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공녀님 (20)화 (20/166)

Chapter 03. 저주의 행방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키스케는 눈을 떴다.

“……뭐야?”

방금 무슨 소리가 난 것 같은데

키스케는 캐노피가 드리워진 온실 소파에서 일어났다가 깜짝 놀랐다.

좀 전까지만 해도 소파 옆에 있었던 카멜레온이 감쪽같이 사라진 게 아닌가.

“……비비?”

비비는 그가 할아버지에게 부탁받아, 잠시 맡아두고 있는 카멜레온이었다.

‘겁 많고 순한 녀석인데, 어딜 간 거지?’

키스케는 검을 차고 온실 안으로 들어섰다.

“……!”

이변을 알아채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어두워야 할 온실 바닥의 대리석이 은은한 무지개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건 뭐지?”

그것은 대리석에 섞인 마석이 반응하는 광경이었지만, 마법에 문외한인 키스케가 알 리 없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하며 키스케가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라니깐!!”

곧 키스케의 얼굴이 굳어졌다.

착각이 아니었다. 침입자가 든 것이다.

‘경비는 순찰 중인가?’

하필 노바 몰래 침실에서 빠져나온 날 침입자가 들어오다니.

‘그보다 대체 얼마나 얼치기 같은 침입자길래 이렇게 소란을 피우는 거지?’

한 걸음씩 다가갈 때마다 키스케의 숨소리는 작아졌다.

‘상대는 한 명뿐인가.’

풀썩, 하는 소리와 함께 침입자가 쓰러진 것을 파악한 키스케는 순식간에 다가가 검을 겨누었다.

“누구냐.”

키스케는 그렇게 물으면서도 몹시 놀랐다.

바닥에 쓰러진 소녀는 윤기 나는 은발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시선을 마주하자, 청색도 보라색도 아닌 오묘한 눈동자와 상기된 뺨이 한눈에 들어왔다.

투명한 피부와 조그만 입.

아름다운 소녀는 말문이 막힌 채, 저를 희한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냐고 물었다.”

“세상에……. 그럼 여긴 황궁이었구나.”

“뭐라고?”

키스케는 동문서답에 미간을 찌푸렸다.

“어쩐지 대리석이 깔려 있다 했지. 황궁 온실이겠네, 그럼.”

“……침입자 주제에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지?”

“너무 근엄한 척 말하지 말렴. 안 어울리잖니.”

키스케는 어이가 없었다. 애늙은이처럼 말하는 건 상대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소녀가 먼지를 툭툭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스케는 긴장을 풀지 않고 계속해서 상대의 목에 검을 들이댔다.

그러나 상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혹시 이 근처에서 카멜레온 한 마리 못 봤니?”

이 태연한 반응은 뭐지?

황궁 유리 온실에 멋대로 침입한 것도 모자라 느긋하게 질문이나 던지다니.

넉살맞은 상대의 태도에 당황한 건 오히려 키스케 쪽이었다.

“아직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넌 누구지? 무슨 목적으로 황궁에 침입했지?”

“알려주면 안 잡아갈 거야?”

“들어보고 결정하지.”

“경계할 필요 없어. 여기에 온 목적 같은 건 없거든.”

키스케는 귀를 의심했다.

차라리 저를 암살하러 왔다고 솔직하게 밝히는 게 나았을 정도였다.

“여긴 발프람의 심장부인 황궁이다. 목적이 없다는 말을 믿으란 건가?”

“놀라는 건 이해하지만 정말 우연한 사고였어. 고의로 침입한 게 아니야.”

“핑계도 좋군.”

“딱딱하게 굳은 스콘 같은 애구나. 사람이 말하면 좀 믿어줄래?”

소녀는 푸념하며 손바닥을 펼쳤다.

그러자 자그마한 불빛이 한데 모여 귀여운 뱁새 모양으로 변했다.

마력으로 만든 뱁새는 파닥이며 키스케의 주변을 날아다녔다.

“이러면 좀 믿겠어?”

빛으로 만든 깃털이 주변을 폴폴 날아다니더니, 키스케의 어깨에 닿자마자 순식간에 사라졌다.

힐데가르트가 생글생글 웃었다.

“너…… 마법사였나?”

“맞아. 마법사. 아주아주 유명해질, 장래를 촉망받는 천재 마법사!”

“그럼 좀 전에 바닥이 빛났던 것도 네가 한 짓이었군?”

“으음, 그렇다고 해둘게.”

“…….”

“용건이 끝나면 조용히 떠날 테니 걱정하지 마.”

“…….”

하지만 키스케의 경계는 한층 더 심해졌다.

“마법사가 이곳엔 뭐 하러 온 거지? 게다가 목적은 없는데 용건이 있다? 더 수상하군.”

“……너 정말 사람을 못 믿는구나. 눈이 있으면 좀 봐. 누가 황궁에 숨어들 때 이런 차림을 하겠어?”

소녀가 보란 듯이 양팔을 벌렸다.

말마따나 실크 가운을 걸친 네글리제 차림은 어디로 보나 습격자나 침입자의 행색으로 보긴 어려웠다.

“그리고 검 좀 치워줄래?”

“거부한다.”

“그래? 그럼 제대로 찔러봐. 동맥은 좀 더 안쪽이야. 검날을 바짝 세우면 돼.”

소녀는 그렇게 말하더니 겁도 없이 제 목을 쭉 빼서 그녀에게 얼굴을 들이대었다.

놀란 키스케는 저도 모르게 칼날을 거두었다.

“너……!”

“가까이서 보니까 엄청 미남이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나긋하게 뜬 눈으로 소녀가 웃었다.

“장래가 기대되는걸?”

“떨어져.”

키스케는 제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저기, 너 이름이 뭐야?”

“남의 이름을 물으려면 자기소개부터 해.”

“흐으음.”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는지, 소녀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뗐다.

“나는 레온하르트라고 해.”

“……노바플랑카스타체다.”

키스케는 본명 대신 호위 기사의 이름을 댔다.

하지만 ‘자칭’ 레온하르트는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지 않았다.

“거짓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구나?”

“무슨 소리지?”

“비브롯셀 왕국식 이름을 대면 속아주기도 어려워. 그 나라 망했잖아. 살아남은 건 노예뿐인데, 네가 노예처럼 보이지는 않거든?”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지만, 키스케로서도 반박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는 너야말로. 누가 들어도 남자 이름을 대놓고 내가 속기를 바라는 건가?”

“…….”

“…….”

침묵 속에서 두 사람이 시선을 나눴다.

“키스케 라모프 드롯셀마이어다.”

“힐데가르트야.”

둘은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끝냈다.

“그 검 계속 들고 있을 거니? 슬슬 치워줬으면 하는데.”

힐데가르트가 칼날을 손끝으로 밀어내자, 키스케는 순순히 검을 집어넣었다.

“고마워.”

“착각하지 마. 네가 허튼짓을 하는 즉시 위병을 부를 테니까.”

“반지만 찾으면 떠날 거야. 나도 카멜레온만 아니었다면 이런 꼴 안 보였다구.”

“카멜레온이라면 혹시…….”

키르릇. 키르릇.

카멜레온 울음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찾았다!”

눈을 부릅뜬 힐데가르트가 쏜살같이 움직였다.

그녀의 맨발 차림을 본 키스케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그가 힐데가르트의 뒤를 쫓았다.

“네가 왜 비비를 찾아?”

“비비? 설마 네가 지은 이름이야?”

“아니야.”

키스케는 곧바로 부정했다.

“할아버지의 애완동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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