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6. 우리나라 아니잖아(3)
무진은 왼팔을 지수에게 양보하면서도, 그리드5의 다음 행보를 살폈다. 구대문파를 가볍게 보고 지금쯤 호되게 당했을 테니. 본부와 반대 방향으로 도망쳤다면 이쯤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도주라는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지 않았음에도, 만약을 대비한 걸 보면 치밀한 성향이었다.
지수가 쓰러뜨린 자들은 도주 시 추격자를 제거하거나, 시간을 끌기 위해서 숨겨 놓은 방수였다.
스윽!
무진은 아공간을 개방한 후, 허공섭물을 펼쳤다.
아공간에서 뻗어 나온 막대기가 음과 양으로 분리되어 일대에 흐름을 형성한 후 4개의 지류로 뻗어 나가 지점을 찍는다. 이어서 8개로 기운이 분리되어 허공에 방진을 만들어 변화를 이룬다. 마지막으로 5에서 9로 변화무쌍하게 변화하자 원래의 흐름으로 돌아온다.
“뭘 한 거야?”
“결계.”
자아만상결(自我萬狀結).
일극음양사상오행팔진구궁의 묘리를 나름대로 해석하여 고유한 결계를 만들었다. 나의 의지를 관철하여 상대방의 정신을 관통하는 환영 결계였다.
“아무런 변화가 없는데?”
“자아를 관철한다고 했잖아, 말 그대로 네가 돼지로 보면 돼지가 보인다는 뜻이다.”
인간은 자기가 보고 싶어 하는 대로 보는 욕구가 강하다. 본인을 객관적으로 보려고 해도, 궁지에 몰릴수록 결국에는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이를 이용하여 만들어 낸 환영 결계였다. 본인이 보고 싶은 걸 극대화한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정말로 여기로 올까……요?”
“저기 오잖아.”
무진이 가리키는 방향에서 검은 그림자가 일직선으로 쇄도했다. 너무 빨라서 장위의 안목으론 보이지 않을 수도 있으나, 결계를 이용해서 확인시켰다.
“우릴 못 보네.”
“건방진 짱개야, 은근슬쩍 다시 말 까지 마라.”
“옙!”
존대와 평대에서 간을 보려던 장위는 한국인이 짜게 먹는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했다. 괜히 어설프게 숟가락질하면 국물도 없었다.
***
“허, 당했구나!”
덩그러니 남겨진 검신은 낭패한 기색이 완연했다. 신승과 검성의 혈채를 받아 내기는커녕 함정에 걸렸다. 오감의 영역을 벗어나 초인의 영역인 육감에 도달한 감각마저 교란한 결계였다.
“경신은 공간 속성을 숨기기 위한 연막이었군.”
극성의 보신경으로 잔상을 만들어 공세를 펼치려고 했던 일련의 과정들이 공간 속성으로 함정을 파기 위한 설계였었다.
까맣게 모르고 철저하게 놀아났다. 지금 검신의 두 눈은 블랙아웃이 된 상태나 다름이 없었다.
추우욱!
압력이 점점 거세지고 있는 가운데, 내력이 빨려 들어갔다. 이대로라면 공간에서 압사하거나, 고사할 수 있었다.
일반적인 결계였다면 베어 내면 그만이지만, 어지간한 검력으론 흠집을 내기도 힘들고 회복이 너무 빠르다.
집중하여 검력을 쏟아 내고, 회복되지 않도록 유지해야 했다. 게다가 한 층으로 되어 있지 않았다. 놈은 이 와중에 겹겹으로 결계를 뒤집어씌웠다.
뚫어 내도 수복되는 갯벌처럼 밀도 높은 끈적한 결계였다. 결계에 거리를 두어 층을 만들어 회복할 시간까지 염두에 두었다.
그런 데다 무공도 만만치가 않았다. 놈에게 여유가 있었다면 결과가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 아니, 여유가 있었다면 시간을 두고 자신을 철저히 괴롭혔을 테지.
“쓰벌! 완전히 당했네. 아후, 쪽팔려!”
딱히 숨기지 않았던 검신의 본성이 튀어나왔다. 주변에 혼자 덩그러니 있기도 하고. 여하튼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 여유를 가지고 상대하다가 역으로 당했으니, 어디 가서 검신이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웠다.
“내가 다른 건 다 참아도 나 건드리는 것들은 못 참지!”
한때 질풍검호라 불렸고, 그 이전에 무당광견으로 불렸던 검신의 천성이 튀어나왔다.
품위를 버렸다. 그러자 순수 전투력이 검과 맞물리면서 신검합일의 무형검강을 완성한다.
“뒈져랏!”
스와아악!
품위 넘치고 고귀했던 무당검공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그야말로 야차와 같은 칼부림이었다.
뒈져, 뒈져!
죽은 신승과 검성은 친구지만, 둘은 검신과 같은 삼천에 오르는 걸 굉장히 싫어했다고 한다.
***
흠.
루이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구대문파의 습격이 있었던 직후, 곧바로 신호를 보냈다. 전파방해를 염두에 두고 빛의 반사를 이용했다. 이쯤이면 밀룡단이 마중을 나와야 한다.
“설마?”
이마저도 눈치를 챈다고?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다. 상식적인 선을 넘어선다. 예지에 가까운 능력을 발휘하지 않고서야. 더욱이 예지란 일반인과 달리 각성자에게 잘 통하지 않는다. 세계의 법칙과 각성 변수로 인해서 예지한다고 해도 대부분 뒤틀린다. 주식이나 도박은 예지가 간간이 통하는 편이기는 해도.
“그럴 리 없다~~!”
루이스는 단호히 부정했다.
자신이 한 놈에게 한 번도 아니고, 몇 번이나 농락당한다고? 그럴 리 없다.
그러나 점점 불길한 위화감이 번지고 있었다. 가도 가도, 밀룡단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번호판이 이쯤이면…… 같아?”
아까와 다르지 않은 번호판을 봤다. 주변을 돌아보니 밀룡단이 기다려야 했던 장소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다.
빠득!
어처구니없는 현실이었다.
검신마저 농락한 공간의 마술사라 자부하는 루이스였다. 자신이 같은 공간을 몇 번이나 내달리고 있었다.
이럴 수가 있을까?
차라리 장막 뒤에 숨어 암습을 가했다면 이렇게까지 분노가 치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구냐~~~~?”
극성에 도달한 무상천뢰공(無上天雷空)이 발휘되며 자력마후(磁力魔吼)를 발생시켰다.
자장과 음파로써 결계를 깨 버리는 극성의 사자후.
의문과 동시에 도발하여 정체를 밝히려는 루이스의 외침이었다. 그러나 대기가 자장과 마후의 영향으로 잠시 흔들렸을 뿐이다.
“감히!”
정체를 모르기는 해도, 예측은 할 수 있었다. 이 모든 사태의 시발점, 판을 만들어서 끌어들인 주석의 와룡이 분명했다. 전면에 나서지 않고 음지에 숨어서 심계를 부리는 장막 속의 군사인 줄 알았거늘.
“흥, 여기까지 와서 모습을 감추다니, 쥐새끼처럼 겁이 나는 모양이구나!”
입을 쉬지 않고 놀리며 상대를 심리적으로 도발하는 루이스였다. 한편으로 공간에 뇌력을 발산하여 점을 찍고 있었다.
슈슉!
뇌전질풍보와 군림보를 발동하여 결계의 흐름을 끊어 내려고 했다. 결계는 여전히 빈틈을 보이지 않으며 루이스의 방향을 어지럽혔다.
반복적인 대치가 계속되고 있었다. 어떻게든 탈출구를 찾아내려는 루이스의 발버둥처럼 비쳤다. 그도 그럴 것이 루이스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지고 있지만, 소득은 전혀 없는 무의미한 행위가 되어 갔다.
슈슈슝! 우웅!
체력이 빠져 쓰러질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실제로 결계는 굉장히 단단하며, 완벽에 가까운 환영을 일으켰다.
“훗, 건방 떠는 것도 지금뿐이다.”
분주하게 움직였음에도 소득이 없는 것처럼 보였을 뿐. 화를 내며 분노했던 루이스의 표정은 얼음장처럼 무심해졌다.
스페이스 브레이커.
이유 없이 사방팔방으로 미친 듯이 뛰어다니지 않았다. 방점을 찍듯이 자장을 심어 넣으며 이때를 기다렸다.
자장을 극한으로 발동하여 공간을 끌어들이며 축약한다. 그리고 모인 힘을 일거에 토해 내며 공간을 부서뜨린다.
쩌저저저적!
챙그랑!
균열을 버티지 못한 유리잔이 깨지는 듯한 광경이 펼쳐졌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 깨져 나가며 환경이 바뀌었다.
“거기더냐!”
목표를 탐지한 루이스가 무섭게 쇄도했다.
헐!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도랑 치고, 가재 잡는 광경이었다. 장위는 무진의 결계가 이토록 무시무시한 것인 줄은 미처 몰랐다. 간단히 치길래 원터치 텐트인 줄 알았더니, 살림살이 장박 텐트였다.
목표물은 우리 안에 갇힌 상처 입은 짐승과 같았다.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것이 이해되면서도 도통 모르겠다.
‘대체 뭘 보고 있는 거야?’
안에서 보는 것과 밖에서 보는 진실은 달랐다. 멀리서는 희극, 가까이선 비극이 펼쳐졌다. 본인 딴에는 탈출구를 찾은 듯 득의양양하지만, 실제는 결계 안에 있었다. 러시아 마트료시카 인형처럼, 쳇바퀴를 도는 꼴이었다.
‘보는 사람도 환장하는데.’
그나마 본인은 모르고 있었다. 결계를 벗어난 줄 알고, 줄기차게 내달리고 있었다. 정신은 밖으로 나가고 있으나, 육신은 안타깝게도 동네 한 바퀴였다.
‘그래도 보통이 아니구나!’
함정에 빠져 허우적댄다고 조롱하기에는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았다. 결계 밖에 있기에 망정이지, 안에 있었으면 예전에 죽었을 것이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목표물은 검신과 구대문파의 기습에도 태연히 빠져나왔다. 거미줄보다 촘촘한 천라지망으로도 가두지 못한 자를 경시할 만큼 눈치 없진 않았다.
‘나였으면 뼈도 못 추렸겠지.’
저런 거물조차 눈치채지 못하게 가둔 무진이 더더욱 대단해 보였다. 앞으로도 대형으로 모시며 단물을 잘 빨아 먹기로 마음먹었다. 적이 되면 가장 골치 아픈 유형임을 당해 봐서 알고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하려는 거지?’
단순히 잡아 놓기만 하고 있을 거면 여기까지 와서 기다릴 필요가 없다. 슬슬 결계에 변화를 줄 필요가 있었다. 이러다가 구대문파나 검신이라도 오면 죽 쒀서 개 주는 꼴이었다.
숟가락 사냥꾼, 장위는 조급해졌다.
“슬슬 사로잡아야 하지 않을까요?”
“재밌잖아, 좀 더 보자.”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무진을 보고 장위는 문득 소름이 돋았다. 이 인간이 한국에서 한 짓이 떠올랐다. 재미를 위한 유희, 순수한 악의였다. 한편으로 제정신인지 머리 뚜껑을 따 보고 싶기도 했다.
“시간이 부족한 거 아니었습니까?”
“시간은 내가 정해.”
이 일대에 결계를 이중으로 쳐 놓았다. 범위를 확장하고, 비틀어 놓아 찾아내는 것 자체로 시간이 걸린다. 장위의 걱정은 애초에 의미가 없었다.
‘어려운 일도 아니고.’
안에서 빨빨거리는 놈이 알아서 결계를 쳐 주었다. 이미 만들어 놓은 결계를 활용했다.
쩌어엉!
한참을 내달리던 놈이 그제야 이상함을 눈치채고, 분노했다. 뇌기를 집중하여 관통력을 극대화시킨 것이다. 파괴력을 일점에 응축하여 작은 구멍이라도 내자는 심산이다. 구멍이 뚫리는 즉시 보신경을 펼쳐 빠져나가려는 것이다.
그럴듯한 계획이나.
무진에게 임기응변은 통하지 않는다.
“지수야.”
“나만 믿어, 여보!”
컨셉 확실하네.
구멍이 뚫리면 막으면 그만. 지수가 송곳처럼 찌르고 나온 뇌기를 주먹으로 잡도리했다. 자고로 모난 돌은 정을 맞아 반듯하게 변하기 마련이다.
꽈앙!
저런 무식한!!
장위는 이 커플을 화나게 하지 않겠다고 재차 다짐했다. 이러면 보통은 망가져야 정상인데, 이게 또 통한다.
잘!
크윽!
유린 줄 알고 송곳으로 찔렀더니 방탄유리였다.
가공할 반진력에 뒷걸음을 친 루이스는 끓어오르는 분노에 이성을 잃을 뻔했다. 결계를 깼다고 착각했을 뿐, 실제는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었다. 놈의 손바닥 위에서 철저하게 놀아났다. 그걸 지켜보며 비웃었을 걸 상기하자 참을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냉정을 잃으면 위험하단 걸 알면서도 주체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당장은 기혈을 뒤틀리게 한 침투경부터 해소해야 했다. 늦을수록 내부에 침투한 패도무쌍의 거력이 무상천뢰공의 운기행로를 방해했다.
“부끄럽지 않더냐! 네놈도 무인이라면 나서라!”
정체를 확인하지 못했지만, 방금의 충돌만으로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상대는 절대경에 오른 무인이었다. 그런 자가 장막 속에 숨어서 내외력이 소모되기를 기다렸다.
무인의 자존심을 건드려 평정심을 흔들어 보려고 했거늘.
…….
루이스의 노력은 허사였다.
대꾸는커녕 관통했던 공간도 어느새 주변의 흐름에 동화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결계가 가변하여 같은 수법은 통하지 않았다. 자신이 보는 위치가 정답인지 확신할 수 없게 했다.
부르르르!
무서울 정도로 계산적이고 철두철미한 놈이다.
현실을 깨달을수록 루이스의 뇌리는 차갑게 식었다. 불필요한 심계로 마나와 체력을 소모할 때가 아니었다.
다행히도 결계는 흡수진이 아니라 생각할 시간을 벌…… 망할!
크윽!
너의 생각을 알고 있다는 듯, 결계의 흐름이 다변하더니 마나를 미친 듯이 흡수하기 시작했다. 대꾸만 하지 않을 뿐, 시간을 끌어 보려는 개수작은 통하지 않는다는 도발이었다.
‘결계를 부순 후 네놈의 심장을 생으로 뽑아 주마!’
죽이는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자신을 이토록 화나게 하는 놈은 처음이었다.
‘네놈은 결계를 변화시키지 말았어야 했다.’
흡수진이 되면서 부자연스러운 흐름이 느껴졌다.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노린다면 결계를 무너뜨릴 수 있었다.
무상천뢰공을 극성으로 끌어 올린 후, 공간 속성 [허공제어]를 뇌전질풍보와 연계했다. 동시에 장악 스킬을 발동하여 제어된 공간을 정지시켰다.
쩌어어엉, 퍼퍼펑!
공간을 장악하여 흐름의 다변을 막았다. 무상천뢰공이 실린 천뢰강(天雷剛)에 파격이 생기더니 비집고 들어갈 틈이 생긴다.
“이때다!”
꽈아아아앙!
뚫고 나오는 부분을 결계가 아닌 무력으로 막아 세운다. 패도무쌍의 권강이 뇌강을 받아치며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고 포효하는 듯했다.
어디 뚫을 수 있으면 뚫어 봐.
쩌어엉!
꽈아앙!
권강과 뇌강의 다툼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렸다. 보기에는 대등한 격전이나, 다급해진 쪽은 루이스였다.
“이놈이 끝까지~~~!”
결계 안과 밖의 차이는 컸다. 소모되는 내외력의 양은 물론, 상대는 뻔히 보고 있는 반면에 자신은 눈뜬장님이었다.
환경은 최악이고, 의도는 읽히는.
“죽여 버릴 테다!”
분노가 골수까지 스며든 루이스가 악에 받친 살기를 뿜어낸다. 살기를 마주하기만 해도 죽음을 연상케 한다.
팡팡팡!
커억!
지수는 시큰둥했다. 수시로 무진과 할아버지와 대련하는데, 이딴 살기에 반응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