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할아버지 취미가 특이하시네. 그래서 반지 같은 걸 물고 도망치는 건가?”
그나저나 비비라니.
‘어디서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인데?’
힐데가르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마법을 썼던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일단 제압부터…….”
“잠깐.”
키스케는 심각한 얼굴로 그녀 앞을 가로막았다.
“비비를 괴롭힐 셈이라면 용서 못 해.”
“용서 못 하면 어쩔 건데. 손목이라도 부러뜨리려고?”
“…….”
우와. 얘 부정 안 하는 것 봐라?
힐데가르트는 잠깐 웃었지만, 곧 눈살을 찌푸렸다.
“넌 사람을 뭐로 보는 거야? 내가 말 못 하는 미물을 괴롭히는 사람처럼 보이니?”
“마법사는 그런 작자들이잖아?”
키스케의 말에 힐데가르트의 눈빛이 좀 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차가워졌다.
“……마법사에 대한 오해가 심하네. 직접 겪어본 것도 아니면서.”
그녀가 키스케를 노려본 것도 잠시.
그녀의 손끝에서 가벼운 바람이 일어나더니, 화단 나무에 매달려 있던 카멜레온을 허공으로 둥둥 띄웠다.
손가락보다도 작은 카멜레온이 바람 구슬 안에 갇혀서 데굴데굴 굴렀다.
“자, 이걸로 됐지?”
얼마 후 어지러움을 참지 못한 카멜레온은 혀를 축 늘어뜨리며 반지를 떨어뜨렸다.
마법을 푼 힐데가르트는 반지를 주웠다. 그제야 비로소 그녀는 안심했다.
“하아……. 새벽부터 이게 뭐 하는 짓인지.”
힐데가르트는 반지를 요모조모 살폈다. 다행히 크게 상하거나 흠집이 난 구석은 없어 보였다.
‘되찾아서 다행이다.’
돌아가면 어디 보관해 두든지, 체인으로 목에 걸고 있어야지.
힐데가르트는 키스케를 향해 어깨를 으쓱였다.
“됐다. 난 가볼 테니 안심해.”
“……마법사들은 다 너 같은가?”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삐딱했다.
키스케는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넌 대체 황궁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황제가 사는 궁전이지?”
“틀렸어. 정답은 가고 싶으면 가고, 오고 싶으면 오는 곳이 아니라는 거야. 대체 무슨 생각으로 황궁에 숨어든 거야?”
키스케는 힐데가르트의 맨발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위병이 널 발견했다면 즉시 잡혀가서 투옥당했을 거다.”
“지금 나 걱정해 주니?”
“주의하라는 말이 그렇게 이해하기 어려워?”
돌아오는 대답은 연신 퉁명스러웠지만, 힐데가르트는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오해하지 마. 나도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니라 사고라고 했잖아.”
“…….”
키스케의 표정이 미세하게 달라졌다.
얼마 후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의 비웃음을 흘리며.
“하긴. 마법사가 아무리 세상 물정을 몰라도 황궁에 침입해선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겠지.”
“마법사가 세상 물정을 왜 몰라? 산속에서 이슬만 먹고 수련하는 꼬부랑 할아버지라도 되는 줄 알아?”
“비슷한 거잖아.”
“아니거든!”
대체 마탑이 어떻게 됐길래 마법사에 대한 인식이 이 모양 이 꼴인지 모르겠다.
‘플람 녀석, 내가 죽고 대체 뭘 한 거야?!’
힐데가르트는 차기 마탑주로 내정했던 제자를 떠올리며 투덜댔다.
“그거 선입견이야. 마법사가 무슨 온실 속 화초도 아니고.”
힐데가르트는 크흠,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어쨌든 소란을 피운 건 미안해. 하지만 나도 저 애완동물이 반지를 빼앗아 가지만 않았다면 좀 더 조용했을 거야.”
힐데가르트가 가주 인장 반지를 내보였다.
반지를 본 키스케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인장 모양이 묘하게 눈에 익었다.
“동물이든 사람이든 아무거나 먹으면 탈 나는 거 알지? 만약 그 카멜레온이 반지를 먹었으면…….”
“먹었으면?”
“어땠을 거 같아?”
힐데가르트가 음산한 웃음을 지으며 카멜레온의 배를 가르는 시늉을 했다.
키르릇!
소리를 낸 비비는 두려움을 느꼈는지 재빨리 키스케의 주머니 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키스케는 한 손으로 주머니를 감싼 채 혀를 찼다.
“바보 같은 짓 관둬. 용건이 끝났으면 떠나기나 해.”
“재촉하기는.”
“이번에는 눈감아주지. 하지만 다음부터는 황궁에 용건이 있으면 정식으로 접견 신청서를 넣어. 알겠어?”
“응? 나 다시 보려고?”
“……그런 뜻이 아니야.”
“그럼 다신 안 볼 거야?”
“글쎄,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키스케가 고개를 확 치켜들었다.
그러자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힐데가르트가 얼굴을 쑥 내밀었다.
“너…… 그거 알아?”
“뭐, 뭐?”
“너 속눈썹이 엄청나게 길어.”
“……!”
“더 크면 속눈썹에 깔려 죽고 싶다는 영애들이 많겠다.”
“장난치지 마!!”
키스케는 버럭 화를 냈다. 그의 가슴이 쿵, 쿵 하고 낮게 뛰었다.
“진짠데.”
키득키득 웃던 힐데가르트가 언제 다가왔냐는 듯 빙글, 몸을 돌려 멀어졌다.
‘젠장. 완전히 가지고 놀고 있어.’
속눈썹은 무슨. 역시 마법사는 이상한 것들이다.
귓바퀴가 발갛게 달아오른 키스케는 이를 갈았다.
“빨리 돌아가!!”
“화를 낼 것까진 없잖아.”
애가 부끄럼을 타나?
힐데가르트는 웃으며 등을 돌렸다.
‘그럼 어디 보자…….’
돌아가는 방법을 정확히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매개체끼리 연결된 거니 순간 이동의 문은 다시 온실에서 열릴 것이다.
처음 발 디딘 곳으로 되돌아가면 무언가 단서가 남아 있겠지.
‘또 순간 이동 때문에 아픈 건 싫지만, 어쩔 수 없지. 이대로 남아 있다간 진짜 투옥당할 텐데.’
어떤 의미로는 위병이 아니라 키스케와 만난 게 운이 좋았다.
그녀가 바닥을 보며 유유히 걸었다.
머잖아 예상은 적중했다.
힐데가르트가 처음 황궁으로 이동되었던 그 장소에서 마력이 반응했다.
‘여기가 초상화 입구랑 연결된 거구나. 이거라면…….’
그녀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을 때였다.
“정말이라니까. 분명 이쪽에서 목소리가 들렸어.”
“잘못 들은 거 아니야?”
온실 입구 쪽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순찰 중이던 경비병이 돌아온 것이다.
두 사람의 얼굴이 동시에 굳었다. 그녀가 재빨리 몸을 숨겼다.
“너 눈감아주기로 했다?”
“네가 소리쳐서 경비병이 돌아온 거잖아.”
키스케는 투덜거리면서도 계속 숨어 있으라는 듯 눈짓했다.
“다녀올 테니 기다려.”
키스케는 그렇게 말한 다음 태연한 얼굴로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힐데가르트는 그 틈을 타, 한쪽 무릎을 꿇고 바닥을 확인했다.
‘아무래도 빨리 돌아가는 게 좋겠어.’
그녀는 천천히 대리석에 마력을 쏟아부었다.
그러자 가주 인장 반지와 함께 대리석 바닥이 빛나더니, 곧 아카락시아 가문의 문장이 떠올랐다.
문장에는 키스케가 온실에 들어왔을 때보았던 무지갯빛이 다시금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초대 공작과 황제가 비밀리에 만날 때 쓴 거구나.’
설마 온실로 연결되어 있었을 줄이야.
힐데가르트는 시험 삼아 옆에 있는 돌멩이를 문장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자 돌멩이가 빛나는 문장 안으로 쑥 들어갔다.
‘됐다!’
황궁에는 좌표를 흐트러트리는 마법이 걸려 있기에, 평범한 순간 이동 마법으로는 오갈 수가 없다.
그래서 선택한 게 바로 초상화와 대리석 같은 매개체끼리 잇는 방법이다.
이 빛이 사그라지면 문도 닫힐 것이다.
‘엘프들의 마법은 진짜 대단하다니까.’
힐데가르트는 문장을 가만히 보았다.
그녀는 이대로 가기만 하면 됐다. 한 발자국만 내디디면 되는데…….
“경비병은 돌려보냈어. 이제 나와도 괜찮…… 이봐?”
“있잖아,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키스케는 묘한 빛을 내는 대리석 바닥과 힐데가르트를 번갈아 보았다.
힐데가르트가 뜬금없는 질문을 던진 건 그때였다.
“너, 혹시 막시밀리언 쥬브네스 드롯셀마이어라는 사람 알아?”
그리움에 젖은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애칭은 막스라고 하고, 아마 너한테는 할아버지뻘 되는 사람일 거야. 당연히 남자고, 눈동자는 너보다 살짝 더 핑크빛이야.”
막시밀리언.
힐데가르트보다 일곱 살이 어렸던 금발의 황족.
그녀가 검을 가르쳤던 두 번째 제자.
힐데가르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거듭 물었다. 애써 쾌활한 목소리였다.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 누구랑 결혼했는지, 행복하게 살다 갔는지……. 뭐든 괜찮아! 혹시 아는 거 있어?”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아직 정정하신 분께 무슨 소리야?”
키스케는 맥 빠진다는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황제 폐하의 존함을 마구 부르지 마.”
“……뭐?”
힐데가르트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 걸 느꼈다.
“막시밀리언 쥬브네스 드롯셀마이어. 현 제국의 황제 폐하이시자 내 할아버지 되시는 분이다.”
“어…… 어? 어?”
“역시 마법사라 그런지 세상 물정 모르는 게 맞네.”
황제?
막스가 황제가 됐다고?
힐데가르트는 저도 모르게 입을 떡하니 벌렸다.
온몸의 솜털이 바짝 서는 기분이었다.
“키르릇.”
그때 키스케의 주머니 밖으로 카멜레온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비비……. 어쩐지 이름이 익숙했어. 그럼 설마……!’
그녀가 숨을 들이켰다.
“그보다 저거 괜찮은 거야? 빛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는데.”
“아, 헉?!”
놀란 힐데가르트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키스케의 말처럼, 저택으로 연결된 빛의 문장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힐데가르트는 허겁지겁 문장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키스케!”
이동 마법진으로 발을 디딘 힐데가르트가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증폭된 마력이 순식간에 온몸을 뒤덮었다.
“정말이지? 정말 살아 있는 거지!”
“무슨…….”
“거짓말이 아니라고 맹세해!”
그 찰나의 순간.
울 것 같은 얼굴을 한 소녀에게 키스케는 압도당했다.
빛에 잠긴 소녀는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당황한 키스케는 저도 모르게 사라지는 힐데가르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정말이야. 맹세해.”
그러나 손이 닿기도 전에, 섬광이 소녀를 에워싸더니 그녀를 물거품처럼 흐트러뜨렸다.
쏴아아아.
마력이 한꺼번에 사라지는 소리가 흡사 파도 소리 같았다.
그렇게 빛에 잠긴 소녀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웃으며 사라졌다.
“아…….”
끝없는 정적.
키스케는 비로소 아무도 없는 온실에 혼자 남았다.
인기척이 사라진 온실은 귀가 먹먹할 정도로 조용했다.
“……뭐야.”
마지막으로 본 얼굴이 너무 애틋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였을까.
키스케는 그녀가 사라진 자리에서 완벽히 굳어버렸다.
울 것 같은 얼굴로 웃던 모습이 무지개처럼 선명해서일까.
“왜 그런 얼굴을…….”
온실에 남은 키스케의 가슴 한구석이 울렁였다.
달빛이 떠나고 여명이 숨어든 온실에서 그는 한참 동안 꼼짝도 하지 못했다.
* * *
옛날 일이다.
황제의 아들로 태어나서도 관심이 필요하다며 징징대던 애가 있었다.
‘그런 눈으로 봐도 소용없답니다, 황자님. 성검은 제가 뽑았는걸요.’
‘포크도 못 쥘 가느다란 팔로 어떻게 마성신을 봉인한다고.’
‘…….’
‘줘 보라고요! 내가 대신 봉인하고 온다니까!’
‘지금 네가 나보다 더 강하다고 주장하는 거야?’
나는 왜 황제 못 하냐며, 나도 아버지한테 사랑받고 싶다며, 공작가에 민폐를 잔뜩 끼치던 그런 바보.
‘딱 대라. 아직 백 대 덜 맞았다. 황자라고 봐줄 것 없다며?’
‘잘못했어요! 잘못했습니다! 누나! 누나악!’
‘딱 대.’
스무 대쯤 맞으니까 싹싹 빌며 무릎으로 기어 와서 발목부터 붙잡던 찰거머리.
‘저리 가! 제자 안 받아줘!’
‘나 받아줄 때까지 집에 안 가! 아버지가 데리러 올 때까지 안 가!’
‘너는 마법에 재능이 없다니깐?!’
땅끝까지 쫓아와서 검술이라도 배우겠다던 그런 황자가 있었는데.
그 이름하여 막시밀리언 쥬브네스 드롯셀마이어.
고집 하나만큼은 대륙 최고였던 내 두 번째 제자다.
‘플람 형, 부탁이야. 제발 생명의 엘릭서를…….’
‘꿈도 꾸지 마, 죽게 내버려 둬.’
‘이번 한 번만 도와줘! 두 번 다시 조르지 않을게!’
‘수명은 살아 있는 생명의 운명이야. 그건 카멜레온 한 마리라도 마찬가지다.’
‘형!’
‘꺼지라고 했어, 막시밀리언.’
‘엘릭서 만들어주기 전까지는 꼼짝도 안 할 거야! 형 연구실 앞에서 무릎 꿇고 있을 거라고!’
‘마음대로 해.’
내 두 번째 제자는 너무 바보였다.
너무 바보라서, 2년밖에 못 사는 애완동물을 살리겠다고 일주일 넘게 밥도 굶어가며 무릎을 꿇곤 했다.
‘막스, 왜 이렇게까지 해?’
‘스승님…….’
‘너도 알잖아. 플람이 엘릭서를 만들어줘도, 그 새끼 도마뱀은 언젠간 죽어.’
‘도마뱀 아니거든요. 카멜레온이거든요.’
‘그게 그거지.’
‘……아무것도 안 하고 죽을 날만 기다리는 게, 이미 죽은 거랑 뭐가 달라요?’
‘막스.’
‘스승님이나 플람 형한테는 그냥 카멜레온이겠지만 저한테는 친구예요. 비비는 아직 살아 있으니까, 저도 포기 안 해요.’
‘막스, 하지만…….’
‘나는 플람 형이랑 달라요! 수명이니까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하는 짓은 안 해요!’
‘…….’
‘뭐가 다른데요? 비비도, 스승님도, 플람 형도 다 똑같은 생명이잖아. 살아 있잖아!’
‘…….’
‘다 똑같은 생명이니까, 나는 절대 포기 안 해! 스승님이랑 플람 형이 죽어가도, 나는 똑같이 살리려고 무릎 꿇을 거라고요!’
사람 목숨도, 도마뱀 목숨도 똑같이 소중하게 여기는 애였다.
사무치게 보고 싶은 바보였다.
‘그렇다는구나, 플람. 슬슬 져주는 게 어떠니?’
‘플람 형!’
‘……그만 무릎 꿇고 일어나.’
‘형! 엘릭서를…….’
‘만들어줄 테니까 일어나라고.’
‘진짜?!’
‘그래. 도무지 시끄러워서 연구를 못 하겠다.’
‘고마워! 진짜 고마워! 허엉, 비비이이……. 흐어어엉!’
‘도마뱀한테 비비가 뭐야, 비비가.’
‘카멜레온이라고호오어어엉……’
‘어휴, 울보.’
죽었을 줄 알았지.
80년이나 흘렀으니까.
숙부님도, 레온 오빠도, 메이브 언니도, 미카엘리스도, 다 죽었으니까, 너도 죽었을 줄 알았어.
누구 하나 살아 있을 거란 기대를 하면 실망할까 봐 떠올리지 않으려 했다.
그랬었는데.
“……살아 있구나.”
나는 물방울의 방에서 쓰러진 채 헐떡였다.
온몸이 저미듯 아팠지만, 어느새 그리운 추억과 함께 방울방울 맺힌 눈물이 멈추지 않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직…….”
살아 있다
아직, 내 제자는 살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