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9. 지략 대결(2)
허!
새만금처럼 넓은 대지를 바라보며 유경중은 혀를 찼다. 아공간이라기엔 지나치게 넓은, 보이는 그대로 다른 세계였다. 대단위 아공간도 놀라운데, 그 안에 탑이 솟아 있었다.
성좌의 탑을 복사해서 만들었다고 했을 땐 헛소린 줄 알았다. 탑은 각성을 위한 일종의 상징이고, 성좌는 버프기로 여겼었다. 한데, 탑이 실존하며, 성좌는 인간의 잠재력을 빨아먹는 기생충이었다.
믿기지 않지만, 유경중은 탑을 등반한 후 내려왔다.
탑은 시공간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시계를 확인하니, 더 어이가 없었다. 아공간에 이런 짓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인간적이지 않았다.
‘무위가 한 단계 이상 올랐어.’
탑의 등반은 수십 년의 적공을 단숨에 뛰어넘는 성취를 보였다. 평생의 훈련이 허무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것뿐이면 놀라지 않았다. 속성도 다음 단계에 들어섰고, 하나가 더 생겼다.
그간 부족하다고 여겼던 파워를 늘려 주는 속성이었다. 탑이 등반자에 맞추어서 적합한 속성을 부여해 준 것이다. 깨달음을 얻어도 균형을 맞추려면 시간이 걸리거늘, 밸런스를 자동으로 맞춰 준다. 성좌의 버프 따윈 깔끔하게 무시해 버리는 무진탑의 고성능이었다.
‘무시무시하구나.’
유경중은 저 안에 들어간 자들의 면면에도 놀랐다. 아버지를 이용해서 시선을 분산하고, 중국과 일본의 인재를 데리고 왔다. 중국의 와룡, 일본의 공주가 그 대상이었다.
‘효과를 보려면 오래 걸릴 줄 알았더니.’
현재 유경중은 5층을 등반한 상태였다. 그것만으로도 절대경에 도달한 것도 부족해 중반 이상을 나아갔다. 그렇기에 무진탑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탑의 등반은 경지의 상승을 의미했다. 재능이 필요하다지만, 포기하지 않는 끈기만 있으면 무진탑은 성과를 주었다. 다음 경지에 막혀 좌절하거나, 목말라 할수록 매달릴 수밖에 없다.
‘성좌의 탑처럼 단발이 아닌 점도 중요하지.’
무진탑에서 무작정 시간만 보낸다고 다가 아니었다. 사람의 정신력은 한계가 있고, 쉬는 것도 성장을 위한 과정이었다. 무진탑에서 얻은 깨달음을 현실에서 적응할 시간도 필요하고.
시공간의 자유로움에서 다시 제약이 있는 현실로 돌아왔을 때 성취의 반영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이런 부작용을 최소화하려면 현실에서도 똑같은 훈련을 해야 했다. 그래야 어긋난 싱크로율을 맞추고, 성취를 정상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대단하구나, 정말 대단해! 너는 신이 분명…… 응?’
내가 왜?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무진을 숭배해야 한다는 위화감이랄까? 일련의 터무니없는 과정을 경험한 이상 당연한 일이긴 해도.
유경중은 곧장 연무장을 나와 무진을 찾았다.
무진은 서재에 있었다.
“혹시, 네게 복속되는 거였냐?”
“그런데요.”
“그건 세뇌잖아.”
“훌륭하지 않아요?”
새삼스러운 질문이라며 너스레를 떠는 무진의 태연함에, 유경중은 헛바람을 삼켜야 했다. 이놈이 제정신이 아닌 줄은 알았지만, 대놓고 세뇌할 줄은 몰랐다. 자신처럼 똑똑하고, 뛰어난 사람이 그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니 통탄할 일이다.
“걔들도 아냐?”
“자유의지를 부여했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그래도 거부하지는 못할 거 아냐?”
“거부하게요?”
그렇게 물어본다면, 당연히 못 하지.
탑을 경험한 인간들은 절대 무진의 의지에 반할 수 없다. 이는 세뇌를 당해서가 아닌, 무진탑이 주는 마력을 거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위로 올라갈 확실한 방도를 아는데, 어렵게 돌아갈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무진을 배척하기엔 보여 준 능력치가 인간적이지 않았다. 성좌조차도 현실화하지 못한 탑을 실제로 구현했다는 것만으로도.
‘이게 뭐라고 안심이 되지?’
세뇌당하는 기분이라 굉장히 찝찝한데, 국밥처럼 든든하기도 했다. 이런 기분 정말 처음이었다. 싫다고 하기엔 포기할 수 없고, 좋다고 하기엔 새장 속처럼 답답하다.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수렁이었다.
“우리 지수 울리면 가만 안 둔다.”
“지수가 울리고 다니는 애들이 더 많아요.”
“……뭔 소리야?”
“이젠 제 주변에 얼쩡거리기만 해도 패고 다닌다고요.”
“……그 착한 아이가 그럴 리가 있나.”
“방금 텀이 있었었는데요.”
무진은 일본에서 지수가 한 발언을 고대로 말해 주었다. 가주께선 한사코 부정했지만, 녹음된 목소리까지 부정하진 못했다. 자기 딸을 아버지가 몰라서야 쓰나. 반드시 알고 있어야 했다.
“하하하, 누구 딸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선이 확실하구먼.”
“웃음으로 대충 때운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제 혼삿길을 깡패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다크니스를 상대하기도 빠듯한 이때, 지금 그런 한가한 일을 의논할 때가 아니지 않느냐.”
“미꾸라지처럼 잘도 빠져나가시네요. 저도 그간 유야무야 속을 썩이면서 대충 넘어간 죄도 있고 하니, 이쯤 하죠.”
“고맙구나.”
장인은 사위 하기 나름이라지.
망할, 지수한테 물들었네.
무진은 지수와의 애정보다 의리를 더 중시했다. 가장 오래 만났고, 가장 강한 지수를 믿는다. 다만, 줄을 세워서 패고 있을 미래가 상기되었다.
‘탑의 성능이 뛰어난 건 어쩔 수 없지.’
종속은 부수적인 문제로 치부하고, 가주님의 말대로 당장은 다크니스의 박멸이 중요했다.
목적과 의도를 떠나 지금 와서 화해하고, 타협하기에는 서로 너무 멀리 왔다. 이제까지 사사건건 방해했던 대상으로 자신과 권왕가를 노릴 확률이 높아졌다.
“아버지를 내세워 다크니스를 가늠할 잣대로 쓰려는 게지? 덤으로 대내외의 시선을 집중시켜 허튼 수를 차단하고.”
“공개적으로 실력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인 만큼 빼지 않을 가능성이 크죠.”
범위를 축소한 일종의 유인책이었다.
유경중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 상대의 심리를 계산하여 맞춤 전략으로 대응하는 무진의 심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무력이야 말해 봤자 입만 아프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그림을 완성하는 군사적인 재능이 실로 놀라웠다.
이번 전략도 외적으론 위험한 수처럼 보일 수 있었다. 사사건건 방해해 왔던 대상이 우리임을 드러냄과 동시에 패를 까는 행위였다.
이리되면 다크니스도 우리를 경계하며 수를 쓰기가 쉬워진다. 그러나 이 역시도 무진의 손바닥에 있었다. 패를 드러내 정해진 루트 안으로 끌어들였으니, 다크니스는 싫든 좋든 수가 읽힐 수밖에 없다.
아버지의 전력을 가늠하려고 하겠지만, 그게 쉽지는 않을 것이다. 솔직히 이제까지의 아버지와는 차원이 다른, 진정한 의미의 권왕이었다. 천하제일가를 선포할 때 대외의 시선은 허세로 치부했지만, 유경중은 그리 보지 않았다.
‘아버지라면 가능해.’
이 또한 무진이 있기에 가능한 전략이었다. 아버지도 무서운데, 그 배후에 더 무서운 존재가 있었다. 패를 깠지만, 사제 관계로 인해서 정형화된 상식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 청출어람을 거론하기엔 아버지가 워낙 전성기였다.
‘지수 말을 들어 보니, 일본도 먹은 것 같더만.’
한·중·일 전부 무진의 수중에 떨어진 지 오래였다. 지금도 그 증거가 무진탑에 남아 있었다. 등반을 마치고 내려오는 순간 지배력은 더욱 강화될 터.
“마냥 안심할 때는 아니에요.”
“그래서 최대한 훈련을 시키는 거구나.”
무진의 계획은 완벽하지만, 변수는 언제든 나올 수 있었다. 계획이 실패하고, 자존심이 상하고, 극단으로 치닫는다면 쥐도 고양이를 물곤 한다.
피해를 줄이려면 결국 본인의 능력부터 키워야 했다. 변수에 의해서 사고사 당해도, 누구 하나 책임져 주지 않는다. 어렵게 보상받는다고 한들, 내가 죽고 나면 무슨 소용이랴.
‘굳이 다 막을 필욘 없겠지.’
다크니스가 노릴 패를 예측하여 먹잇감을 남겨 두었다. 먹어도 좋고, 안 먹어도 되는. 진짜 중요한 패는 따로 만들었다.
‘수가 많다고 다는 아니거든.’
완벽한 계획이란 존재하지 않기에 무진은 개입할 여지를 남겨 두었다. 사실 이편이 가장 손쉽고, 마음 편했다.
응?
무진은 의아한 눈으로 가주님을 보았다.
할 얘기는 끝난 걸로 아는데, 이만 권왕가로 돌아가야 했다. 가문으로 중국과 일본을 넘어 세계 굴지의 각성자들이 찾아오고 있었다. 이번 기회에 명성과 입지를 넓히거나 굳히려는 각성자가 많았다. 사부가 권왕가의 최강자긴 해도, 가문의 주인이자 대표는 가주였다. 국가마다 문화가 다르긴 하지만, 손님을 대접하는 주인의 태도는 한결같았다.
“할 말이 남았나요?”
“투명청룡오관 말이야.”
문제라도 생겼나? 그럴 리가 없는데, 이번 작전을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혹여,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수리해야 했다.
“제가 가 봐야 하나요?”
“그건 아니고. 관문을 개방했으니 오관에 투명이 들어가는 건 이해가 되는데, 청룡은 도대체 무슨 뜻이냐? 우리 가문의 상징이 용도 아니고.”
권왕가의 깃발엔 주먹이 새겨져 있었다. 권흔, 그 자체로 가문의 완벽한 상징이었다. 직설적이면서도, 이해하기도 쉬웠다. 본인의 발상임에도 완벽했는지 권왕은 매우 흡족해했었다.
무진도 딱히 의미를 부여하진 않았다. 관문만 써 넣기엔 허전해서 뭐라도 하나 넣어 봤었다.
“드래곤보단 괜찮지 않나요?”
“뭔 개소리야!!”
***
“허,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는걸.”
“그간 머리 싸매고 고민한 우린 바보가 됐군.”
다크니스의 마스터들.
조직의 대계를 방해하는 걸림돌의 유력한 용의선상에 권왕가가 있었다. 모든 정보력을 동원해서 권왕가를 샅샅이 조사했었다. 예상대로 권왕가가 사사건건 개입한 정황이 나왔다.
중요한 역할을 하든, 아니든.
로드의 수발을 드는 솔로스를 제외하고, 권왕가를 처리하기 위해서 마스터들은 힘을 합쳤다. 소국의 일개 가문 따위를 상대하기 위해서 연합해야 하는 현실에 자존심 상했었다.
하나, 지금처럼 서로 반목하며, 힘을 과시했다가는 실패할 수 있었다. 로드의 분노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돌아오기 전에 사태를 정상화해야 했다.
그 시발점으로 권왕가를 무너뜨리려고 했거늘.
그간의 준비와 노력이 허무해졌다. 굳이 권왕가의 뒷조사를 할 필요가 없었다. 권왕가 스스로 그간의 행적을 밝혔다. 대적할 상대를 확실하게 알게 되어 다행이긴 한데, 의도와는 연이어 빗나갔다.
“우릴 가지고 논 것 같군.”
“어째서 내막을 밝힌 건지 알겠나?”
“숨길 필요도 없다는 거겠지.”
여태 은밀하게 움직였다고 하긴 어려웠다. 따지고 보면 오해로 인해서 연이어 잘못된 판단을 내린 것이다. 그간의 사정을 돌이켜 보면 판단 실수처럼 보이나, 권왕가의 계책이 범상치 않다는 방증이었다.
엉성함 속에 치밀함이 숨어 있었다. 더는 권왕가를 소국의 일개 가문으로 치부하지 못했다. 조직이 되레 권왕가에 의해 철저하게 놀아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렇게까지 열 받게 하는 경우는 처음이군.”
“권왕가를 짓밟지 않고선 분이 풀리지 않겠어!”
상위의 포식자로서 먹잇감을 원하는 대로 요리한 후에 처리해 왔었다. 수십 년 동안 단 하나의 실패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겼었다.
오늘 완벽함에 커다란 흠집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