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Prologue
이 정도면 이룰 만한 것은 다 이루었다고 생각했다.
드높은 가문의 명예.
제국과 마탑을 호령하는 권력.
3대가 망해도 사돈의 팔촌까지 쓰다 죽을 돈까지.
모두 스물두 살에 이룬 쾌거였다.
남들은 평생에 걸쳐 하나 이룰까 말까 하는 걸 한 번에 쌓아 올렸다.
그래서일까?
제자를 구하다 너무 이른 죽음을 맞았다.
‘플람, 막스를 잘 부탁한다.’
‘안 됩니다, 스승님! 가시면 안 됩니다!!’
그래도 후회는 없었다.
분명…… 없었는데…….
“이게 뭐야. 우리 집 어디 갔어?”
이런 상황은 예상치 못했다.
음산한 공동묘지 같은 영지.
당장에라도 유령이 나올 것 같은 허름한 저택이, 정말 공작가 저택이라고?
그럴 리가 없다.
“내 저택…….”
기사단이 한 줄로 드러누워도 자리가 남던 수련장은?
제국에서 제일 많은 돈을 들여 아름답게 지은 유리 온실은?
황궁 부럽지 않게 지어둔 공작가 저택은 어딜 가고?
게다가…… 여기서 한눈에 들어와야 할 마탑은 어딜 간 거지?
“내가 세운 마탑이…….”
없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저기요, 혹시 마탑 못 보셨어요?
하늘 높이 뻗은 천공탑이라고 하는데요.
제가 그걸 황궁이랑 신전보다 높이 세웠거든요, 분명?
여보세요. 거기 천국이죠.
저 방금 죽었다가 깨어났는데 이럴 순 없어요.
마탑이 있었는데요, 없어졌습니다.
“끄윽…….”
휘이이이잉!
싸늘한 바람이 을씨년스러운 저택을 훑고 간다.
“끄으으으윽…….”
울창하고 아름답던 미로 정원은 황무지로 변한 지 오래요.
자랑스러운 가문의 깃발은 삭아서 없느니만 못하다.
남은 건 한 줌 먼지요, 티끌뿐.
그마저도 후 불어버리면 날아갈 지경이니.
“아니 이런……. 이런 미친……!”
마침내 힐데가르트가 분노를 터뜨렸다.
“이런 미친놈들이! 세상에 말아먹을 게 없어서 집안을 말아먹어?!”
마성신을 봉인하고 제국을 구하며 죽었던 영웅.
천재 마검사 힐데가르트.
80년의 세월이 흘러 후손의 몸에서 눈을 떠보니 가문이 망했다.
“으아아악!!”
그것도 아주 쫄딱 망했다.
* * *
힐데가르트 아카락시아.
아카락시아 공작 가문이 낳은 희대의 검술 천재.
힐데가르트는 노력하는 재능을 타고난 천재였다.
눈이 오면 눈밭에서, 비가 오면 빗줄기 아래에서 하루 만 번씩 검을 휘두르는 집념은 보통이 아니었다.
그녀가 열일곱이 되기도 전에 소드 마스터가 되고 가문에서 제일가는 검사로 불리게 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물론 힐데가르트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검술 다음은 마법이었다.
마법은 검술과는 다른 영역에서 노력과 인내를 요구했으나, 그녀는 포기를 몰랐다.
그렇게 4년쯤 흘렀을까.
힐데가르트의 노력은 정말 뜻밖의 방향으로 열매를 맺었다.
당시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대마법사가 그녀에게 모든 마력을 물려주고 죽은 것이다.
모두가 그 이유를 궁금해할 무렵.
검술 대회에 참가해서 우승한 힐데가르트는 황제 앞에서 직접 이유를 밝혔다.
“힐데가르트. 약속대로 짐이 그대의 소원을 들어주겠다. 무엇을 바라는가?”
“폐하, 제 소원은 하나뿐입니다. 이 세상에 숨어 사는 마법사가 생기지 않도록 그들의 터전을 만드는 걸 허락해 주십시오.”
그제야 사람들은 깨달았다.
위대한 대마법사가 공녀에게 마력을 물려준 이유.
“마탑을 세우고 싶습니다. 마법사가 마음 편히 살 수 있는 세상을 원합니다.”
“훌륭하구나.”
그렇게 마탑이 세워졌다.
신전보다도, 황실보다도 높이 세운 마탑의 이름은 ‘천공탑’.
천재 마검사에 이어 초대 마탑주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힐데가르트는 공작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했다.
다툼이 생기면 제일 먼저 달려가서 양쪽의 말을 다 들어보고 싸움의 중재를 도맡았다.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있으면 절대 지나치지 않았고, 제국의 곳간이 비면 자신이 가진 것이라도 내어놓았다.
모든 대회에서 공작가의 이름을 걸고 우승하여 명예를 드높였고, 상금 또한 공작가의 이름으로 빈민에게 베풀었다.
여름 폭우로 막대한 사망자가 나올 뻔했을 때는 직접 몸을 던져 마법으로 사람을 구했다.
그녀는 모두에게 선망받는 진짜 귀족이었다.
“아카락시아 만세! 힐데가르트 공녀님, 만세!”
“마탑주님 덕분에 저희 아들이 무사히 태어났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공녀님! 제 꽃 받아주세요!”
하여간 뭘 하든 힐데가르트 공녀 만세 만세 만만세인 세상이었다.
그때가 그녀 나이 스물이었다.
드높은 가문의 권세.
이름만 들어도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드는 명성.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솟아나는 재산.
그것만으로도 충분한데 마치 계시처럼 일어난 사건이 있었으니.
“힐데가르트님이 성검을 뽑았다!”
“이걸로 마성신을 봉인할 수 있어!”
바로 마성신과 함께 나타난 성검을 뽑은 일이었다.
황제가 그녀에게 물었다.
“힐데가르트여. 제국의 주인으로서 그대에게 부탁하마. 그 성검으로 마성신을 봉인해 줄 수 있겠는가?”
“물론입니다, 폐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녀의 다부진 대답에 황제는 크게 만족했다.
“제국민 모두에게 알린다. 아카락시아 공녀가 성기사단을 직접 이끌고 마성신을 봉인할 것이다. 신전은 공녀에게 지원을 아끼지 말도록 하라.”
바야흐로 힐데가르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어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으니.
바로 힐데가르트와 함께 남매처럼 자란 사촌 오빠, 레온하르트였다.
“힐데가르트, 나는 반대다. 마성신 봉인이라니. 너무 위험한 일이야.”
“레온 오빠.”
레온하르트는 그녀를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 보듯 했다.
“그렇게까지 애쓸 필요 없어.”
“공작인 오빠가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
“차라리 연애를 해.”
“연애? 좋지. 오빠가 내 이상형이라도 찾아주면 생각해 볼게.”
“……조건은?”
힐데가르트가 씩 웃었다.
“일단 다정하고 상냥하고 예의 바르면서 유머러스할 것. 잘생긴 건 기본이고 돈도 많아야 해.”
“…….”
“어깨는 넓고 키는 커야 하고. 참, 검술도 마법도 나만큼은 할 줄 알아야 해. 신분은 최소 공작 위 이상으로 찾아줄래?”
“차라리 유니콘을 찾아달라고 해!”
“내 말이 그거야.”
“힐데가르트!”
레온하르트는 뒤늦게 동생이 저를 놀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곤 벌컥 화를 냈다.
“농담하는 게 아니다. 네게는 가문을 빛내는 것 말고도 다른 선택지가 있어.”
“그래, 그래. 오빠처럼 결혼도 하고 아이도 갖는 선택지 말이지?”
힐데가르트가 웃으면서 아기용 신발이 든 선물 상자를 흔들었다.
레온하르트가 더욱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연애나 결혼이 아니라도, 네겐 더 행복해질 자격이 충분하다는 소리잖아.”
“알았어, 고마워.”
“대충 넘기지 마. 대체 왜 그렇게 위험한 일에 직접 나서는 거냐.”
“레온 오빠.”
“그만둬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마성신 토벌을 포기해.”
레온하르트는 아카락시아 가문의 공작이자 기사단을 이끄는 수장이었다.
딱딱하고 엄격하며 차가운 사람.
휘어질지언정 부서지지 않는다는 강직한 공작.
그러나 힐데가르트는 알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다정하며 속 깊은 사람인지.
레온하르트는 일찌감치 간파한 것이다.
구름처럼 몰려와서 힐데가르트의 주변을 채운 사람들은 대부분 잠깐 스쳐 지나가는 사람일 뿐.
진정으로 그녀를 염려하고 아끼는 사람은 몇 없다는 걸.
힐데가르트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 저에게 던지는 기대란 동전이나 마찬가지다.
기대가 동전처럼 뒤집히는 순간, 비난이나 냉소로 변한다.
그리고 사람이란 언제나 돌변하는 존재였다.
위대한 공녀 힐데가르트가 과연 마성신을 토벌하는 데 성공할 것인가?
당장 밖에서는 그녀의 성공을 점치는 척, 악담도 서슴지 않는 사람들이 널려 있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힐데가르트는 의욕적이었다.
“레온 오빠. 마성신을 봉인한다면 아카락시아 공작가는 지금보다 더 위대한 가문으로 거듭날 거야.”
“힐데.”
“상상해 봐! 아카락시아라는 이름이 황실이나 오브론 대공가보다 더 훌륭한 가문으로 역사에 남는다니까?”
그녀가 환한 얼굴로 눈을 빛내며, 주먹까지 꾹 쥐었다.
“다들 오빠를 대단한 공작이라며 우러러보겠지!”
순수하기까지 한 열망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레온하르트는 더욱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힐데, 나는…….”
“됐으니까 걱정 그만해. 진짜 애는 따로 있는데, 날 어린애 취급하면 어떡해?”
힐데가르트는 그렇게 말하며 조카가 잠들어 있는 요람을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아직 목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사촌 조카에게 살며시 손가락을 내밀었다.
“안녕, 미카엘리스. 고모야. 잘 잤니?”
놀랍게도 잠들어 있던 남자아이는 금방 그녀의 손가락을 꼭 잡았다.
예상치 못한 따뜻함에 힐데가르트의 입가에 숨길 수 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미카엘, 고모가 예쁜 신발 사 왔어. 네 마음에 들어야 할 텐데……. 아니면 그냥 신발 가게를 사줄까?”
힐데가르트의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네 아빤 너무 걱정이 많아서 탈이라니까. 그렇지 않니?”
그녀는 그 뒤로도 조카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타이르고, 혼내고, 말려도 고집스레 가문을 위해 움직이던 힐데가르트의 출전이 당장 내일이었다.
레온하르트는 한참 동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가 툭, 한마디를 던졌다.
“……찾아주마.”
“뭘?”
“네 이상형.”
한숨을 쉬며 다가온 레온하르트가 그녀와 함께 잠든 아들을 보았다.
“제국을 다 뒤져서라도 가장 잘생긴 놈으로 찾아주마.”
“레온 오빠.”
“그러니 무사히 돌아와라. 알았지?”
“…….”
“위험한 일은 이번이 마지막이다. 내게 약속해.”
걱정이 지나쳐서 탈이라니까!
힐데가르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슬그머니 기쁜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많은 것을 이루었다. 모두 레온하르트 덕분이었다.
그러니 그만큼 레온하르트에게, 가문에게 되돌려주고 싶은 것뿐이다.
‘……그래도.’
만약, 조금만 더 바라도 된다면.
내 인생을 환하게 밝혀줄 마음속 창문을 여러 개 만들어도 된다면.
내가 아무것도 안 해도 날 사랑해 주는 사람을 원해도 된다는 걸까?
연애라.
짧은 침묵이 지나고 힐데가르트가 말했다.
“……알겠어. 그 대신 미남이라도 마음에 안 들면 뻥 차버릴 거야?”
“바라던 바다.”
레온하르트가 피식 웃었다.
힐데가르트는 잠든 조카에게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미카엘리스한테도 약속! 고모가 금방 다녀와서 신발 가게 사 줄게!”
그러나 힐데가르트는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녀는 마성신을 봉인하는 데 성공했으나 목숨을 잃었다.
스물네 살의 요절이었다.
그 해에 아카락시아 공작가는 가장 존귀한 공녀를 잃었다.
마탑은 마탑주를.
황실은 가장 훌륭한 귀족을.
제국은 마지막 남은 이 시대의 영웅을 잃었다고 슬퍼했지만.
그뿐이었고, 거기까지였다.
주인 잃은 것들은 곧 오만 갈래로 찢겨나가기 시작했다.
결국, 모든 것은 레온하르트가 걱정하던 대로 흘러갔다.
레온하르트는 여동생이 이룬 모든 것을 지키고자 애썼지만, 가파른 변화 속에서는 그마저도 힘든 일이었다.
아주 당연하게.
몹시 빠르게.
힐데가르트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혔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 * *
그렇게 시간이 흐르기를 80년.
아카락시아 가문의 존귀한 공녀.
천재 마검사 힐데가르트.
“거짓말……. 다 거짓말이야아!!”
그녀가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