침이기도 하고. 다만, 안다고 다 되면 누구나 달인이 됐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