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 친구야, 그 강을 넘지 마라(5)
누가 그랬다.
포기하면 편하다고.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았다. 천제는 앉아 있는 소파가 바늘방석처럼 불편했다. 좌우에서 TV에 시선을 떼지 못하는 노인네로 인해서 좌불안석이었다.
‘이런 미친 노괴들이 다 있어!!’
노괴들을 한 번이라도 이기면 영상을 지워 주고, 200억까지 탕감해 주겠다는 무진의 제안을 덥석 받아들인 것이 실수였다.
무진에게 일방적으로 연달아 패배하면서 평정심이 무너진 것도 한몫했다. 냉정하게 판단하면 이쯤에서 그만두는 편이 나았다.
도박 중독이 무서운 연유였다.
노괴들은 질 듯, 말 듯의 간격을 절묘하게 유지했다. 가능성과 여지를 남겨 주어 어떻게든 다음 판을 이어 가도록 꼬셨다. 그런 줄도 모르고 희망을 품고 대결을 벌였다. 실제로 한 번만 이기면 모든 빚을 탕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금만 더.
한 끗 차이를 벗어나지 못했다. 연달아 열 번쯤 지자 이게 아니라는 걸 점차 느꼈으나, 노괴들의 연기에 깜빡 속았다.
-역시 젊음은 이길 수가 없구먼.
-우리도 나이가 든 게지.
-더 했다가는 본전도 못 찾겠어.
-다음에는 지겠는걸.
노괴들의 개소리였다. 나이가 들기는 개뿔, 하면 할수록 강해지고 있었다. 노익장이 아니라 노괴라 부르는 연유였다. 애초에 모든 것들이 엄살을 핑계 삼은 유인책에 지나지 않았다.
열 번을 더 지고 나서야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저 노괴들은 애초에 격이 달랐다. 그 차이가 한 끗은커녕 최소 다섯 끗은 되었다. 각성하여 벽을 넘는다고 해도, 노괴들을 이긴다는 건 하늘의 별 따기였다.
-쯧, 눈치 깠네.
-거 보게, 좀 조절하지.
-자네가 먼저 한 방 먹어 줬으면 저놈이 한 판 더 했을걸.
-다 보이는 주먹에 맞을 순 없잖아.
노괴들의 한탄에 천제는 울화통이 터졌다. 그야말로 가지고 놀았다고 봐도 무방했다. 한편으로 어이가 없었다. 노괴들은 속성, 스킬이 아닌 순수 무공으로만 상대했다. 그런데도 차원이 다른 강함을 보여 주었다.
‘이 노괴들은 다 뭐야?’
무진만 해도 골치가 아프거늘, 듣도 보도 못 한 노괴들의 등장에 한숨이 나왔다.
“땅 꺼지겠다. 젊은 놈이 벌써부터 한숨이야.”
“너만 한 나이 때 우린 용암에서 잠수하고 그랬다.”
같이 늙어 가는 처지라고 하기엔 나이 차가 있었다. 진작 우화등선하여 신선이 되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불사신들. 그럼에도 신선보다는 노괴가 어울렸다.
‘성격이 저러니까 등선을 못 하지!’
질 나쁜 노괴들을 만나서 오늘 하루가 길다 못해 1시간도 흐르지 않았다. 연무장의 밖과 안은 시간 차가 존재했다. 결계는 공간의 확장만이 아닌, 시간의 괴리가 포함되었다.
“저저저저! 강기로 쳐 죽일 년을 봤나!”
“나의 투신격에 걸렸으면 살 조각도 안 남았어!”
“저 알랑방귀 뀌는 새끼는 특히 패 주고 싶구먼.”
“그 정도로 연기가 정말 기가 막히긴 해.”
“이 나라는 연기 잘하는 연놈투성이야.”
“노래는 어떻고, 저번 트롯왕은 끝내줬지.”
화냈다, 웃었다, 칭찬했다.
조울증인가?
노망이 들었는지, 원.
노괴들이 드라마에 환장하고 있는 것부터가 정상적이지 않았다. 더더욱 환장할 노릇은, 대결을 벌인 연유가 드라마 종일권 때문이란다. 너무 오랫동안 본다고 무진이 시간제한을 걸어 놓은 것이다. 한 번 이길 때마다 하루씩 연장했다.
노괴들은 20일 연장.
천제는 빚이 2,200억.
무슨 억하심정으로!! 하늘의 농간이 아닐 수 없었다. 2,200억, 갚으려면 갚을 수 있겠으나 자금을 쓰려면 사유가 있어야 했다. 아내가 허락해 줄 리 만무했다. 그렇다고 용돈으로 해결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유일한 방도는 노괴를 이겨야 하는데, 당장은 불가능했다. 어떻게든 시간이라도 벌어야 하는 처지였다.
-연 7% 이자.
설상가상으로 이자가 붙는다. 불합리함을 따지기엔 은행의 신용 대출보다 낮았다. 신용을 철저하게 지켜 900점대를 유지한 보람이 있……기는 개뿔!
2,200억의 7%를 계산하자 눈앞이 깜깜해진다. 연마다 복리로 늘어 갈 터, 당장 갚는 편이 이득이나, 쪽팔려서 주변엔 말도 못 할 처지였다.
다들 잘사는 줄 알 텐데.
사회적 지위와 체면이 발목을 잡는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차라리 악몽이고 싶다.
그 편이 덜 괴로울 것 같다.
무진에게 지고, 노괴들에게 지고.
패배의 연속, 이보다 더 참혹할 수 있을까? 현실이 아닌 비현실의 극치를 마주했다.
‘평생 겪을 수모를 오늘 다 겪는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쯤에서 끝이 난 것이 다행일지도 모른다. 매도 먼저 맞는 편이 낫다고. 무진과 노괴들을 모르고서 길드를 통솔했다면 더 끔찍한 사태가 벌어졌을 것이다.
드륵!
문이 열렸다.
뜬금없이 마제가 거실로 들어온 것이다. 소파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천제를 보자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내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발렸다며, 호박씨는 여전하네.”
“……알고 있었나?”
연유는 중요하지 않은지, 마제는 노괴들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천제와 달리 무진을 겪어 본 마제는 노괴들과 친분부터 다졌었다.
“프라이드 사 왔습니다.”
“맥주는?”
“당연히 사 왔지요.”
“올바른지고. 확실히 배운 놈은 달라.”
왜 날 봅니까?
기본이 안 된 천제는 미간을 찌푸리다, 노괴들이 노려보자 인상을 폈다.
우웅!
마제는 대마법사 전용 아공간을 개방했다. 안에는 프라이드 20마리와 맥주 100,000cc가 있었다. 노괴들에게서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환한 표정이 나왔다.
‘나도 저 정도는 살 수 있다고!’
어제까지만 해도.
2,200억을 갚기 전에는 치킨도 못 먹게 생겼다.
아! 치킨 가격도 이젠 8만 원 시대지.
드륵!
거구의 사내가 제집처럼 편안하게 들어왔다. 노괴들에게도 건성으로 인사를 한 후, 천제를 보았다.
“피해 다니더니, 결국 발렸구나.”
“……권왕, 말을 함부로 하지 마라!”
“호오, 아직 기가 살았네. 어때, 한 판 더?”
“오늘은 날이 아니다.”
“쫄리냐?”
씨발 놈이!!
권왕의 도발에도 천제는 인상만 구길 뿐, 대꾸하지 않았다. 천불이 터지지만, 해 봤자 자신만 손해를 본다.
한탄이 나올수록 권왕의 제자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권왕의 가르침은 악명이 자자했었다. 설령 그사이에 깨달음을 얻었다곤 해도, 무진과 같은 인외(人外)를 가르칠 만한 위인이 아니다.
“정말로 녀석의 스승이 맞느냐?”
“어떻게 된 것들이 매번 당연한 걸 자꾸 묻는 거지? 이해가 안 되네.”
“당연하지 않으니까 그렇지!”
천제의 날 선 반응에 마제도 동의했다. 명예 제자일 뿐, 가르친 건 쥐뿔도 없었다. 혼자 알아서 잘 크는 녀석이었다. 굳이 스승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권왕과 자신은 명판에 불과했다.
“그딴 걸 의식하는 것부터 글러 먹은 거지.”
권왕의 대수롭지 않은 반응에 천제, 마제, 투신, 무신은 허를 찔렸는지 헛바람을 삼켰다. 일견 무식해 보이는 발언이나, 우문에 현답이었다.
스승이라고 하여 제자보다 뛰어날 필요가 있겠는가. 제자가 뛰어나다고 해서 스승이 아닌 것도 아니지 않은가. 본인들이 사제라고 한 이상 믿으면 그뿐이다.
요상하긴 해도 권왕과 무진은 가장 이상적인 스승과 제자였다. 스승이 제자를 이기려고 발버둥을 치지만. 악감정을 가졌다고 보긴 힘들다. 오히려 경쟁 상대가 있어서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보통이 아니군.’
‘저 자식은 매번 저랬지.’
우둔하여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처럼 보여도, 권왕은 의외로 핵심을 관통하는 진리를 성찰했다.
“언제까지 앞을 가리고 있을 거냐?”
권왕의 배후로, 최고 연장자가 있었다. 투신과 무신도 나이로 따지면 한 수 접어줘야 했다. 한데, 노괴들답게 나이가 안 되니, 무력으로 찍어 눌렀다. 자기 편한 대로 사는 무인들다운 태도였다.
“민성이 형, 그냥 돌아가.”
“돈도 안 내는 것들이!”
정령가의 화석과 권왕의 티격태격에 천제는 말문이 막혔다. 한국을 대표하는 최강자들이 이 안에 다 모여 있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잘났다고 떠드는 길드장들을 상기하자 허탈감이 밀려왔다.
‘우물 안의 개구리였구나!’
하늘 위의 하늘, 천외천을 안다면 겸손했어야 했다. 최고는커녕, 뛰는 자 위에 나는 자들 천지였다. 이 안에서 천제는 자연스럽게 하위 서열이 되었다. 어쩌면 맨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다 큰 어른들이 왜 자꾸 싸우세요.”
세계수를 확인하고 거실로 돌아온 무진이 잔소리하자, 거짓말처럼 다들 입을 다물었다. 이 안의 주인공이 누군지 깨닫게 해 주는 순간이었다.
“왜 우리 할아버지한테 큰 소리야!”
콩트 찍냐?
지수가 뒤에서 또, 할아버지의 편을 들었다.
가화만사성을 중시하는 무진은 지수의 꾸지람에는 반박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를 응원하는 손녀, 이는 당연한 진리였다. 그 앞에서 편든다고 나무란다면, 명백한 위선이었다.
무진은 타깃을 돌렸다. 원래 할 말 없으면, 시선을 돌리는 게 가장 속 편하다.
만만한 상대도 있고.
“천제께선 이대로 끝내실 건가요?”
“여기서 얼마나 더 빼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냐?”
“쳇, 빈털터리였나.”
“뭐라꼬?”
“혼잣말입니다.”
울화가 치밀어서 도전을 외치려다 급히 입을 닫았다. 위험했다! 이게 다 저 괴물 같은 녀석의 상투적인 수법이었다. 일단 걸려들면 이제는 빠져나가기도 어렵다.
천제가 발을 빼자, 무진은 마제 사부에게 눈짓을 보냈다. 무엇이 길드 연합을 위해 필요한 일인지 이제는 결정해야 했다.
“혈제가 나이보다 혈기 왕성하긴 하지.”
“믿을 수 있는 분인지는 모르겠네요. 아들 새끼는 되바라져서 말이죠.”
“혼자보단 낫지 않을까?”
“공동체 의식은 좋은 거죠.”
무진과 마제의 대화에 천제는 콧방귀를 뀌었다. 공동체 의식이라니, 물귀신 작전이었다. 나만 당할 수 없다는, 그런 추잡한 짓을 자신보고 하라는 것이다.
“평안 감사도 본인이 싫으면 그만이지 않나.”
“하긴, 천제께선 좋은 분이니까요.”
무진의 올려치기였다. 넌 좋은 사람이니, 오늘 일을 혼자서 담고 가라는.
‘내가 왜?’
천제는 생각했다.
추잡한 짓이긴 해도, 품위는 망가질 대로 망가진 지 오래였다. 혼자만 안고 가라고?
누구 좋으라고!
혈제를 비롯한 길드장들은 권왕에게 당한 망신을 밝히지 않았다. 대결 자체를 했는지도 모르게 기밀에 부쳤다. 그래야 혼자만 당하지 않으니까. 은연중에 권왕과 붙으라고 바람 잡는 것도, 엄밀히 말하면 물귀신 작전이었다.
결심을 굳힌 천제는 손익계산에 들어갔다. 무슨 일을 하건, 자본주의적 개념은 중요했다.
내가 얼마를 손해 봤는데.
“인당 얼마인가?”
“10억이면 어때요?”
“20억은 줘야지.”
“할 사람은 길드장님 말고도 많아요. 제가 못해서 부탁드리는 것도 아닌데.”
“10억 좋지.”
사람은 다 똑같았다.
무진의 수완에 거실의 모든 이들은 질려 했다. 이 바닥에서 천제도 나름 공평무사한 인물로 정평이 나 있거늘. 한 사람을 타락시키는 데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이제 통합은 다 됐군.’
사실 천제만 끌어오면 길드 연합은 자연스럽게 딸려 올 수밖에 없다. 왜냐고? 혈제의 인망으론 길드 연합을 다스리지 못한다. 다크니스와 직접 손을 잡지만 않았을 뿐,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한 불법이 많았다. 선만 조금 더 넘었으면 다크니스와 엮어서 보내 버렸을 것이다.
모든 일의 시작은 수신제가였다.
내부를 통합하지 않은 상태로 치국을 논하는 건 어리석음의 소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