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막 깨어났을 때와는 달리 안정을 되찾은 모습이었다.
오브론 대공은 그제야 조금 안심했다.
“아까 카유크 오빠가 다녀갔어요.”
“그래? 녀석이 오늘은 또 무슨 장난을 쳤느냐?”
“몰라요. 오빤 진짜 구제 불능이야.”
일리야가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얼어붙은 들판에 훈훈한 바람이 불어오듯 마음이 편안해졌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손녀의 해맑은 모습을 볼수록 의문이 솟아올랐다.
‘저주라니, 감히 누가 그런 짓을.’
일리야는 성품이 고운 아이다.
손녀라서 하는 말이 아니다.
날개 다친 새를 돌봐주느라 식사도 거르고 잠을 설치던 아이였다.
겨울에는 길가의 고양이들이 추울 것 같다며 고양이 집을 만들어주었다.
다친 개를 치료하겠다고 쫓아가다 되레 본인이 넘어진 적도 있었다.
사람보다는 동물을 더 좋아하기에 친구가 많지 않다.
어린 손녀가 원망을 살 일은 그리 많지 않았으리라.
‘……그렇다면, 어쩌면.’
범인은 일리야를 노린 게 아닐지도 모른다.
소중하게 여기는 가족…… 예컨대 자신이나 대공가에게 원한을 가진 자의 소행일 확률이 높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지독한 저주를 걸었을 리 없지.’
하지만 대공가에 원한을 가진 이들이 한둘일까.
당장 자신만 하더라도 수많은 이에게 원한을 사면서 살아왔다.
‘하지만 이건 인간의 도리를 저버리지 않았나?’
누가 그토록 끔찍한 저주를 걸었단 말인가?
대공은 어느새 깊은 생각에 잠겼다.
“할아버지? 왜 그러세요?”
“아무것도 아니다. 카유크는 아직 저택에 있느냐?”
“오빠라면 식당에 있을 거예요. 아까 배고프다고 했거든요.”
“알겠다.”
대공은 손녀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준 뒤 집무실로 향했다.
그가 침침한 눈을 주무르고 있을 때였다.
똑똑.
형식적인 노크가 끝나기 무섭게 문이 열렸다.
“할아버지, 찾으셨다면서요?”
“왔느냐, 카유크. 앉거라.”
매끈한 외모 덕에 홀가분한 인상을 주는 소년이었다.
올해 열다섯인 카유크는 이마를 절반쯤 드러낸 새카만 머리카락이며 푸른 눈동자가 젊었을 적의 대공과 똑같았다.
“카유크. 조만간 아카락시아 공작가에서 손님이 올 게다.”
“아카락시아 공작가요? 그동안 아카락시아 공작령에 다녀오셨던 거예요?”
“그래. 알아볼 게 있었다.”
카유크는 그게 무엇인지 물어보는 대신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랑베르 거리의 저택에 손님맞이 준비를 해두라고 일렀다. 나는 밀린 일을 처리해야 하니, 당분간 네가 손님을 살피도록 해라.”
카유크는 난데없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 그래도 얼마 전 눈을 뜬 일리야 때문에 발칵 뒤집힌 대공가다.
손님을 맞이할 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건 그 누구보다도 카유크가 잘 알았다.
“한 가지 더. 네게 연락책 역할을 맡길 것이다.”
“연락책이요? 상대가 누구인가요?”
“힐데가르트 아카락시아. 아카락시아 공작가의 막내다.”
오브론 대공은 저를 향해 눈을 또랑또랑하게 빛냈던 소녀를 떠올렸다.
“명심해라. 힐데가르트 공녀를 잘 살펴야 한다.”
그때까지 잠자코 듣고 있던 카유크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아카락시아 가문이라면 같은 다섯 별 공작가지만, 최근에는 그 기세가 몰라보게 쇠퇴한 가문이다.
왜 새삼 그런 가문을 신경 쓰시는 거지?
게다가 가주가 될 소공자도 아니고, 막내 공녀를?
“혹시 감시하라는 말씀이세요?”
“아니다. 말 그대로 주시하라는 뜻이다.”
오브론 대공이 간격을 두고 말했다.
“내 직감이 맞다면 힐데가르트 공녀는 상당한 거물이 될 거야.”
여태껏 그만한 계획성과 실행력, 담대함을 갖춘 열두 살을 본 적이 없다.
대공인 그를 앞에 두면 누구든 지레 뒷걸음질 치게 마련이다. 그건 나이를 따지지 않고 그랬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이름이 알려지는 건 시간문제일 터.’
보통 다섯 별 공작가에서 그만한 인재가 나온다면 후계 싸움으로 집안 내에서 파벌이 나뉜다.
손위 형제들보다 제가 낫다며 앞다투어 나서게 마련이니까.
하지만 힐데가르트는 작위 욕심이 없어 보였다.
욕심내긴커녕 전폭적인 후계자 교육을 바라는 기색이었지.
공작 위에도, 가주직에도 일말의 관심을 보이지 않던 소녀.
심지어 이제는 찾아보기 힘들어진 마법사이기까지 했다.
돌아오는 길에, 그리고 돌아와서도 곱씹어볼수록 묘한 구석이 많았다.
‘뭐지?’
힐데가르트 공녀가 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대공인 그가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는 걸까?
카유크는 조금 궁금해졌다.
“대체 어떤 사람인데요?”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구나.”
카유크는 대공의 대답에 살짝 실망했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우선은 네 눈으로 직접 보고 판단하거라.”
“……알겠습니다.”
카유크가 고개 숙여 인사했다.
머잖아 손자가 집무실을 나서자, 오브론 대공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이번 일이 끝나면 아카락시아 공작령으로 연결된 도로망을 정비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그 소녀에게는 무언가 특별한 구석이 있다.
노신사의 푸른 눈은 직감으로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 * *
시간이 흘러 수도로 올라갈 날이 다가왔다.
짐도 싸 본 사람이 빨리 싸는 법.
힐데가르트는 일찍부터 가방을 싼 뒤 시간을 보내는 데 집중했다.
반면 미하일과 레디스는 이른 아침부터 짐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미하일이 방으로 찾아왔다.
“힐데! 빠뜨린 것 없이 다 챙겼니?”
“응, 준비 끝났어.”
“정말 다 챙긴 거 맞냐? 나중에 마차 돌려서 다시 못 온다?”
레디스가 밖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걱정하지 마. 저금통까지 빠짐없이 챙겼으니까. 흐아암…….”
“응? 웬 저금통?”
미하일이 의아한 얼굴로 물어보자, 레디스가 대신 그런 게 있다고 대답해 주었다.
“나 먼저 로빈이랑 마차에 가 있어도 돼?”
“그렇게 해. 오빠도 얼른 마무리 확인만 하고 갈게.”
“천천히 와.”
힐데가르트는 사용인에게 내 짐을 실어두라고 지시한 뒤 먼저 마차에 올랐다.
그로부터 얼마나 안 가 등받이에 기대 졸고 있을 때였다.
마차 문이 열리더니 외출복을 입은 로빈이 얼굴을 내밀었다.
“여기 계셨군요, 아가씨. 준비는 다 끝나셨어요?”
“응. 로빈이야말로 짐은 다 챙겼어?”
“제 짐은 많지 않아서 금방 끝났어요.”
대공저의 사용인을 내 사람처럼 부릴 수는 없으므로, 이번 여행은 로빈도 함께였다.
힐데가르트는 그녀에게 마차 문을 닫고 들어오라며 손짓했다.
그러고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부탁했던 건?”
“여기 있어요.”
로빈은 기다렸다는 듯 챙겨놓았던 두툼한 꾸러미 세 개를 꺼냈다.
꾸러미의 정체는 바로 돈주머니였다.
“금액은 정확해요.”
“수고했어.”
힐데가르트는 돈주머니 한 개를 내 몫으로 챙겼다.
이 돈주머니로 말할 것 같으면 물방울의 방에서 가지고 나온 금괴의 극히 일부분이었다.
힐데가르트는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금괴를 마음대로 거래할 수 없다.
그래서 대신 로빈을 판매자로 내세웠는데, 그녀에게는 오브론 대공이 찾아준 재산이라며 출처를 대충 둘러댄 상태였다.
‘오브론 대공을 후견인으로 세우길 잘한 것 같아.’
이리저리 핑곗거리로 써먹기 딱 좋았다.
“남은 돈은 잘 챙겨놨지?”
“그럼요. 은행에 맡겨두었어요.”
“잘했어.”
이 정도면 여행 경비는 걱정 없다.
오히려 놀라서 까무러칠 아이들을 설득하는 게 귀찮은 일이지.
얼마 후 미하일과 레디스가 저택에서 내려왔다.
힐데가르트는 마차에서 내린 다음 그들에게 다가갔다.
“오빠. 나 할 말이 있어. 중요한 말이야.”
“응? 왜 그래?”
“뭔데 그러냐. 갑자기 무섭게.”
자연스레 두 사람의 시선이 모였다.
“일단 이거 받아.”
그녀가 두툼한 꾸러미 두 개를 내밀었다.
그러곤 꾸러미를 열어보라며 턱짓한 뒤 가만히 서 있었다.
머잖아 가죽끈을 풀어본 두 사람이 기겁했다.
미하일과 레디스의 눈이 순식간에 솔방울보다 더 커졌다.
“이, 이게 무슨……!”
“야! 너 이거 어디서 났어?!”
“진정해. 훔치기라도 했을까 봐?”
역시 애들은 담이 작구나. 돈주머니에 이렇게 놀라다니.
나중엔 금괴 실물이라도 보면 기절하는 거 아닌지 몰라.
“이거 다 우리 집 돈이야. 오브론 대공 각하가 찾아주셨어.”
“대공 각하께서?”
“응. 상속 문제로 묶여 있었던 돈인데 대리인 자격으로 찾아오셨대. 자세한 건 로빈에게 물어봐.”
미하일이 주머니와 힐데가르트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떠나시기 전에 우리 여행 경비로 쓰라면서 따로 챙겨주셨던 거야.”
“여행 경비로?”
“응.”
“경비치곤 좀 많지 않나?”
“그냥 받아. 올라가서 새 옷도 사야 하고 검술 대회 참가비도 필요하다며.”
“참, 참가비는 챙겨뒀으니 괜찮은데…….”
“우리 이제 돈 많으니까!”
그녀가 허리에 손을 얹고 말했다.
“어디 가서 기죽고 다니는 것보단 낫잖아. 안 그래?”
사실 이건 힐데가르트가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 보더니 떨떠름한 얼굴로 끄덕였다.
미하일이 돈주머니를 받아 든 다음 주머니 끈을 조였다.
“응. 무슨 말인지 알겠어. 좀 놀라긴 했지만…… 감사한 일이네.”
“그러게. 여기까지 챙겨주실 줄은 몰랐는데 좀 얼떨떨하다.”
두 사람이 주섬주섬 주머니를 챙겼다.
‘좋아. 지금은 이 정도로 충분하지.’
오브론 대공은 후견인으로서 신뢰받고, 그녀는 은밀하게 우리 집 재산을 늘려갈 수 있고.
이거야말로 일석이조다.
“도련님! 이제 출발하셔야 합니다!”
마부가 채근하자, 미하일이 시계를 확인했다.
“빼먹고 온 게 있으면 수도에 올라가서 사면 될 거야. 더 늦기 전에 이만 출발하자.”
“응.”
“알겠어.”
“힐데가르트랑 로빈은 같은 마차를 타고, 난 레디스와 함께 탈게.”
그들은 그렇게 두 대의 마차를 나누어 타고 수도로 향했다.
그리고 그때는 몰랐다.
이 여행이 떠날 땐 네 명이었지만, 돌아올 때는 여섯 명이 될 거라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