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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공녀님 (24)화 (24/166)

23화

레디스가 수련을 마치고 돌아온 건 저녁 식사 시간이 끝났을 때였다.

“왔어?”

“너 손에 뭘 들고 있는 거야?”

“이거? 좌절 금지 저금통이야.”

힐데가르트는 땀에 흠뻑 젖은 레디스에게 보란 듯이 저금통을 내밀었다.

“미하일이 자꾸 습관처럼 자기 탓이라고 하잖아. 앞으로는 그때마다 여기에 벌금을 넣으라고 할 거야.”

레디스는 이제 오빠라고 부르다 말다가 하며 제멋대로인 그녀를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가 소파에 풀썩 앉았다.

“웬 벌금? 어디에 쓰려고?”

“그건 아직 안 정했지만, 로빈에게 새 구두를 사주는 건 어떨까?”

“참나…….”

레디스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웃었지만, 저금통에 은화 한 닢을 넣어주었다.

“옛다. 한 푼 적선.”

“우와! 열 받지만 감사합니다.”

“남은 건 너 용돈 해라.”

“내 용돈 아니라니까……. 그나저나 요즘 너무 늦게까지 수련하는 거 아니야?”

“검술 대회가 얼마 안 남았잖아.”

“그래도 저녁까지 거르면 어떡해?”

힐데가르트는 엄한 얼굴로 말했다.

“저녁은 다 같이 모여서 먹어야지. 한 저택에서 얼굴도 안 보고 살 거야? 나는 반대야!”

“누가 안 본대? 잠깐만 그러는 거잖아. 한 달만 그러겠다는 건데.”

“그래도 안 돼!”

“너 가끔 보면 이상한 데서 고지식하더라.”

“지금 꼰대 같다는 말 돌려서 하는 거지!”

레디스는 후다닥 시선을 피했지만, 그녀가 끈질기게 바라보자 알겠다며 항복의 표시로 두 손을 들었다.

“저녁은 같이 먹을게. 그럼 됐지?”

“……좋아.”

엎드려서 절 받은 기분이지만 일단은 넘어가자.

“오빠. 혹시 아카데미에 다시 다닐 생각 없어?”

“……그건 왜 물어보냐?”

“그냥? 미하일 오빠가 아까 신경 쓰길래.”

“…….”

레디스의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그는 잠시 표정을 굳히더니 혀를 찼다.

“자꾸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해. 학비 때문에 그만둔 거 아니야.”

“그럼 왜 그만뒀는데?”

“…….”

레디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잠시 힐데가르트를 빤히 보다가, 여동생의 볼을 꼬집었다.

“이젠 상관없잖아? 왜. 내가 아카데미로 가버렸으면 좋겠냐?”

“그런 거 아니거든? 그리고 아프거든? 놔줬으면 좋겠거든?”

“형 말은 신경 쓰지 마.”

손을 뗀 레디스가 슬그머니 속삭였다.

“저금통 잘 들고 다니다가 또 학비 소리 하면 벌금 받아내. 알겠지?”

“……알겠어.”

“그럼 난 잔다. 으, 피곤해.”

레디스는 찌뿌둥한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흐으음…….”

힐데가르트는 왠지 모르게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예민한 건가?’

사람은 쉽게 게을러지는 생물이다.

무슨 일이든 혼자서 한다면 자신에게 더없이 너그러워진다고나 할까?

하지만 레디스는 누가 봐도 검술에 진지한 아이였다.

혼자서 수련하면 게을러지게 마련인데, 감시자도 없는 공작가에서 몇 달이고 아침 수련을 계속했다.

‘심지어 로열 가드가 꿈이라며?’

그런 애가 대체 무슨 이유로 아카데미를 그만둔 걸까?

* * *

똑똑.

노크 소리에 고개를 든 미하일이 깜짝 놀랐다.

“레디스?”

“코 빠지겠다, 그러다.”

“수련은 다 끝난 거야?”

멋쩍은 얼굴로 책을 덮은 미하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책이길래 그렇게 정신없이 읽어?”

“이거?”

미하일은 웃으며 읽던 책의 제목을 보여주었다.

“뭐야. <원숭이도 할 수 있는 효율적인 영지 운영>? 그런 책이 있어?”

“대공 각하가 권해주신 건데 쉽게 쓰여 있어서.”

“그야 원숭이도 할 수 있으려면 쉬워야겠지.”

레디스는 어이없다는 눈을 했다.

서재로 들어온 레디스는 거의 다 마신 홍차를 흘끗 보았다.

“설마…… 저녁 식사 끝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응. 수도에 가기 전에 다 읽어두려고.”

“기특하네.”

“힐데만큼은 아니지.”

미하일이 키득키득 웃었다.

“언젠간 내가 해야 하는 일이었어. 지금 읽는 게 너무 느린 거야.”

“읽고 있다는 게 중요한 거지 뭐.”

레디스는 조곤조곤 대답하는 미하일의 모습이 퍽 한 달 전과는 달라졌다고 느꼈다.

비슷한 생각을 한 건 상대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참…… 신기하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솔베르 백작 부인에게 반지를 받아오느니 마느니 했는데.”

“……그러게.”

레디스는 부쩍 피곤해 보였던 형의 모습을 떠올리며 맞장구쳤다.

신기하기도 하지.

불과 한 달 전만 하더라도 가출했던 힐데가르트 때문에 식탁 앞에 앉아 한숨을 쉬던 두 사람이었건만.

“사람 속도 모르고 힐데 그 녀석이 가출했을 땐 정말…….”

“하하하.”

“웃을 일이 아니었다니깐. 철없는 자식. 데려오자마자 크게 혼내주려 했는데.”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내 말이.”

힐데가 변했다.

철없고, 제멋대로이고 무작정 고집만 피우던 여동생이 몰라보게 달라졌다.

훨씬 더 어른스러워졌고, 단호하며, 설명하기 어려운 우아한 구석까지 생겼다.

‘그래도 제멋대로인 건 여전하지만.’

가장 가까운 곳에서 힐데와 자란 두 사람은 그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아카데미에 있던 나한테 저택이 무섭다고 편지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야.”

단순히 가출로 고생한 여동생이 의젓해졌다는 수준이 아니었다.

가끔 보면 아예 다른 사람이 된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형이랑 힐데한테 질 순 없지.”

“응?”

“다음엔 내 차례야.”

레디스는 서재 창가에 있는 꽃병을 가리켰다.

“자리 만들어 놔. 검술 대회 우승 트로피를 가져다줄 테니까.”

“레디스, 요즘 허세 부리는 기간이야?”

“허세라니! 난 한다면 해!”

“그래, 그래. 알았어.”

미하일은 웃으며 꽃병을 옆으로 치웠다.

“비워 둘 테니까 꼭 허세가 아니라는 걸 보여줘.”

무작정 어떻게든 하겠다는 말로 불안해하던 레디스를 달랬던 게 엊그제였는데.

자신만만한 얼굴로 웃고 있는 레디스를 보자 새삼 감회가 새로웠다.

‘역시 다 읽고 자야지.’

미하일은 내일부턴 <오랑우탄도 할 수 있는 효율적인 조세 운용>을 읽겠노라 다짐하며 주먹을 쥐었다.

* * *

다음 날.

힐데가르트는 공작가 사용인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인사가 늦어서 미안. 다들 아카락시아 공작가에 복귀한 걸 진심으로 환영해.”

힐데가르트가 인사하자, 돌아온 사용인 모두가 도리어 감격스러운 눈빛을 했다.

“아닙니다, 아가씨. 다시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동안 건강하셨던 것 같아서 마음이 놓여요.”

따뜻한 목소리만큼이나 다정한 이들이었다.

저택의 내실을 관리할 하인 다섯.

정원사, 조리사, 마부와 기사 몇 명까지.

‘로빈이 엄선해서 연락을 넣은 보람이 있네.’

기사단까지 옛 모습으로 되돌리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지만, 이제 막 다시 시작하기엔 이보다 더 좋은 소수 정예가 없었다.

“자세한 건 로빈에게서 들었겠지만, 당분간 저택을 비우게 됐어. 수도에 다녀올 거야.”

힐데가르트는 한 사람씩 돌아가며 눈인사를 건넸다.

“그동안 저택을 깨끗하게 수리해 주었으면 해. 돌아오자마자 미안하지만, 믿고 맡겨도 되겠지?”

“맡겨주세요, 아가씨!”

정원사인 네리아가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전처럼…… 아니, 그때보다 더 멋있게 꾸며놓고 기다리고 있을게요!”

듣기만 해도 마음이 든든해지는 소리였다.

“고마워. 그럼 부탁할게.”

세상에는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돌봐야 하는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이 분명하게 나누어져 있다.

물리적으로 저택을 원상복구 시키는 건 시간과 노동력이 필요한 일이다.

그러니 저택은 사용인에게 맡겨두고, 그녀는 더 중요한 일에 집중할 생각이었다.

‘이번 수도행은 중요해.’

검술 대회, 스칼렛 스워드.

이 대회는 이베르타 공작가에서 주기적으로 개최한다.

사냥 대회와 달리 어지간하면 다섯 별 공작가에서 모두 참가하는 만큼 좋은 기회였다.

수도의 정세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80년 전과 현재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어.’

게다가 이번 일로 오브론 대공의 신뢰를 얻는다면 미하일은 안정적으로 공작위를 물려받을 수 있다.

미하일의 작위 계승식은 아카락시아 공작가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될 터.

그때를 생각한다면, 대공의 신뢰를 얻어두는 일은 생각보다 중요했다.

‘간단히 실력 발휘 좀 해보실까.’

청보랏빛 눈동자가 우아하게 반짝였다.

* * *

수도 발프람의 오브론 대공저.

아카락시아 공작령에서 돌아온 오브론 대공은 곧바로 막내 손녀 일리야를 찾았다.

침대에 앉아 있는 손녀를 보자 굳어 있던 대공의 표정이 밝아졌다.

“할아버지! 다녀오셨어요?”

“그래. 몸은 좀 어떠냐.”

“하나도 안 아파요. 방에만 있어서 심심하기만 해.”

소녀는 겉옷을 더욱 깊숙이 여몄다.

오브론 대공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손녀딸의 목덜미나 얼굴 손끝을 꼼꼼히 살폈다.

다행히 까만 흔적이 심하게 번지지 않았다. 비늘처럼 딱딱해진 모습도 찾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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