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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공녀님 (8)화 (8/166)

8화

“……이거 괜찮은데?”

힐데가르트는 저도 모르게 감탄을 터뜨렸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감탄했다.

“응? 진짜 괜찮은데?”

배움에는 돈이 든다.

반면 가르치는 데는 돈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돈을 벌지.

사업을 하는 것도 아니니 목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공작가의 평판을 깎아 먹을 일도 없다.

제자란 스승을 깍듯하게 모시며 배우는 게 인지상정.

심지어 힐데가르트는 꽤 능력 있는 선생이었다.

“검술도 되고 마법도 되잖아. 나 같은 선생이 어딨어?”

다소 재수 없는 발언이었지만 그녀의 말꼬리를 물고 늘어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설령 있다 하더라도 반박하기 어려운 말이기도 했다.

힐데가르트는 80년 전에도 실력을 겨룰 자가 없었다.

마법과 검술 양쪽 다 수준급이었다.

게다가 실력뿐이랴.

힐데가르트는 전생에서도 제자를 둘이나 키웠다.

한 명은 검술을, 한 명은 마법을 가르치며 쌓은 경험치는 고스란히 그녀에게 남아 있었다.

제자를 들인다면 ‘잘’ 가르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문제라면 지금 내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건데…….”

열두 살.

제자를 들이는 것보다는 제자로 들어갈 나이.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지만, 어린 소녀를 깍듯하게 스승으로 모시려는 귀족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

‘수도 구경시켜 줄 테니까, 가출하지 말라고.’

재능을 드러낼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마법이란 본디 일곱 살 천재가 일흔 살 범재보다 뛰어난 학문 아닌가.

심지어 어릴 때 두각을 드러내면 더욱더 천재적이라고 평가받곤 했다.

타고난 마력 친화도.

거기에 아카락시아 공작가라는 간판을 걸고 있다면 열두 살이라도 제자를 들이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깟 나이 때문에 발목 잡힐 순 없지.”

힐데가르트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노예 같은 제자…… 가 아니라 신분 높은 제자만 있으면 수월하지.”

전생에 카멜레온 한 마리에도 울고불고 난리를 피웠던 황자까지 제자로 들였던 힐데가르트였다.

제자를 키워서 아카락시아에 우호적인 세력을 키우고, 숨은 재산을 찾아내고.

그걸 바탕으로 오직 힐데가르트만이 할 수 있는 사업을 시작한다면.

“……너무 완벽한 계획이잖아.”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했다.

시작은 산들바람처럼 가볍게.

하지만 그 끝은 폭풍처럼 매섭게.

환생자인 저만이 가능한 방법으로 가문을 다시 세울 것이다.

끝내 아카락시아의 이름이 제국을 뒤흔들 때까지 이어질 가문 재건!

그녀가 씩 웃었다.

“좋아, 준비해 보실까?”

힐데가르트는 콧노래를 부르며 다시 모자를 썼다.

아무래도 수도로 가기 전까지 바빠질 것 같았다.

* * *

드롯셀마이어 제국 수도 발프람.

한 청년이 녹음이 가득한 황궁 정원을 두리번거리며 걷고 있었다.

“전하! 어디 계십니까?”

하얀 제복을 입은 남자는 호위 기사로만 두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미남이었다.

에메랄드 원석처럼 어두운 청록색 머리카락과 뚜렷한 이목구비까지.

그의 허리에는 황실 소속 기사임을 나타내는 태양 무늬의 금색 벨트와 검 한 자루가 채워져 있었다.

“전하! 키스케 전하!”

얼마나 돌아다녔을까.

쏴아아, 불어온 바람에 무심코 고개를 든 노바는 곧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전하, 여기 계셨군요?”

노바는 조심스레 커다란 나무 옆으로 다가갔다.

그늘 아래 앉아 있던 소년은 저를 찾는 목소리를 들었으면서도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

“전하, 활쏘기 수업 도중에 사라지셨다 들었습니다.”

노바의 얼굴이 굳었다.

키스케 라모프 드롯셀마이어.

올해로 열네 살이 된 소년은 혼자서 울음을 참을 때마다 꼭 지금처럼 제 몸을 끌어안고 있었다.

서러운 숨소리 하나 새어 나가지 않도록 제 몸을 감싸 안았다.

“혹시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한쪽 무릎을 꿇은 노바는 곧 깜짝 놀랐다.

“전하, 손가락이……!”

키스케의 손가락 끝은 날카로운 칼에 몇 번이나 베인 것처럼 붉게 에인 흔적이 선명했다.

열 손가락 대부분이 보기만 해도 아플 만큼 빨갛게 살이 갈라지고 부르터 있었다.

“키스케 전하!”

“소란 떨지 마.”

키스케가 입술을 꾹 문 채 고개를 들었다.

황족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붉은 눈동자는 담담해 보였지만, 그 속에 일렁이는 감정이 보였다.

금빛 머리카락이 잘게 부서뜨린 햇빛처럼 빛났다.

“내가 활시위를 너무 세게 당겨서 그래.”

“페사스 백작이 전하의 손가락이 이렇게 될 때까지 내버려 뒀단 말입니까?”

“……못 본 척한 거겠지.”

노바가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그게 더 나쁩니다! 교사 실격이라고요! 어떻게 모르는 척할 수가 있습니까!”

호위 기사가 분노할수록, 키스케는 따가운 것이 제 손가락인지 마음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안 되겠습니다. 이 일은 폐하께 말씀드려야겠어요.”

“하지 마!”

키스케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마. 이건 그렇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야.”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내가 울면서 로바르네 전하가 뽑은 교사마다 괴롭힌다고 하면 뭐가 달라져?”

키스케는 아픈 손가락을 감췄다.

“할아버지가 며느리인 로바르네 전하를 쫓아내기라도 하겠어? 결국 내가 아카데미로 가는 수밖에는 없잖아. 그건 싫다고!”

“그렇다고 이런 치졸한 괴롭힘을 두고만 보실 작정입니까? 전하께서는 폐하의 하나뿐인 손자입니다!”

“하나가 아니라 둘뿐인 손자지. 카라딘도 있잖아.”

“전하!”

“괜찮아. 이 정도는 견딜 수 있어.”

키스케는 신경질적으로 웃었다. 그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이 정도도 못 참을까 봐?”

“…….”

“이딴 건 하나도 아프지 않아. 하나도…….”

“전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지만, 보는 제가 더 아픕니다.”

노바는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는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키스케의 손가락에 맺힌 핏방울을 조심스레 닦았다.

손가락에 난 상처는 언젠간 아물고 굳은살이 박이겠지만, 마음 또한 그럴 수 있을까?

“……난 괜찮아. 정말이야.”

“항상 그렇게 말씀하셨죠.”

잠을 재우지 않는 천문학 선생을 만났을 때도, 휴식을 허락하지 않는 수영 선생을 만났을 때도.

사사건건 카라딘 황태손과 키스케를 비교하는 고전 문학 선생을 만났을 때도.

“차라리 아카데미에 가실 생각은 없으신 겁니까.”

“싫어. 절대 안 가. 그런 식으로 도망치지는 않을 거야.”

“전하…….”

키스케가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원을 빠져나갔다.

아카데미로 떠나는 건 싫다며 줄곧 고집을 부렸던 키스케였다.

노바는 주군을 불안한 눈으로 뒤쫓았다.

불운한 만남이 이루어진 건, 정원 입구에서였다.

“키스케.”

“……숙모님.”

때마침 로바르네 2황자비가 정원을 산책하기 위해 시녀 몇 명과 함께 그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여기서 무얼 하고 있나요?”

“…….”

“지금은 궁술 수업 시간이 아니었던가요?”

로바르네가 차가운 눈으로 키스케를 훑었다.

“내 말이 들리지 않습니까?”

“……수업에 따라가는 게 힘들어서 잠시 쉬고 있었습니다.”

로바르네 황자비의 눈동자가 키스케의 손가락에 닿았다.

붉은 자국이 얼룩덜룩한 손가락을 보고도 그녀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힘이 들던가요?”

“…….”

“대답하세요, 키스케. 고작 그런 것도 힘들어서 쉬고 있었나요?”

키스케의 뒤에 서 있던 노바는 이를 악물었다.

‘고작’ 그런 게 힘들었냐고?

고운 손가락을 가진 황자비로서는 알 수 없었겠지.

살이 에일 정도로 활시위를 당기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황태손인 그대를 위해 내가 직접 고른 교사이고, 배워야 할 과목입니다. 불만이 있나요?”

“……불만은 없습니다.”

“그러면 당장 수업으로 돌아가세요.”

“하오나 황자비 전하, 키스케 전하는…….”

“무례합니다! 감히 천한 기사 따위가 황자비 전하께 직언을 올리다니!”

노바가 입을 열자, 로바르네 황자비 곁에 붙어 있던 시녀가 큰 소리로 꾸짖었다.

노바는 로바르네 황자비의 차가운 시선과 고개를 젓는 키스케 때문에 입술만 꾹 깨물었다.

“수업 태도가 그리 좋지 못한 걸 보니 페사스 백작에게 책임을 물어야겠군요.”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키스케는 울컥, 쏟아질 것 같은 감정을 꾹 눌러 참았다.

“당장 돌아가서 마저 수업을 듣고 오겠습니다.”

“좋아요. 결과는 따로 페사스 백작에게 듣도록 하죠.”

“…….”

“하아, 제국의 1황태손이라는 자가 이래서야. 타고난 승계 서열이 아깝군요.”

로바르네 황자비는 키스케를 고압적으로 내려다본 다음 고개를 돌렸다.

양산을 든 시녀가 그녀를 뒤쫓으며 재잘거렸다.

“너무 마음 상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2황자비 전하.”

“옳습니다. 2황태손이신 카라딘 전하께서 그토록 명민하신데 무엇이 걱정이신가요?”

“어서 가시죠. 카라딘 전하께서 어머니가 오시기를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고개를 숙인 노바의 귀에서 재잘거리는 소리가 멀어져갔다.

한참 후 내리깐 시선을 든 그가 어느새 저만치 멀어진 키스케를 보고 울상이 되었다.

너른 황성에서 대부분 시간을 혼자서 보내는 키스케였다.

지금은 저 혼자서 어떻게든 보필하고 있다지만, 과연 앞으로도 그게 가능할까.

‘하다못해 마음을 털어놓을 상대라도 있으시면 좋을 텐데…….’

노바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키스케 전하, 최소한 손가락에 응급 처치를 하고 가셔야…… 전하!”

기사는 고집스레 걷기 시작한 주군의 뒤를 허겁지겁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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