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4. 네고(1)
흐억!
폐부를 깊숙이 찌른 검이 빠져나갔다. 바람 빠지는 신음과 함께 맥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털썩!
다크니스의 마스터들이 나선다면 작금의 위태로움은 해결할 수 있었다.
어떻게든 버텨 보려고 했거늘. 기다림은 희망이 아닌 절망을 선사했다.
혈검후의 검이 기맥을 꿰뚫었고, 검경에 오장육부가 갈가리 찢어졌다. 소모된 내력을 되돌리기엔 본원진기에 타격을 받았다.
꽈드득!
패배보다 더한 짙은 배신감.
환검가주는 치를 떨었다.
그러다 무심코 주변을 돌아보았다.
헉!
보고도 믿기 힘든 광경.
가주들을 밀어붙이던 대장로의 머리가 사라졌고, 혈혼강시는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생사를 건 악전고투였다면 이해라도 하지, 촌음에 지나지 않았다.
환술로 인해 악몽을 꾸지 않고서야.
“부질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이럴 순 없어, 있을 수 없다고!! 전부 현실이 아니야~~~!”
“그리 부정하며 악몽 속에서 영원히 살거라.”
“저놈은 대체 뭐냐고?”
혈검후의 말은 환검가주의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가문의 승리를 위해서 양심까지 팔아넘기며 살아왔다. 이제야 겨우 일본 제일검가를 실현할 때가 되었거늘.
어찌 이리 허망하단 말인가?
저놈 때문이다!
환검가의 야망을 한낮의 신기루로 만든 장본인.
그간 어릿광대라 비웃었던 애송이었다니!
잔인한 현실에 비현실을 주장한다.
현역도 아닌 생도가 가문의 정예를 일순간에 전멸시켰다. 만화에 진심인 본국의 진성 오타쿠도 쌍욕을 박을 개연성이었다.
오늘 일이 알려진들 신뢰하기 힘든 거짓말이었다. 상식적인 인과를 깡그리 무시한 진실을 누가 믿으려고 하겠는가.
그렇다고 한들 이제 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돌이킬 수 없다.
하아.
죽음이 다가올수록 환검가주는 미망에서 깨어났다. 처음부터 이러려고 하진 않았다. 다크니스의 집요하고 달콤한 유혹에 판단력이 흐려진 것이다.
“크하하하하, 참으로 웃기는 세상이야! 다크니스여, 세상을 다 가진 척 잘난 체하더니 애송이한테 철저하게 농락당했구나. 그런 주제에 어찌 천하를 지배하겠다고 큰소리를 친 것이더냐?”
“패자의 구차한 변명이로구나. 그런다고 내 검에서 사정을 바라진 말거라.”
“나도 이용당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기어이 가문까지 멸하겠다는 건가?”
“당연한 소릴 하는구나.”
“지독한 년, 기대도 하지 않았다! 갈 때 가더라도, 네년만은 죽여 주마!”
환검가주는 살길을 버렸다.
저 지독한 년이 자신을 살려 줄 리도 만무한 데다, 자식의 복수를 한답시고 가문과 연관된 혈족들은 남김없이 죽이고도 남을 성정이었다.
세간의 질타와 정부의 법으론 혈검후를 막지 못한다. 저년만은 반드시 죽여야 했다. 그것이 멸문을 막고, 법적인 처벌로 끝나는 길이었다.
동아줄이 끊어졌다면, 스스로 길을 연다.
환검가의 가주로서.
번뜩!
혈검후는 눈빛이 붉게 물들었다.
아들의 혈채를 받아 내려면 환검가주의 처참한 죽음이 필요하다. 편히 지옥으로 떨어지길 바라지 않는다.
씨익!
오싹한 살의에도 환검가주는 조소를 지었다. 살아 있을 때나 잘할 것이지, 죽고 나선 아무런 의미가 없다. 현실은 산 사람이 만들어 가기 때문이다.
“명검가의 불행은 네년이 자초한 업보다. 네 아들놈은 지옥에서도 어미를 원망하고 있겠지.”
“네놈은 알아야 한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가져올 나락을. 이 검으로 전부 지옥으로 보내 주마.”
냉정한 말투와 달리 혈검후의 속내는 활화산처럼 분노하고 있었다. 내색하지 않았을 뿐, 자식의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일 어미는 없다.
쐐액!
혈검후의 명악검에 폭발적인 검경이 담겼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아들을 잃은 어미의 한이 실려 있었다.
변화를 알아챈 환검가주의 미소가 짙어졌다. 일방적으로 밀리긴 했어도, 아무런 대책도 없이 당하진 않았다.
사악몽환술(邪惡夢幻術)을 펼치고, 환마향(丸魔香)을 사용해 빈틈을 노렸다. 강건했던 혈검후의 냉철한 이성이 흔들린 이때 효과를 발휘했다.
슈아아악!
검이 생사를 가르는 선을 베어 버린다.
찰나.
일촉즉발.
혈검후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이질적인 감각을 확인한 즉시 몸을 틀었다. 완전한 사각은 아니더라도, 환상으로 육신을 숨긴 환검가주가 옆에서 나타났다. 급히 명왕섬을 밟아 환검가주의 반격을 막아서려고 했다.
“늦었다!”
반격할 타이밍까지도 계산한 환검가주였다.
1차, 2차로 환영에 간격을 두어 거리감에 혼선을 주었다. 초월경에 오른 혈검후의 감각을 완벽히 속이기란 불가능하나, 그것이면 족하다.
스륵!
이 거리에서 혈검후와 승부를 본다.
살을 내어 주고 뼈를 취하는 이대도강이 아닌 목숨을 버려 가문을 수호하는 가미카제였다.
찌릿!
뇌리를 스치는 섬뜩한 위기감.
혈검후가 재차 검로를 틀지만, 환검가주의 동귀어진이 먼저였다.
“같이 가……!”
스왁!
검로의 일로, 이로, 삼로를 비틀었으니 시간의 차는 당연하거늘. 서로의 검이 치명타가 되어야 했다.
예상과 달리 혈검후의 검이 환검가주의 목을 베고 지나갔다.
스르르!
환검가주의 두 눈에 빛이 사라진다. 목에 혈선이 짙어지더니 미끄러졌다. 바닥을 구른 환검가주의 수급엔 멸문을 막지 못했다는 자책이 남아 있었다.
‘누가?’
혈검후의 검이 더 빨랐다고 하기엔 놀라는 눈치였다. 곧 신색을 회복한 후 한숨을 내쉬었다.
“송구합니다, 주군.”
“알면 됐어.”
일련의 사태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환검가주의 자폭을 알아챈 무진이 공간을 장악한 후, 홀드를 걸었다.
온전한 혈채를 원하는 혈검후를 위해서 나서지 않았을 뿐. 방심으로 인해 소중한 인재를 잃을 순 없다.
‘암, 이보다 훌륭한 안테나는 찾기 힘들지.’
혈검후는 일본 제일의 연장자이자, 최강의 검객이었다. 반로환동을 괜히 시켜 주지 않았다. 앞으로도 일본 내 일 처리를 수월하게 하려면 필요했다.
“환검가에 대한 혈채는?”
“적법한 절차대로 진행할 겁니다.”
“과연, 훌륭한 뻥카였어.”
“받은 대로 돌려줬을 뿐이에요.”
죽어서도 편히 가지 못하도록, 아들을 잃은 어미의 통쾌한 복수였다. 그러나 선을 넘는 행위까지 봐줄 순 없다. 죄를 지은 책임의 범위에 연좌제를 옹호하진 않는다. 진정으로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면 관용도 필요했다.
***
검가연합의 대승.
여론은 검가연합의 승리를 기원하면서도, 베팅을 해야 한다면 환검가에 걸었다.
검가연합의 승리는 기적이나 다름이 없었다. 일방적인 패배를 당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방송이 아닌 개인 SNS로 천검가의 성채를 부순 환검가의 파멸적인 병기를 선보였을 때까지만 해도 검가연합의 패배는 확실시되었었다.
-이걸 이기네. 이럴 줄 알았으면 역배에 걸걸!!
-정의는 원래 승리하는 법이야.
-개뿔, 언제부터 정의가 승리했다는 거야? 인간의 역사는 언제나 승자의 정의였어.
-권선징악이 그래서 힘든 거지. 쉬운 거였으면 그딴 말이 나왔겠어.
-대승이라고 하기엔 피해가 심각한 것 같던데, 죽은 사람도 많았어. 법적인 절차를 고려하면 머리가 다 아파 온다.
-300 vs 2000에서 1000이 넘게 뒤졌는데 이걸 승리라고 할 수 있나?
-검가연합이 환검가 하나 잡겠다고 그 난리를 친 것도 우스운 거지. 일대일 맞다이로 공평하게 이겼어야 했어.
-나는 다크니스 소속이다. 허튼소리를 한다면 찾아가겠다.
-……?
방금까지만 해도 댓글로 도배가 되었던 공간에 한참의 공백이 생겼다. 실제로 그럴 리는 없겠지만, 세상에 만약은 없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인터넷에서만 무쌍을 찍는 인터넷 워리어들의 습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익명 앞에선 여포처럼 당당하지만, 면전에선 침묵으로 일관하는 찐따.
-뻥인데, 쫄았네. 크크크크!
-이런 씨발, 너 나와, 뒤졌어!
-다크니스 후쿠시마 지부장 샘 워리어다. 아이피를 추적하고 있으니 곧 만나겠군.
-……죄송합니다, 다시는 함부로 말하지 않을 테니 찾아오지 마세요.
-크크크, 병신! 이걸 또 믿네. 아이피 추적을 아무나 하냐?
-개새끼가, 이번엔 진짜야! 만나자고!
-도쿄에 있군, 곧 찾아가지.
-……아니에요. 오지 마세요. 저 오사카 살아요!
-찍었는데, 겁은 더럽게 많아요.
-나 한국인, 이거 한국에서 유행하는 진따 퇴치법이다. 몇 번을 해도 먹히더라.
보통은 댓글에 대댓글로 허세를 부리는 경향이 강했으나, 이번에는 분위기가 달랐다. 농락당했음에도 도둑이 제 발 저리거나,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는 검가연합을 압도했던 환검가의 저력이 다크니스의 지원에 기인했기 때문이다.
다크니스의 실체는 알려진 부분이 많지 않았다. 이는 두려움을 자극하는 요인이 되었다. 그간 말도 많고, 탈도 많았으나 다크니스에 대해서 정확히 아는 이들이 드물었다. 그런데도 각국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일본만의 문제가 아닌 한국, 중국에서도 다크니스로 인해 혼란을 겪고 있었다. 어느 한 국가의 일로 치부할 수 없는 국제적인 협약이 필요했다.
천검가 내빈실.
불과 반나절 만에 퍼진 대내외적인 소문과는 달리 천검가의 물적 피해는 생각보단 작은 편이다. 외성은 폭격을 맞아 처참하지만, 내성은 멀쩡했다. 다만, 인적 피해가 커서 처리에 시간이 걸리고 있었다.
유럽과 일본 전통 양식이 절묘하게 어울리는 내빈실에 검가연합의 가주를 비롯한 수뇌부가 모였다. 피해 처리는 가문의 손해 평가 전문 조사관이 나서서 협의 중이다.
내빈실의 상좌에 무진이 앉았다.
에도성에서 예절 교육을 이수한 가주들을 제외하고, 어제까지의 검가연합 수뇌부였다면 언성을 높이거나, 불만이 나왔어야 했다.
누구도 무진에게 따지지 않았다.
스윽!
움찔!
되레 눈을 마주치기만 해도 갑자기 부끄러움이 생겼는지 피하기에 바빴다. 혹여, 피하지 못했을 때는 눈알이 갈피를 못 잡고 경련을 일으켰다.
“누가 잡아먹는 것도 아니고. 혹, 실수라도 했나? 기억이 날 것도 같아.”
무진이 마땅치 않은 표정을 짓자.
가주들이 급히 말문을 열었다.
“대체 누가 자네에게 실수를 범했나? 내 명예를 걸고 반드시 찾아내도록 하겠네. 참고로 우리 천검가는 절대 아니라는 것만 알아주면 되네. 다른 가문이면 모를까.”
“어허, 큰일 날 소릴!! 이거 보시게! 나는 팔이 잘렸었어!”
“다시 붙였으면서 엄살은!! 검을 쓰다 보면 잘릴 수도 있지! 유난 떨지 말게!”
“유난이라니, 팔이나 잘려 보고서 그딴 말을 하시지!”
“폭검가가 아무래도 의심스럽긴 해.”
“이 작자가 말이면 단 줄 아나! 우리도 누울 데를 보고 누울 줄 안다고!”
“누울 데가 관이었던가? 어울리긴 하는구먼!”
가주들의 언쟁은 가관이었다. 어떻게든 가문의 희생과 노력을 어필하기 위해서 발악했다. 가문을 위해 위엄과 명예를 포기하는 점은 현실적이었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차이를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괜히 자존심 세우다가 지금보다 더한 나락을 경험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