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원래는 연이어 추궁하려 했다.
폐하가 살아 있냐고 확인했던 건, 죽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어서 그랬던 거 아니야?
게다가 사라질 때 네 얼굴이 얼마나 이상했는지 알아?
넌 이상해.
수상한 데다, 심지어 마법사잖아.
그렇게 차곡차곡 쌓인 말들이 분명 남아 있건만.
‘……왜 말이 안 나오지?’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사라져 버린다.
그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유치한 불평뿐이었다.
“또 대충 둘러대는 거겠지. 온실에서도 그러더니.”
“키스케. 난 네게 거짓말을 하지 않을 거야.”
힐데가르트가 조용히 말했다.
“네게 거짓말쟁이로 몰리는 건 마음 아플 것 같아. 그러니까 그 질문에는 대답하기 어려워.”
“그래봤자 결국 말 못 하겠다는 거잖아.”
“음, 그래도 한 가지는 믿어줘.”
힐데가르트가 살며시 고개를 숙이자, 그녀의 은발이 보드라운 면사포처럼 흘러내렸다.
“나는 폐하가 살아 있다는 게 누구보다도 기쁜 사람이야.”
“…….”
“그래서 너를 도울 수밖에 없어.”
“뭐야, 그게.”
“그만큼 나한테도 중요한 문제라는 말이야. 이 일은.”
키스케는 입을 다물었다.
한참 뒤 새어 나온 목소리는 훨씬 더 불퉁했다.
“믿을지 안 믿을지는 내가 결정해.”
사람은 쉽게 믿는 게 아니다.
믿고 싶다 한들 섣불리 그래서는 안 된다.
아무리 감정이 기울어도, 믿고 싶어 해도, 마음이란 열어두는 만큼 돌아오는 상처만 커질 테니까.
의외로 키스케는 더 끈질기게 그녀를 추궁하지 않았다.
그녀가 입을 다물자 두 사람은 같은 고요함을 친구 삼았다.
얼마 후 먼저 침묵을 깬 건 키스케였다.
“어지러운 건?”
“많이 나아졌어.”
그가 힐데가르트의 안색을 살폈다.
“아직도 안색은 안 좋아. 오늘은 이쯤 하는 게 좋겠어.”
“뭐? 하지만…….”
힐데가르트가 볼멘소리를 냈다.
“마력이 부족하다며. 장소가 좁혀졌으니 나머지는 내일 찾아.”
“그래도 오늘 찾아내는 게 나을 것 같은데.”
“할아버지가 빨리 낫는 것도 중요하지만, 네가 쓰러져도 저주를 풀 수 없는 건 마찬가지잖아.”
“윽…….”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키스케의 말마따나 어차피 제물과 매개체를 찾아낸다 한들 당장 마력이 없는 그녀로서는 곧바로 소멸시키기는 게 어려웠다.
키스케가 다시 그녀를 설득했다.
“황자비 전하에게는 내가 이유를 대서 오늘 중에 정원을 수색하라고 할게. 땅에 묻혀 있는 거지?”
“응. 그런데 꼭 땅에 묻혀 있다기보단 물속에 마력이 퍼진 채…….”
거기까지만 말했던 힐데가르트가 문득 말을 끊었다.
‘가만. 제물이랑 매개체가 반드시 땅속에 있다고만은 할 수 없잖아?’
저주가 담긴 마력은 물속에 스며든 채 이 근방을 떠돌고 있다.
그렇다면 매개체와 제물이 숨겨져 있는 곳은 땅이 아니라…….
힐데가르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가 단걸음에 지면 수로와 연결된 분수대까지 달렸다.
“이봐?”
“이봐, 가 아니라 힐데가르트!”
돌을 깎아서 만든 3단 분수대는 그녀보다 족히 두 배는 컸다.
분수에서는 맑은소리와 함께 작은 수로를 따라 정원 곳곳으로 물이 흐르고 있었다.
힐데가르트는 망설임 없이 몸을 쭉 빼서 분수 바닥을 살폈다.
바닥에는 없다.
하지만 분수대는 위쪽 원반에서부터 물이 아래로 흘러내리는 구조였다.
‘어쩌면.’
그녀가 분수대의 원반을 밟고 올라갔다.
그리고 그곳에 있었다.
“찾았다!”
힐데가르트가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파지지직!
천둥에 하늘이 번쩍이듯 일대에 거대한 스파크가 튀었다.
‘결계?!’
놀란 힐데가르트는 손을 뒤로 뺐다. 조금만 더 늦게 반응했으면 손이 못쓸 뻔했다.
‘쉽사리 발견하지 못하도록 결계를 걸어놨던 거였어!’
하지만 드디어 제물과 매개체를 발견했으니,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힐데가르트!”
“떨어져 있어, 키스케!”
이까짓 결계 따위, 부숴버리겠어!
그렇게 다짐하자마자 힐데가르트의 몸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가슴에서 팔로, 팔에서 손끝으로 퍼져간 마력을 한 번에 응축시켜서 쏘아낸다.
타아앙!
빠지직, 거리는 소리와 함께 결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힐데가르트는 결계와 마력이 정통으로 부딪치는 바람에 작게 토혈했다.
키스케는 그 광경을 보자마자 창백해졌다.
“힐데가르트!”
“괜찮아. 한 번 더……!”
키스케는 무심코 괜찮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저 자그마한 몸에서 어떻게 그런 힘과 의지가 쏟아져 나오는 건지.
힐데가르트는 수복되려 하는 결계를 향해 마력을 또 한 번 쏟았다.
펑!
빠지직! 빠지지직!
재생하던 결계에 다시금 균열이 일었다.
좀 전보다 더 큰 소리가 나자 힐데가르트의 얼굴에 웃음이 일었다.
‘됐어. 이걸로 마무리한다……!’
마지막 일격이 결계를 반으로 갈라내듯 쏟아졌다.
쩌적, 소리를 내며 산산이 부서진 결계와 마력 파편이 힐데가르트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의 물결 같은 머리카락이 쉴 새 없이 흔들렸다.
잔물결처럼 반사하는 은빛 머리카락이 무심코 키스케가 숨을 멈출 정도로 아름다웠다.
결계가 깨진 분수대 앞에서, 힐데가르트는 마력을 갈무리하며 숨을 골랐다.
그녀는 곧바로 분수대의 가장 윗부분을 확인했다.
“역시……!”
여기에 숨겨 놓았던 거구나.
한 손으로도 다 쥘 수 없을 만큼 굵고 커다란 아나콘다의 사체였다.
[나는 막시밀리언 쥬브네스 드롯셀마이어의 완전한 죽음과 필멸을 바란다.]
‘……아.’
힐데가르트는 구역질을 참으며 사체를 들여다보았다.
‘뱀의 몸통에 막시밀리언의 이름이 빼곡하게…….’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뱀의 사체에 손을 댄 그 순간.
사체 주변에 깔려 있던 저주가 삽시간에 한데 뭉쳤다.
거기까지는 일리야 공녀 때와 비슷했다.
그러나 형태를 갖춘 뱀은 곧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힐데가르트와 키스케를 지나치더니 담을 타기 시작했다.
저주의 대상을 찾아서 떠나는 걸까?
뱀은 곧장 담을 타고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힐데가르트가 헛숨을 삼켰다. 동시에 키스케가 비명을 지르듯 물었다.
“방금 그건 뭐야?!”
“키스케! 당장 폐하의 침실로 가야 해!”
“뭐?”
“빨리! 방금 그 뱀보다 먼저 도착해야 해!”
힐데가르트는 그렇게 재촉한 뒤, 곧바로 뱀의 사체를 마력의 불꽃으로 태웠다.
이 저주를 파훼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제물을 태우는 법이었다.
하지만 불은 금방 꺼져버렸다. 제물이 젖어 있는 탓에 좀처럼 불이 붙지 않았다.
‘이래서 분수 안에 넣어둔 거였어!’
이렇게 된 이상 두 번째 방법을 쓰는 수밖에 없었다.
힐데가르트는 애뮬릿을 집어 들며 자리에서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바람에 그녀의 몸이 비틀거렸다.
키스케의 팔이 단단히 그녀를 안으며 부축했다.
“어떻게 하라고?”
“키스케, 너라도 먼저 가서…….”
그러나 힐데가르트는 말을 다 끝마치지 못했다.
키스케가 양팔로 그녀를 안아 올렸다.
힐데가르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키스케의 팔과 가슴은 단련된 기사처럼 단단하고 넓었다.
어느새 키스케가 그녀를 안은 채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그다음엔?”
“아, 어?”
“황궁에 도착하면 그다음엔!”
하마터면 떨어질 뻔한 힐데가르트가 그의 목에 팔을 감으며 말했다.
“아까 그 뱀이 폐하의 목을 조르고 있을 거야. 그놈을 죽여야 해.”
저주를 힘으로 파훼하려면 마력을 담은 공격이 가장 효과적이다.
문제는 힐데가르트였다.
‘탐색 마법과 결계 때문에 마력을 너무 썼어.’
하필이면 직전에 쓴 마법 때문에 온몸이 물기를 꽉 쥐어짠 수건 같았다.
‘조금만 더 마력이 있었더라면.’
하다못해 플람처럼 마법에 해박한 제자가 한 명이라도 곁에 있었으면 이렇게까지 애먹을 일은 아니었는데!
아쉬워하는 사이, 키스케는 어느새 황제궁 앞에 도착했다.
“노바!”
“키스케 전하!”
“따라와!”
키스케의 명령으로 황제궁을 지키고 있었던 시종 기사는 군말 없이 뒤따랐다.
키스케는 힐데가르트를 안은 채 계단을 두세 개씩 성큼성큼 뛰어올랐다.
황제궁은 예상대로 커다란 소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꺄아악!”
“누, 누가 좀…… 아무나 와줘요! 폐하의 침실에 거대한 뱀이……!”
“뭐? 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정말이에요! 내 눈으로 똑똑히 봤단 말이에요!”
황제궁의 시종들이 말한 그대로였다.
키스케가 황제의 침실 문을 걷어차다시피 하며 들어갔을 때는, 이미 검은 뱀이 막시밀리언의 몸을 휘감고 있었다.
“폐하!”
헉, 하고 숨을 삼킨 노바가 침대로 뛰어들었다.
그는 엉겁결에 뱀을 맨손으로 떼어내려 했다.
하지만 노바의 손은 애꿎은 허공만 휘저었다.
아무리 해도 뱀을 붙잡을 수 없었다. 마치 실체가 없는 것 같았다.
“마력을 담아서 공격하지 않는 한 소용 없어!”
키스케의 품에서 벗어난 힐데가르트가 저주에 쓴 애뮬릿을 팔목에 감았다.
그러자 애뮬릿에서 저주의 기운이 깃든 마력이 그녀의 팔을 타고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이 방법은 피하고 싶었지만……!’
저주가 담긴 불순한 마력이라 해도, 마력은 마력. 이용할 수 있는 건 다 이용하는 수밖에.
“키스케, 검! 뭐든 아무거나!”
키스케는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그녀에게 검을 던졌다.
힐데가르트는 단검을 뽑아 들었다.
칼날에 마력을 두르자 붉은빛이 감돌았다.
동시에 그녀의 팔목이 저주에 걸린 사람처럼 거뭇하게 변하며, 비늘이 돋아나듯 딱딱해지기 시작했다.
“아무도 들어오지 마라!”
키스케가 주변을 물린 순간.
힐데가르트가 온 힘을 다해 칼끝으로 뱀의 몸통을 찔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