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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공녀님 (34)화 (34/166)

33화

오브론 대공은 바로 연락해 보겠다는 말과 함께 자리를 비웠다.

키스케는 하염없이 기다리는 동안 그녀를 생각했다.

힐데가르트.

얼마 전 온실에서 만났던 마법사와 똑같은 이름이다.

‘우연일까?’

새벽빛과 함께 사라진 그녀는 키스케가 살면서 처음 만나본 마법사였다.

감히 황태손인 그에게 거짓말을 하질 않나, 꼬맹이 취급을 하질 않나.

정말로 이상하고 달갑지 않은 소녀였지만…….

‘거짓말이 아니라고 맹세해!’

신기하게도 그 만남은 키스케의 기억 속에 지문처럼 남아서 쉽게 흐려지지 않았다.

울 것 같은 얼굴로 웃으면서 사라졌던 마지막 모습 때문일까?

사실 그날의 만남 이후, 키스케는 종종 온실에서 그녀를 떠올렸다.

하얀 은발과 설익은 포도 같은 눈이 망막에서 떨어지질 않았으니까.

혹시 같은 사람일까?

‘……그럴 리가 없지.’

키스케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이름이 똑같다고 해도 한쪽은 의원, 한쪽은 마법사다.

게다가 대공이 은인이라고 말한 상대다. 어린 소녀일 리 없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키스케는 자꾸만 온실에서의 만남을 떠올리고 있었다.

“키스케 전하.”

“응?”

“오늘 중으로 그 의원을 만나고 돌아가실 건가요?”

“아…… 그렇게 해야지.”

“알겠습니다. 그럼 전 마부에게 이야기를 전하고 오겠습니다.”

“그렇게 해.”

키스케는 상념을 털어버리며 고개를 저었다.

할아버지가 쓰러진 뒤부터 계속 ‘검은 먹구름’에 대해서만 생각해 왔다.

그랬던 자신이 잠깐이라곤 해도 다른 생각을 했다는 게 놀라웠다.

‘같은 사람일 가능성은 적다. 이상한 생각은 그만하자.’

노바가 응접실 문을 열고 나가려던 그때였다.

“엇?”

“……아.”

때마침 문 앞에 있던 소녀가 그와 가볍게 부딪쳤다.

“실례했습니다, 레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괜찮아요.”

낭랑하고 활기찬 목소리에 키스케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가 은발의 소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상대가 그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키스케!”

“……힐데가르트?”

정말이었다.

울 것 같던 얼굴로 웃으면서 사라졌던 그녀였다.

* * *

반가운 얼굴이라 무심코 아는 척을 한 것도 잠시.

‘헉. 맞다.’

힐데가르트는 저도 모르게 입을 가렸다.

그녀를 뒤따라온 카유크가 몹시 수상하다는 얼굴로 저를 보고 있었다.

‘뭐야?’

‘알 거 없어.’

힐데가르트는 눈빛으로 대답했다.

황족 중에서도 차기 황제로 암묵적 동의를 얻고 있는 황태손 키스케였다.

그녀와 키스케가 서로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의구심을 사는 건 당연했다.

힐데가르트는 곧바로 태도를 바꿨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카락시아 공작가의 힐데가르트가 키스케 라모프 드롯셀마이어 전하를 뵙습니다.”

키스케 또한 저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노바의 시선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가 어색하게 인사했다.

“……만나서 반갑군.”

머지않아 대공이 응접실로 돌아왔다.

“힐데가르트 공녀.”

“대공 각하.”

“와줘서 고맙네. 이렇게 빨리 그대의 조언을 구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오브론 대공이 쓴웃음을 지었다.

“우선 자세한 이야기는 안쪽에서 나누도록 하지요. 키스케 전하, 정원으로 모시겠습니다.”

로베소 거리에 있는 오브론 대공저는 수도 사택 중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다.

힐데가르트는 ‘우리도 나중에 이런 저택 산다!’라고 다짐하면서도, 키스케의 이야기는 하나도 놓치지 않고 귀담아들었다.

가문 재건이 시급한 힐데가르트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막시밀리언이 저주에 걸린 일이다.

간단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오브론 대공은 힐데가르트와 눈빛을 교환했다.

그녀가 허락하듯 고개를 끄덕이자, 오브론 대공은 그녀를 만나기 위해 아카락시아 공작가에 갔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경위를 차근히 설명했다.

성물을 곁에 두자 깨어난 일리야, 그리고 닷새 전 그녀가 직접 저주를 풀었던 이야기까지.

“그러니까…… 폐하가 저주에 걸린 거라고?”

“그렇습니다.”

황제의 피부에 일어난 증상은, 일리야 때와 똑같은 증상이었다.

그 말인즉, 막시밀리언 또한 저주에 걸렸다는 의미였다.

“일리야 공녀의 병을 낫게 했던 것도 너…… 그대였고?”

“정확하게는 저주를 푼 거야…… 지요.”

‘얘네 대화가 좀 이상한데?’

사이에 낀 카유크는 흘끔거린 뒤 홍차를 마셨다.

“믿기 어려운 말이군.”

키스케의 말에 오브론 대공은 다 이해한다는 듯 끄덕였다.

“저도 처음에는 전하와 똑같은 반응을 보였습니다.”

피부병 따위가 아니라, 제물을 바쳐서 건 저주라니.

하지만 힐데가르트는 저를 믿지 못하냐며 따지지 않았다. 대공이 침착하게 설득했다.

“놀라시는 건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모두 사실입니다.”

“정말로 힐데가르트 공녀가 공의 은인이라는 말인가.”

“예. 사안이 사안인지라 입단속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방에 알릴 수는 없으니까요.”

그 점은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힐데가르트의 말처럼 황제가 병이 아닌 저주에 걸린 거라면, 엄청난 대사건이 되고 만다.

입단속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전하께서만 괜찮으시다면 힐데가르트 공녀가 직접 폐하를 찾아뵙고 상태를 파악하면 수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떠십니까?”

“……폐하는 누군가를 만나 볼 수 있을 만한 상황이 아니야.”

“혼수상태, 맞지요? 한 번도 깨어나지 못하고 계실 테죠. 피부는 전부 거뭇하게 변한 채.”

힐데가르트는 키스케가 입 밖으로 내어 말하지 않은 정보까지 전부 꿰고 있었다.

“정말로…… 네가 풀 수 있다는 건가? 폐하의 저주를?”

“네.”

힐데가르트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했다.

이런 거짓말로 오브론 대공과 힐데가르트가 이득을 챙길 만한 구석은 없었다.

‘오히려 이 일을 가지고 온 건 나지.’

키스케가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힐데가르트도 차마 대공에게는 말하지 못할 사실을 깨달았다.

누가 감히 오브론 대공가를 들쑤시면서까지 저주로 실험을 해보는 건가 했더니.

‘막스를 저주하기 위해, 우선 오브론 대공가로 시험해 본 거야.’

범인은 저주가 성공했다는 걸 깨닫자마자, 황제를 저주하기 위해 준비한 게 틀림없었다.

“한 가지 묻겠다, 오브론 대공.”

“하문하십시오, 전하.”

“그대가 힐데가르트 공녀를 보증할 수 있나?”

힐데가르트가 일리야 공녀를 낫게 한 건 사실인 듯하다.

하지만 상대는 제국의 황제다. 혹여라도 일이 잘못되었을 때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다.

당연히 오브론 대공이 머뭇거릴 거라 생각했던 키스케였으나…….

“예. 그리하겠습니다.”

그의 예상은 보란 듯이 빗나갔다.

대공이 이 정도로 그녀를 신뢰한다는 건가?

키스케는 혼란을 겪었다.

“……그러면 공녀도, 폐하를 치료할 자신이 있나?”

“물론입니다.”

힐데가르트가 자신 있게 답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폐하를 다시 눈 뜨게 하겠습니다.”

그 대답은 적어도 침묵하던 황실 의원보다는 훨씬 나았다.

키스케가 그녀를 물끄러미 보았다.

* * *

힐데가르트는 급히 입궁할 준비를 마쳤다.

그녀가 오브론 대공저를 나서자, 노바가 마차 문을 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키스케 전하를 보필하는 시종 기사 노바플랑카스타체입니다.”

“노바플랑카스타체?”

“네, 노바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아하?”

힐데가르트는 그의 소개를 듣더니 짓궂은 눈으로 마차에 탄 키스케를 응시했다.

키스케는 너도 이름을 속인 적 있지 않냐며 말하는 대신 슬그머니 시선을 피해버렸다.

“전하께 이렇게 좋은 친구분이 계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실례지만 어떤 관계이신지 여쭈어도…….”

“노바.”

키스케가 넌지시 그를 꾸짖었지만, 노바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키스케를 자랑스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빨리 타. 노바 넌 뒷좌석에 앉고.”

“윽. 알겠습니다.”

키스케의 냉정한 축객령에 노바는 아쉬운 얼굴을 했다.

힐데가르트가 황실 마차에 앉자마자 노바가 문을 닫았다.

찰칵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자 비로소 두 사람은 한결 편하게 서로를 응시했다.

힐데가르트를 바라보는 키스케의 눈빛에는 다시 만나서 반갑다는 감정과 복잡한 마음이 고스란히 묻어나왔다.

‘울 것 같은 얼굴로 사라져 버릴 때는 언제고.’

저렇게 생기 넘치는 표정으로 다시 얼굴을 내미는 거야.

살짝 부아가 치밀었다.

마차는 천천히 황궁으로 향했다.

“나랑 온실에서 만난 거, 아무한테도 이야기하지 않았구나?”

“……딱히 널 위해서 그런 건 아니야. 애꿎은 경비들만 고생할 테니까 넘어가 준 거지.”

“다음부터는 나도 다음에는 네 말대로 하려 했어.”

“뭐?”

“황궁에 용건이 있으면 접견 신청서를 쓰라며. 기억 안 나?”

힐데가르트가 살며시 웃었다. 여전히 목소리도 밝았다.

키스케는 그 변함없는 모습이 살짝 반가웠지만, 곧바로 투덜댔다.

“접견 신청서를 넣었어도 곧바로 만나지는 못했을걸. 너처럼 막무가내인 마법사라면.”

“칭찬 고마워.”

“넌 내가 황태손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반응이네.”

“네가 황족이라는 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았는걸.”

“금발에 붉은 눈이라서?”

“네가 직접 말했잖아? 막시밀리언 쥬브네스 드롯셀마이어 황제 폐하는 내 할아버지 되시는 분이다!”

키스케가 미간을 구겼다.

“내가 그렇게 당당하고 재수 없는 느낌으로 말했다고?”

“난 재수 없단 말까진 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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