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6. 네고(3)
이 망할 인간이!!
돈이 들어가야 예의가 갖추어진다. 이놈은 전생에 파친코였을 게 분명해. 돈이 떨어지면 언제든 야쿠자가 되는 거 아냐?
미츠키는 정신줄을 단단히 부여잡았다.
이 인간의 페이스에 말리면 한도 끝도 없이 말리다가 거지꼴을 면치 못한다. 듣다 보면 나도 모르게 연대보증을 선 이후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마냥 시간을 끌 수도 없다. 무진이라면 일이 끝나자마자 자국으로 돌아가 버릴 수도 있었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는 시간은 비행기로 1시간도 걸리지 않지만, 미츠키의 신분상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다.
“이번 전쟁에 개입한 다크니스의 전력을 알고 싶어.”
“나를 잣대로 쓰겠단 거구나.”
“네가 아니면 본국의 누구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가 없으니까.”
“현실을 정확히 보는 안목이야말로 수장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덕목이긴 하지.”
여론은 검가연합과 환검가의 전쟁으로 봤을 테지만, 내막은 무진과 다크니스의 대리전에 불과했다.
앞으로의 싸움도 이런 식이라면 최소한 다크니스의 전력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근거가 필요하다. 그래야 황실과 정국을 이끌어 갈 방향을 정할 수 있었다.
“마스터를 기준으로 하면 엠페러나이트나 혈검후가 최소 3명은 되어야 해. 그것도 속성과 스킬을 제외했을 때의 결과야.”
“검가의 가주들론 상대도 안 되는구나.”
황실 대부 세이토의 반발이 예상되었지만, 황궁을 습격한 자들과 겨뤄 본 직후라 현실을 직시했다. 마스터도 아니고 일개 수하에게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무진의 친구들이 적시에 나서지 않았다면 참혹한 결과를 불러왔을 것이다.
‘참담하구나.’
일본 제일은 세계 제일과 다르지 않을 줄 알았다. 차이가 있다고 한들 미미하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무지한 자신감이었다.
격차를 좁히기는커녕 갈라파고스에 지나지 않았다. 격차는 벌어졌고, 당장은 따라가기도 벅찼다.
세이토는 다크니스가 본격적으로 나섰을 때가 두려워졌다. 이 늙은 목숨을 버려 조국을 구할 수 있다면 다행이나, 그조차도 불가능한 현실이었다.
무진은 공주와 대부의 참담함에도 객관적으로 평가했다. 격려와 위로로 현실을 바꿀 수 있다면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었다. 무의미한 조작과 날조는 자기만족과 현실도피에 지나지 않았다. 이럴 때일수록 날것 그대로를 바라볼 필요가 있었다.
‘이게 진짜는 아니겠지만.’
황실과 검가연합도 전투의 내막을 정확히는 모른다. 승전은 했어도, 어떤 형태로 흘러갔는지 알지 못했다. 그렇다고 물어보기도 당장은 어렵다. 내막을 파헤칠수록 서로에 대한 반감이 쌓일 수밖에 없다.
그 증거로 황실은 우리 일행의 능력치를 검가연합에 정확히 알리지 않았다. 황실과 협조해 격퇴했다는 식으로만 전달했다.
사실대로 전달하기를 꺼린다는 의미가 된다. 황실과 검가연합은 다크니스란 공적을 상대해야 하지만, 여전히 서로를 신뢰하지 않았다.
“우리 애들 실력 때문이지?”
“맞아, 대체 어떻게 그사이에 이렇게까지 달라질 수 있는 거지? 너나 지수는 몰라도, 실력을 숨겼다는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무진이나 지수는 논외로 쳐도, 유정과 혜진이는 교류전 당시와 비교하면 천양지차였다. 비교 자체가 어불성설일 만큼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얼굴을 가렸다면 아예 다른 사람으로 착각했을 것이다.
“정해진 스케줄대로 하루하루 부단히 훈련한 성과야.”
“그럼 우린 하루하루 놀고먹었단 거야?”
“재능의 차이도 있겠지.”
“개소린 집어치우고, 다크니스를 상대하려면 우리의 힘도 필요하지 않겠어?”
다크니스로서도 이번엔 치명타를 입었다. 7명의 마스터 중 3명을 잃었으니 4명밖에 남지 않았다. 잔뜩 독이 오른 다크니스가 어떤 짓을 할지 아무도 모른다.
규모를 짐작하기 힘든 다크니스의 저력을 고려하면 하나보다는 둘이, 둘보다는 셋이 합심할 때였다. 개인플레이를 했다가는 최악엔 각개격파를 당할 수도 있었다.
“제법 시세를 파악할 줄 알게 됐구나.”
“한·일·중의 교류는 기정사실일 테니까.”
미츠키는 무진이 중국과도 교류를 맺고 있음을 짐작했다. 일전 주석과 총리의 정권 다툼을 돌이켜 보면 무진이 개입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중국과의 협상이 먼저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어떻게든 중국보다는 우호적인 협상을 맺어야 하기에 다급할 수밖에 없었다.
“협상을 하시겠다?”
“전폭적인 협력은 물론, 어떤 말이든 따를게. 국제조약으로 만들어 줄 수도 있어.”
“국가 간의 협약이야 나중에 얼마든지 파기할 수 있지 않나.”
“그것도 네 능력을 보기 전까지지.”
미츠키는 거짓을 입에 담지 않았다. 그런다고 속아 줄 인간도 아니고, 의도적으로 속물근성을 드러냈다. 그러는 편이 공감을 끌어내는 데 용이했다.
“솔직히 구미가 당기진 않아.”
“비밀은 보장할게.”
“얼마나?”
“20명 선이면 어때?”
“욕심이 많네.”
“나로선 파벌 싸움을 벌일 만한 힘이 아직은 없어.”
황실과 신왕의 세력이 갈려 나갔다고 해서 미츠키의 파벌이 단숨에 확장되진 않는다. 손을 잡아도 아직은 유약한 뼈대에 살만 붙인 꼴이다. 무진의 강함이 드러날수록 관계를 엮는 패로만 쓸 수도 있었다.
미츠키는 주변에 이용당하거나, 볼모가 되고 싶지 않았다. 무진과 다니면서 험한 꼴을 많이 당했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해졌다. 어지간한 일에는 놀라지도 않는 강심장은 물론, 뻔뻔함을 가지게 되었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20명은 너무 많아.”
“방도가 있기는 있구나!”
무진을 떠보려는 의도가 있었다. 미츠키는 뒤통수가 따갑다 못해 관통되는 기분이었다. 뒤에서 지수, 혜진, 유정이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었다. 헛수작 부리면 바로 요단강을 직행할 정실, 첩들의 살벌한 눈초리였다.
‘한국은 일부일처제 아니었나?’
오해라며 무진은 친한 친구라고 했지만, 미츠키는 부정했다. 남녀 사이에 친구란 존재하지 않는다.
말 한마디에 일본까지 날아온 여인을 단순히 친구라고? 개도 안 믿을 헛소리였다. 그런 친구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관심이 없는데, 자기 시간과 생돈을 날리는 이성이 어디 있냐고.
‘다행이다.’
미츠키로선 나쁘지 않았다. 무진은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천외천의 초월자다. 한국의 법도 결국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규칙에 지나지 않는다. 무소불위의 초월자를 인간의 잣대로 재단한들 의미 없는 짓이다.
‘우리에게도 기회가 있다는 건데.’
세상이 변하긴 했어도 혈연만큼 확실한 우호 관계는 없다. 여전히 혼약으로 맺어진 관계는 강력한 유대를 발휘한다. 개인적인 감정과는 별개로 무진과의 혼약은 국가적 거사였다. 자식을 낳아 준 국가를 홀대할 여지는 많지 않았다.
‘여지는 많이 주는데, 들어갈 틈이 없단 말이야.’
권후를 확실하게 선택한다면 또 모를까? 황실과 여론의 동향을 살펴야 했다. 사적인 감정만으로 하야토와 혼약을 맺었을 때의 파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이 공주가 아니라 시민이었다면 이런 고민 따윈 애당초 하지도 않았을 텐데.
미안해, 하야토.
‘조국을 위해선 어쩔 수 없잖아.’
그런 미츠키의 고민을 알아챈 무진은 환하게 웃으며 말해 주었다.
“세상이 망해 단둘이 남아도 넌 아냐. 안심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하렴.”
“……?”
너희들의 순수한 사랑을 응원하겠다는 무진의 메시지였다. 아름다운 양보임에도 미츠키는 일그러지는 미간을 간신히 붙잡았다. 사랑이 아닌 조국을 위한 헌신을 일거에 뭉개 버린 것이다.
더욱이 세상이 망해서 단둘이 남아도 아니라니, 이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무진을 겪어 봐서 이젠 적응이 됐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사람의 속을 뒤집어 놓는 데는 정말 천부적이다 못해 천외천이었다.
“크하하, 존나 까였네!”
“아후, 내가 다 쪽팔린다!”
“이번엔 좀 웃겼어.”
경박하고 시원한 웃음소리가 방 안을 메웠다. 지수와 유정이 참지 못하고 배꼽을 잡았다. 자기들 방이었으면 바닥을 구르고 일어나 트리플 악셀을 했을지도.
정작 가슴 아픈 이별을 고심했던 하야토로선 좋아할 수도, 싫어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대의를 위한다면 양보해야 마땅한데, 시작도 못 해 보고 대차게 까이고 말았다.
‘나보고 어쩌라고?’
울분을 다스리는 미츠키 사마의 노력이 눈물겨웠다. 그녀를 위로해 주고 싶지만, 솔직히 나쁘진 않았다. 만약 무진이 받아들였다면 하야토로선 다른 방도가 없었다.
슥!
하야토는 최대한 시선을 회피했다.
눈 마주치는 순간 평생 달달 볶여야 한다. 위로를 건네 봤자, 감정을 속이는 위선이었다.
“누울 자리를 보고 누웠어야지, 쯧쯧쯧!”
“우리 무진이가 아무나 막 사귀고 그러는 난봉꾼은 아니지.”
“불쌍하다.”
지수, 유정, 혜진의 저급한 대화에 미츠키, 세이토, 하야토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지금이라도 입을 틀어막고 싶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어디가 어때서? 면전에서 너무하는 거 아니냐고.’
뒷담화도 열 받는데!
미츠키로선 대승적인 결단이었다. 허락은 하지 않더라도, 예의를 갖추어서 거절해야 했다. 이렇게까지 되자 자존심이 상하지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공주가 아닌 여자로서 꼭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중대사였다. 다른 건 다 참아도 자존심을 건드리면 못 참지.
“진짜 세상에 둘만 남아도 아니야?”
“세상이 여기밖에 없는 것도 아니잖아.”
다른 차원으로 가겠다고?
철벽에도 스케일이 있었다. 이렇게까지 완곡히 차단하니 차마 연정을 논하기도 어려워졌다. 대승적인 결단은커녕, 혼자서 김칫국 한 사발을 거나하게 마신 꼴이었다. 뒤에서 웃겨 죽으려고 하는 씨발 년들까지, 환상의 콜라보였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무진은 쐐기를 박아 주었다.
“하야토, 방생은 죄악이다. 사내로서 끝까지 책임을 져야지.”
“…….”
무진의 응원에 하야토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대답하는 순간 미츠키 사마의 공분을 사게 된다. 이딴 짓을 벌이고 타깃을 바꾸어서 자기만 빠져나겠다는 무진의 심보에 혀를 내둘렀다.
무진은 회피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하야토 따윈 쉽지.
“싫다고? 상원이에게도 기회가 있겠군.”
“옳소, 상원이가 딱이야!”
유정이가 적극적으로 응원하자, 하야토는 가만히 있지도 못했다. 대답해야 하는데, 말문이 막히는. 파리에서 한류 드라마를 찍는 기분이다.
“우리 상원이가 줏대가 없긴 하지.”
“지조도 없고.”
“거기도 없고.”
“다 없지.”
그런데 그보다 못한 하야토다.
미츠키는 속이 부글부글 끓다 못해 폭발할 지경이었다. 한번 시작하자 한도 끝도 없이 사람을 놀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 유정이는 진지한 표정으로 전화번호를 넘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