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
“네게 하고 싶은 말이 있대. 너는 그게 뭔지 짐작이 가?”
막스가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고?
힐데가르트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내가 저주를 푸는 데 도움을 드려서 그런 거 아닐까? 아, 혹시 저주에 대해서는 아직도 함구하고 있어?”
“아니, 폐하도 전부 알고 계셔. 오브론 대공이 입궁했거든.”
“하긴 내가 좀 오래 쓰러져 있었지.”
“…….”
키스케는 애매한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황제는 특유의 노련함과 건강을 되찾으며 빠르게 회복했다.
천명을 다한 게 아니겠냐는 듯 황제를 대하던 이들은 황급히 고개를 조아리기 바빴다.
오브론 대공이 입궁하여 키스케와 함께 저주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도, 태도는 여전히 침착했다.
다만 힐데가르트의 이름을 들었을 때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는 직접 만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저주를 풀어준 은인을 접견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일까?
키스케는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폐하께서도 저주를 푸는 데 네 역할이 컸다는 걸 아셔. 혹시 바라는 게 있냐고 물어보시거든 원하는 대로 말해도 돼.”
“딱히 없는데……. 우선 알겠어.”
“그런데 너 오브론 대공가에서도 똑같은 일을 했다며. 그때도 이렇게 위험한 일이었어?”
“이번처럼 위험하지는 않았어.”
그러자 뜻밖의 반응이 돌아왔다.
“……항상 그러는 건가?”
“응?”
키스케는 팔짱을 낀 채 퉁명스레 물었다.
“저주에 걸린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가리지 않고 발 벗고 나서면서 돕고 그러냐고.”
이건 또 무슨 소리람.
별 황당한 소리를 다 들어본다는 듯 힐데가르트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내가 자선 사업가로 보여?”
“쓰러질 정도로 어려운 일이었다면 미리 말했어야지.”
“말한다고 뭐가 달라져…… 그보다 나 지금 좋은 일 하고 혼나는 거니?”
힐데가르트는 살짝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오빠도 자주 저렇게 잔소리를 했지. 너무 다른 사람 일에 목숨 걸지 말라면서.’
키스케의 다듬어지지 않은 말투는 꼭 레온하르트를 떠올리게 했다.
그녀는 무심코 웃음을 터뜨렸다.
“그냥 우연이 겹친 것뿐이야. 이번에는 운이 안 좋았어.”
“운?”
“그래. 하필이면 마력이 고갈되서 애먹은 거지…… 아! 그래도 나쁘기만 했던 건 아니야. 너한테 마력이…….”
“운도 실력이야.”
요놈 참 말이 짧구나.
하지만 힐데가르트는 화를 내는 대신 그를 빤히 보며 말했다.
“있잖아, 키스케. 혹시 다른 사람이 걱정될 땐 그렇게 말하지 말고 ‘네가 쓰러져서 걱정했어’라고 말해봐. 그럼 기뻐할 거야.”
“…….”
키스케는 정곡을 찔린 사람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힐데가르트는 더욱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누가 걱정했다고.”
“어? 하나도 걱정 안 했어?”
“그렇게 말한 적은 없잖아.”
키스케가 툴툴댔다.
“어쨌든 내일 폐하를 알현할 거니까 마음의 준비를 해둬.”
“알겠어, 알겠어.”
키스케는 여러모로 할 말이 많았지만, 어쩐지 그녀와 이야기를 나눌수록 말려드는 것 같다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차라리 이 자리를 피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난 갈게.”
“아. 키스케, 잠깐만! 한 가지 더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뭔데.”
“너 혹시 마법을 배운 적 있어?”
“뭐?”
“마법 말이야, 마법.”
힐데가르트는 검은 뱀을 찌르던 때를 떠올렸다.
마력을 거의 다 쓰다시피 했던 자신이 끝까지 저주를 풀 수 있었던 건 키스케가 도와준 덕분이었다.
‘본인은 모르고 있는 것 같은데.’
잘못 보았을 리 없다.
단검을 감싸고 있었던 푸른빛은 분명 제 것이 아닌 키스케의 마력이었다.
“내 생각엔 너에게 마력이 있는 것 같아.”
“나한테?”
“응. 마법사의 소질이 보여.”
“헛소리. 거짓말하지 마.”
“헛소리라니! 반응이 왜 그래?”
마력을 타고났다는 건 어느 정도 선천적인 재능을 타고났다는 소리다.
‘돈 많고 부려 먹기 좋은 제자가 어디 있나 했더니, 여기 있었네.’
황궁으로 왔을 때…… 아니, 온실에서 키스케를 만났을 때만 해도 이렇게 제격인 상대가 있을 줄은 몰랐다.
힐데가르트가 영업용 미소와 함께 사뭇 친절하게 말했다.
“키스케, 나한테 마법을 배워볼 생각 없어?”
“싫어.”
“왜?”
“그냥. 네 웃는 얼굴이 기분 나빠.”
“야! 내 회심의 영업용 미소에 무슨 악담을 퍼붓는 거야?”
“너 지금 자기 입으로 영업용 미소라고 했다?”
키스케가 코웃음을 치더니 문 앞에 서서 말했다.
“백 보 양보해서 내게 마력이 있다 해도, 황태자인 내가 나보다 어린 꼬맹이한테 마법을 배운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얘가 뭘 모르네.
힐데가르트가 차분히 말했다.
“마도학은 나이랑은 상관없어. 원래 더 지식이 높은 사람에게 배우는 거야. 이번 일로 마법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직접 봤잖아? 내가 잘 가르쳐 줄게.”
“싫은데. 넌 제자를 들여도 가차 없이 가르칠 것 같아.”
“윽.”
그 점은 차마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었던 힐데가르트였다.
“그러지 말고 한 번 생각해 봐. 마법사가 되면 좋은 이유가 백한 가지쯤 있어.”
“백한 가지나 있다고? 첫 번째는 뭔데?”
힐데가르트가 손뼉을 짝 소리 나게 치며 말했다.
“나를 매일매일 만날 수 있지!”
“바보냐? 난 간다.”
키스케는 타협의 여지도 없다는 듯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설마 단칼에 거절당할 줄은 몰랐던지라, 힐데가르트는 주먹을 쥐었다.
‘매정하긴. 잘생기면 다야?’
조금도 아쉽지 않다는 저 태도란.
힐데가르트는 굳게 닫힌 문을 보며 투덜거렸다.
* * *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황제 막시밀리언은 옥좌에 앉은 채 초조하게 힐데가르트를 기다렸다.
“……아닐 수도 있다. 스승님이 아닐 수도 있어.”
하지만 만약 정말로 스승님이라면?
막시밀리언은 그의 손가락을 꼭 쥔 채 쓰러졌던 소녀를 떠올렸다.
‘다행이다, 막스…….’
검은 별 교단.
뽑아내고 또 뽑아내도 잡초처럼 살아남아 어딘가에 뿌리를 내리던 교단이 기어코 황실에게 그 마수를 뻗다니.
그의 스승이 살아 있었다면 절대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으리라.
꼭 지금처럼 달려와서 그를 구하고, 불같이 화를 냈을 것이다.
‘스승님…….’
막시밀리언의 스승은 마성신을 봉인하는 도중 목숨을 잃었다.
처음에는 믿을 수가 없었다.
스승님이 플람을 구하다가 죽었다니.
그게 사실이냐고, 정말로 형 때문에 스승님이 죽은 거냐며 달려가서 다그칠 수도 없었다.
플람은 이미 넋이 나가 있었기 때문이다.
죽은 것과 다름없는 실종.
시체를 찾지 못해서, 살아 있을 거라는 희망을 차마 버리기 어려웠다.
그렇게 1년, 2년, 3년…….
결국, 인정해야만 했다. 그녀가 죽었다는 걸.
플람이나 레온하르트 공작처럼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막시밀리언은 아니었다.
그는 스승이 살아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살아 있다면 그들 앞에 나타나지 않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신 차려, 막스!’
우연일까?
그런 우연이 가능한 걸까?
허황된 상상이 자꾸만 고개를 치켜든다.
“힐데가르트 아카락시아, 폐하를 뵙습니다.”
“……고개를 들어라.”
막시밀리언은 알현실에서 고개를 든 소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갸름한 턱선에 좁은 어깨.
찰랑거리는 은발과 설익은 포돗빛 눈동자는 옛 스승과 닮아 있었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분명 다른 얼굴이었다.
“키스케와 대공에게 이야기는 전해 들었다. 어떠한 말로 고마움을 표시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막시밀리언은 일렁이는 마음을 꾹 참고 황제답게 말하는 데 모든 여력을 쏟았다.
“원하는 게 있으면 무엇이든 말해보아라.”
“바라는 것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사양할 것 없다. 공녀가 세운 공이 적다고 말할 자는 없을 것이다.”
황제가 저주받았다는 사실이 퍼져나가서는 안 된다. 그러니…….
“이 일을 바깥으로 알릴 수 없으니, 그대의 공을 널리 알리지 못하는 대신이라고 생각하거라.”
그렇게 말하자 소녀가 희미한 웃음을 내비쳤다.
‘정말 건강한 것 같아. 다행이야.’
하필 저주를 푼 직후 쓰러지는 바람에, 막시밀리언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는데.
이렇게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니 마음이 놓였다.
동시에 착잡한 마음도 들었다.
‘성은을 내리겠다니…… 역시 알아보지 못하는구나.’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이 쓰렸다. 그녀가 시선을 내렸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힐데가르트가 차분히 답했다.
막시밀리언이 곁에 서 있던 시종장에게 손짓했다.
“공녀가 원하는 대로 해주어라.”
“예, 폐하.”
“그럼 모두 자리를 비우도록 하라. 시종장.”
“예, 그럼 힐데가르트 공녀님. 이쪽으로…….”
“그게 아니라.”
막시밀리언이 턱을 치켜들었다.
“공녀만 남겨두고 모두 나가보란 말이야.”
“예?”
좀처럼 되묻지 않던 시종장이 눈을 끔뻑였다.
“내가 두 번 말해야 하나?”
막시밀리언이 언짢은 눈으로 그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창백해진 시종장이 순식간에 사람을 물렸다.
머잖아 알현실에는 막시밀리언과 힐데가르트,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힐데가르트는 이 상황에 조금 놀라고 말았다.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사람은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믿고, 행동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기에.
이성은 그럴 리 없다고 말하지만, 감정은 혹시 모를 일이라며 자꾸만 그녀의 가슴을 쿡쿡 찔렀다.
“80년 전 일이야. 꼭 그대와 같은 이름을 가진 아름다운 공녀께서, 황자였던 나를 가르쳤네. 그대에게는 고모할머니가 되시는 분이겠구나.”
“…….”
“그분께서 살아계셨다면, 수도에 아카락시아 공작저가 없다는 것에 경을 치셨을 분이지.”
막시밀리언은 한 걸음씩 그녀에게 다가갔다.
본래 알현 시에는 자리를 지켜야 할 황제였다.
옥좌에서 내려와 가까이 다가가는 일은 있을 수도 없다.
그러나 막시밀리언은 공녀에게 다가갈수록, 설익은 포도색 눈이 속절없이 흔들리는 광경을 고스란히 목격했다.
물기 어린 눈동자에 제 모습이 한가득 담길 무렵.
막시밀리언은 까마득하게 어린 소녀 앞에서 무릎을 꿇으며 눈높이를 맞췄다.
“짐은 광인 취급 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으나…….”
“…….”
“내 스승께서 돌아오셨을 때 알아보지 못할 바에야 광인이 되는 쪽이 낫겠구나 싶어서.”
입가에 경련이 일어난 것은 그도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미친 척, 혹시나 해서 여쭈어본 셈입니다만.”
막시밀리언의 말투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힐데가르트는 숨이 멎은 사람처럼 상대를 바라보았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한숨이 나올 만큼 늙어버린 제자를 보며, 신음 같은 한마디가 겨우 흘러나왔다.
“……막스.”
“그렇게 불렀던 사람은 전부 죽었습니다, 스승님.”
“…….”
“정말로 돌아오셨군요.”
막시밀리언은 후들후들 떨리는 팔로 그녀를 껴안았다.
“어떻게……? 어떻게 알고…….”
“모를 수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기억이 낡아져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의 걸음걸이, 목소리의 높낮이, 눈빛, 말투.
그 모든 게 어제처럼 선명한 사람.
가까이 다가갈수록 힐데가르트는 입술을 깨문 채 울어버릴 것 같은 얼굴을 했다.
분명 다른 얼굴이었다.
상식적으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희미하게 웃는 모습이.
우아하게 손끝을 올리며 인사하는 모습이, 울 것 같던 얼굴이 그가 알던 스승의 모습 그 자체였다.
어떻게 못 알아볼 수가 있을까?
오래된 기억 속에서 그녀가 환상처럼 직접 걸어 나왔는데.
기꺼이 무릎을 꿇어 눈높이를 맞춰서라도 확인해 보고 싶은 상대.
그에게는 힐데가르트가 꼭 그랬다.
“보고 싶었습니다. 정말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알아보지요.”
사람은 보고 싶은 사람을 반드시 알아본다.
그런 사람은 수백 명의 군중 사이에서도 별처럼 빛나고, 별똥별처럼 가슴으로 떨어지니까.
막시밀리언은 어린애처럼 울었다. 그가 그녀를 꼭 안았다.
“……도마뱀 한 마리 포기 안 하는 바보인 줄은 진작 알았다만.”
너는 정말 체념을 모르는구나.
“내가 너의 스승으로서 부족한 게 많구나.”
힐데가르트는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달래며 폭삭 늙은 제자를 마주 안았다.
기어코 그녀의 눈에서도 기쁨의 눈물이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