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그냥 보내주자. 힐데는 검술 대회를 핑계로 수도 구경이 하고 싶어서 조른 걸 거야. 틀림없어.”
레디스는 무어라 말을 꺼내려다가 도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사실 마음이 편치 않은 건 레디스도 마찬가지였다.
저라고 좋아서 여동생의 수도 유람을 뜯어말렸을까. 집이 가난해서 그렇지.
“힐데에겐 이게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
“마지막 기회라니?”
“수도 구경 말이야. 이대로면 우리 가문은 정말 파산할지도 몰라.”
“…….”
“힐데는 데뷔탕트도 치르지 못할 거야. 애초에 사교계로 내보내기엔 우리 집안도 예전 같진 않으니까.”
“그러니까 더 보내면 안 되는 거잖아! 돈은 어떻게 하려고?”
레디스가 눈썹을 치켜떴다.
동생을 빤히 보던 미하일은 안쓰러운 마음에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안해, 레디스.”
“사과는 왜 하는데?”
“그냥. 미안. 너까지 이렇게 걱정하게 만들어서.”
“하지 마. 누가 사과하랬어?”
레디스가 성을 내자 미하일은 손을 거뒀다.
“이번 한 번만 내 말에 따라주면 안 될까?”
“형!”
“힐데를 수도로 보내주자. 내가 그렇게 해주고 싶어.”
“…….”
레디스는 마음이 부글부글 끓는 것 같았다. 그는 한참 뒤에나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대로 해.”
“고마워.”
미하일은 가볍게 웃었지만, 레디스는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다.
수도에 가서도 가난한 공작가라고 비웃음 사면 그땐 어떡하고?
‘상처만 받고 돌아올 바에야 차라리 안 가는 게 나은데.’
공작가의 집안 사정이 처음부터 이렇게 나빴던 건 아니었다.
한때, 아카락시아 가문은 다섯 별 공작가 중에서 가장 부유한 집안이었다.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을 만큼 세금을 거두었고, 임업과 광산업이 발달한 지역이었다.
광산이 스무 개나 있어서 솜씨 좋은 보석 장인과 무기 장인이 자연스레 몰려들었다.
당시 마탑주였던 공녀가 안전하게 마을과 거리를 보살피자, 더욱 물자가 모여서 상업이 발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공녀가 죽으면서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이게 다 할아버지 때문이야.”
“레디스.”
“내 말이 맞잖아. 무지개의 아카락시아는 무슨. 이런 우중충한 영지에 무슨 무지개야.”
“그래도 그렇게 말하면 안 돼.”
“그래! 형은 착한 소리 잘해서 좋겠다!”
레디스는 답답하다는 듯 벌컥 화를 냈다.
“형은 답답하지도 않아? 형이랑 내가 멀쩡히 살아 있는데, 왜 우리한텐 공작령에 대한 권한이 하나도 없는 거야?”
“그래도 1년만 참으면 돼. 내년이면 내가 성인이잖아.”
장남인 미하일의 나이는 열여섯.
차남인 레디스는 열넷이었다.
미성년자밖에 없는 집에 공작가의 전권을 맡겨둘 수 없다며, 먼 친척인 솔베르 백작 부인이 가주 인장 반지를 가지고 간 게 5년 전이다.
그들은 어린 데다가, 가주의 인장조차 찍을 수 없으니 공작령이 갈수록 힘들어져도 보고 있을 수밖엔 없었다.
“내년이면 내가 열일곱이니 솔베르 이모님이 반지를 돌려주실 거야.”
“순순히 줄 리가 없잖아. 백작 부인이 저번에 말 바꾸려고 하던 거 기억 안 나?”
“이모님이라 불러야지.”
“백 보 양보해서 형이 반지를 찾고 가주가 된다고 쳐. 다 망한 집을 물려받아 봤자 무슨 소용이야?”
“알아.”
미하일이 지친 목소리로 그를 타일렀다.
“아니까…… 내가 어떻게든 할게.”
“…….”
레디스는 답답한 마음에 또다시 화를 내려다가 관뒀다.
‘형, 제일 막막한 건 형이잖아.’
어른이 되어서, 형을 도와준다면 우리 집이 더 나아질까?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그러게.”
미하일은 다시 한번 미안하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도 그래.”
* * *
다음 날 아침. 힐데가르트는 가볍게 절망했다.
“하……. 나 아직도 살아 있네.”
하룻밤이 지났는데도 팔다리와 정신 둘 다 멀쩡하다.
울면서 잠든 그대로 눈뜨지 못했다면, 깜짝 부활쇼나 조상님 순간 귀환 해프닝쯤으로 끝났을 텐데.
“어휴…… 됐다. 똑같은 소리 또 하면 뭐 하니. 앓느니 죽어야지.”
열두 살이 하는 말치고는 지나치게 뼈 있는 한탄이었다.
하지만 우울함에 허우적거리며 시간을 허비하는 건 질색이었다.
“환생이라…….”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사라진 것도 잠시.
힐데가르트는 절망하는 것도 질렸다는 듯 말했다.
“죽어서 나자빠져 있는 것보다는 낫지. 그런 거로 쳐.”
그녀가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왜 하필 이 몸에서 눈을 뜬 거지?”
힐데가르트는 무덤가에서 보았던 마법진을 다시금 떠올렸다.
“그건 분명 흑마법이었는데.”
흑마법이란 악의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해치는 나쁜 마법을 뜻했다.
저주를 비롯해 불길하고 사악한 마법이 대다수였기에 절대 환영받지 못했다.
시체를 조종하거나 죽은 사람의 영혼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이용하는 것도 대표적인 흑마법 중 하나다.
힐데가르트는 초대 마탑주로서 평생 흑마법과 대적점에 선 자였다.
하지만 경험 많은 그녀가 보기에도 그 마법진은 처음 보는 모양이었다.
“내가 죽고 난 뒤에 흑마법이 더 발달…… 했을 리는 없는데?”
제국과 신전은 흑마법을 엄격하게 금지한다.
그 풍조가 변했을 리는 없었다.
‘하여튼 참 오래도 살아 있네, 그것들은.’
검은 별 교단은 말이 교단이지, 구원을 외치며 흑마법으로 사람을 속이는 광신교였다.
그들은 자식이 죽을병에 걸렸거나 절박한 사람에게 다가가 흑마법으로 포섭한 뒤, 교단을 따르게 했다.
이렇다 보니 흑마법사가 활동하는 검은 별 교단은 마법사에 대한 인식을 나쁘게 만든 원흉이기도 했다.
마법사 탄압을 부추기는 광신교 집단.
하지만 그들의 뿌리를 뽑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건 사람을 저주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좀처럼 없어지지 않는 것과 비슷했다.
“흐으음…….”
황실과 신전은 이미 오랫동안 검은 별 교단과 대적해 왔다.
특히 성기사단은 검은 별 교단의 이름만 들어도 거품을 물고 달려들곤 했다.
그리고 거품을 물고 달려든 사람이 한 명 더 있었으니.
그 사람이 바로 힐데가르트였다.
“미치지 않고서야 날 환생시켜?”
힐데가르트는 엘프의 후손이자 마법사였던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또 그녀 자신이 초대 마탑주인 만큼, 마법사 탄압을 부추기는 검은 별 교단을 절대 용서하지 않았다.
힐데가르트 아카락시아.
온 생을 다 바쳐 직접 검은 별 교단과 싸운 존귀한 공녀.
마성신의 부활을 막고 봉인에 성공하며 목숨을 잃은 성검의 주인.
그런 철천지원수나 마찬가지인 저를 교단이 되살린다?
“말도 안 되지.”
힐데가르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교단이 아니라면, 대체 누가? 왜?’
단순한 우연인 걸까?
힐데가르트는 침대에 앉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10분이 넘게 고민해 보아도 마땅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일단 묻어두자.’
그녀는 백기를 들었다.
오래 고민하는 건 그녀와 맞지 않았다.
게다가 이 환생이 검은 별 교단과 얽혀 있는 게 사실이라면 상황이 복잡해진다.
“안 되지, 안 돼. 안 그래도 깡그리 망하기 직전인데.”
아카락시아 공작가와 검은 별 교단 사이에 어떠한 접점이 있다는 게 밝혀졌다간…….
“진짜 망할지도 몰라.”
힐데가르트는 성기사단이 쳐들어와서 공작저를 헤집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내가 마성신을 봉인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이제 와서 그딴 것들이랑 얽혀서 집안이 진짜 망하면 그때는 억울해서라도 못 살지!”
궁금하긴 해도, 어차피 당장 고민해 봤자 소용없는 문제였다.
“나중에 마탑에라도 가서 알아보면 되겠…….”
아, 근데 마탑도 망했지?
“아오오오! 진짜!”
답이 없네, 답이 없어!
힐데가르트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울부짖었다.
“왜 죄다 요 모양 요 꼴인 거야?!”
창밖에 있어야 할 천공탑은 진즉 무너졌고, 그녀는 이제 마탑주가 아니었다.
그나마 공녀 신분은 잃지 않았지만, 정작 가문이 몸도 못 가누고 쓰러져서 숨넘어가게 생겼다.
“망할 거면 세상이 망할 것이지. 왜 하필 우리 집이 망하고 난리람.”
그때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힐데! 일어났으면 내려와서 식사해!”
“……어휴.”
힐데가르트의 입에서 자연스레 한숨이 흘러나왔다.
집사가 모시러 오기는커녕 둘째 공자가 길거리에서 뛰노는 강아지 부르듯 저를 부르다니.
“일단 누가 말아먹은 건지부터 알아봐야겠어.”
그때까지만 해도 힐데가르트는 짐작조차 못 하고 있었다.
그녀를 환생시킨 사람도, 가문을 말아먹은 사람도 그녀와 지독한 인연으로 얽혀 있는 사람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