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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공녀님 (46)화 (46/166)

45화

힐데가르트는 80년이라는 세월을 얕잡아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소비의 근본이 되는 의식주가 상당히 달라졌다는 게 그 이유였다.

오브론 저택에서 일하는 사용인들만 살펴보아도 그렇다.

모두가 예전보다 훨씬 일하기 편한 옷을 입고 있었다.

식생활도 마찬가지다. 농업이 몰라보게 나아졌는지 밀과 보리를 가득 담은 마대가 안정적으로 공급되고 있었다.

‘그나마 변하지 않은 건 저택이나 건축물이지만 이것도 내 분야는 아니야.’

건축 양식이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하는 법.

지나치게 혁신적이라면 되레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천재적인 건축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사업이든 이미 다른 공작가에서 선점하고 있을 확률이 높아.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는 건 쉽지 않을 거야.’

차라리 우리 가문을 시작점으로 내세울 만한 새로운 사업이 없을까?

아카락시아의 강점.

우리 가문과 내가 아니라면 대체할 수 없을 방법…….

좀처럼 고민을 해보아도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았던 그때였다.

대련을 끝낸 레디스가 먼저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어? 오빠 수련 벌써 끝낸 거야?”

“페이스를 조절하려고. 너무 무리했다간 정작 중요한 시합 때 힘이 빠지니까.”

“그것도 그렇네.”

“그보다 너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표정이 확확 바뀐 거야?”

“나? 내 표정?”

힐데가르트가 뺨을 주물렀다.

“그렇게 이상한 표정이었어?”

“잘못 구운 빵처럼 구겨졌던데.”

힐데가르트가 쏘아보자 레디스는 시원하게 웃으며 목검을 내려놓고 테이블 맞은편에 앉았다.

카유크가 씩씩거리며 달려온 건 그때였다.

“레디스! 한 번 더 해!”

“안 해. 네 번이나 졌으면 그냥 좀 포기하지?”

“이기고 튀는 게 어딨어!”

“다음에 해. 뭣하면 아카락시아 공작령으로 오든가.”

“어느 세월에? 오브론 대공령에서 아카락시아 공작령까지 가려면 닷새는 잡아야 한다고!”

“그럼 계속 패배한 기록을 가지고 있으면 되지.”

“와, 열받네!”

카유크는 레디스의 깐족거리는 말에 질색하더니, 돌연 힐데가르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쩔 수 없다. 힐데, 네가 레디스 동생이니 협력해.”

“무슨 협력?”

“마법사인 네가 활약할 순간 아니냐? 순간 이동 마법으로 이 몸을 영지까지 모셔가도록!”

“또 또 또 헛소리하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잠깐만.

순간 이동 마법?

그 순간 힐데가르트의 머릿속에서 꽈르릉하고 작은 번개가 쳤다.

‘이거다!’

왜 떠올리지 못했을까?

마법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그 활용도가 무궁무진하다.

그중 순간 이동은 물리적인 거리를 뛰어넘음으로써 가장 유용하게 쓰이는 마법이었다.

물방울의 방과 황궁 온실이 연결된 것처럼, 만약 제국 각지에 이동 게이트를 만든다면?

이동 거리에 따라 사용료만 받는다고 해도 천문학적인 돈은 기본이다.

‘이동 게이트 사업.’

이동 게이트를 통해 물자가 모이면 사람도 모이게 마련.

솜씨 좋은 장인은 세공품을 언제든지 파손 걱정 없이 제국 각지로 보내줄 수 있다.

실력이 뛰어난 용병대도 게이트를 타고 물자를 안전하고 호송해 줄 수 있고.

아카락시아 공작령을 중심으로 수도 발프람까지 불과 몇 분 만에 도착하는 신세계가 열린다면…….

그 변화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감히 누가 다섯 별 공작가의 떨거지라 부를 수 있을까?

마탑마저 무너진 지금, 이 사업은 오직 그녀만이 가능했다. 이동 마법을 연구한 적 있는 전직 마탑주기도 하니까!

“카유크! 넌 천재야!”

“뭐, 뭐?!”

“천재란 말이야! 천재!”

힐데가르트는 환희에 찬 얼굴로 일어나 카유크를 와락 껴안았다.

“오늘만 인정해 줄게! 이 귀여운 자식! 깜찍한 자식! 사랑스러운 녀석!”

“사랑……?!”

“푸웃……! 쿨럭, 쿨럭……!”

카유크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붉어졌다.

그가 재빨리 레디스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마시던 차를 뿜은 레디스의 얼굴이 심각하리만치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그 자리를 쑥대밭으로 만든 힐데가르트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럴 때가 아니지! 지금 당장 확인해 봐야겠어!’

이동 게이트 사업이 얼마만큼 성공적일지는 사람들의 반응과 실용성에 달려 있었다.

“나 잠깐 로빈한테 다녀올게!”

힐데가르트가 총총걸음으로 안뜰을 벗어났다.

봉변을 당한 카유크가 아연한 얼굴로 그 뒷모습을 바라본 지 얼마나 됐을까.

“……동생. 우리 대련 한 판 더 할까?”

“시, 싫은데……. 그리고 내가 형이거든.”

“사양할 거 없어.”

“나야? 내가 잘못한 거야? 이게 내 잘못이냐!”

원하던 대로 한 번 더 대련하게 된 카유크가 울상으로 소리쳤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다.

* * *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동 게이트 사업은 대박의 조짐이 보였다.

물어보는 사람마다 그게 가능하냐는 말을 할지언정, 있으면 정말 좋겠다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는 게 그 증거였다.

“순간 이동이요? 공녀님은 재미있는 발상을 떠올리시는군요.”

오브론 대공저의 사용인들은 그녀의 질문을 귀엽게만 받아들였다.

설마 그 마법을 사업으로 키울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하는 눈치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친절한 대답을 건넸다.

“만일 그런 게 가능하다면 쉬는 날 가족을 만나러 가고 싶네요. 저는 고향이 멀거든요.”

“전 악기를 사 오고 싶어요. 수도에서 사기엔 너무 비싸서 웃돈을 많이 얹어줘야 해서요.”

“여행을 갈 것 같습니다. 딸아이에게 호수를 보여주고 싶네요.”

예상대로 이동 게이트의 활용처는 무궁무진했다.

힐데가르트가 생각지도 못한 지점에서도 효용성이 대두되었다.

오랜만에 마주친 휴리 경이 질문을 듣더니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여러모로 유용할 것 같군요.”

“유용?”

“예. 범죄자를 호송할 때 도주 위험이 줄어들 테니까요.”

“아……!”

힐데가르트는 정전기를 느낀 사람처럼 튀어 올랐다.

이동 게이트는 모든 사람이 제각기 다른 이유로 필요로 했다. 수요는 있어도 공급이 없는 영역이었다.

‘이건 대박 난다.’

대박이 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은 건 침구를 정리하던 로빈에게서 나온 말이었다.

“그럼 실력 좋은 의사를 수도에서 언제든지 모셔올 수 있는 건가요?”

“어, 그렇겠지?”

“그럼 치료 시기를 놓치는 사람이 줄어들겠네요. 분명 목숨을 구하는 사람도 많이 생길 거예요.”

그날 밤.

설레는 마음에 도무지 잠들 수 없었던 힐데가르트는 결국 침대에서 일어났다.

가능성이라는 이름의 문이 차례대로 열릴 때마다 마치 새로운 세계를 엿본 기분이었다.

이동 게이트 사업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나 마찬가지다.

아카락시아 가문을 단번에 돈방석에 앉혀줄 만큼 사업성이 높은 건 기본이다.

황실의 중요 죄인을 호송하거나 재해 물자를 운송하는 등, 사적인 이익만을 추구하지 않고 제국을 널리 이롭게 하리라.

‘공익적으로도 충분히 유용해.’

그 말인즉, 공작 가문이 장사꾼을 자처한다는 인상은 주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거라면 레온 오빠도 관을 박차고 일어날 일은 없다.

제대로 자리를 잡는다면 제국의 근간을 뒤흔드는 혁신을 불러오리라.

‘굉장한 주목을 받겠지.’

파급 효과는 순식간에 나타날 터.

그렇다면.

‘사업 시기는 내년 여름이나 가을. 미하일이 작위 승계식을 치를 때에 맞춰서.’

대상은.

‘우선 오브론 대공. 작위 승계식에 초대할 때 게이트를 처음으로 선보이는 거야.’

힐데가르트의 입꼬리가 스멀스멀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흥분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물론 몇 가지 거쳐야 할 관문이 있기는 하다.

과거에도 이동 게이트 마법에 대한 시도는 몇 번 존재했으나, 빈번히 연구가 무산되었다.

사업을 이끌어갈 만큼 뛰어난 마법사도 없는 데다, 막대한 지원을 지지해 줄 기반이 없었기 때문이다.

‘뭣보다 검은 별 교단 토벌 때문에 연구를 계속할 수가 없었지.’

실력 있는 마법사들이 느긋하게 마탑에 틀어박혀 연구만 할 수 없었던 시대였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달라. 나라면 할 수 있지!’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이동 마법을 연구했던 마탑의 연구 자료를 확보해야 했는데…….

‘그게 마침 우리 본가 저택에 남아있는 걸 봤단 말이지!’

전생의 힐데가르트가 연구했던 마법 자료며, 마탑에서 흘러들어온 자료 일부가 아직도 본가 저택에 남아 있었다.

레온하르트가 여동생이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안고 보존해 두었기 때문이다.

먼지만 쌓인 채 방치된 그 자료가 지금은 천금보다 귀했다.

‘가만, 연구가 어디까지 진행되었더라?’

힐데가르트는 한동안 차분히 생각하며, 해나가야 할 일을 머릿속으로 그려 나갔다.

‘대단위 이동 마법까지는 연구가 진행되었지? 그럼 마저 마법식을 완성하면 되겠다.’

마석며 여타 고려할 부분들이 있기는 해도, 마법식만 완성되면 절반은 해결하면 된다.

이만한 사업은 또 없다는 게 그녀의 판단이었다.

“카유크가 이런 아이디어를 줄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게이트 평생 무료 이용권이라도 줘야 하나?”

게다가 이 사업은, 잘 풀린다면 사람들이 마법을 다시 보게 될 계기기도 했다.

“최소한 마법이랑 흑마법은 쉽게 구별할 거야.”

힐데가르트는 잠시 레디스를 떠올렸다.

실내에서 눈이 내리는 광경이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던 레디스.

힐데가르트는 마법으로 누군가를 기쁘게 해줄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어쩌면 레디스가 그랬던 것처럼.’

가족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아하는 악기를 마음껏 연주할 수 있어서, 실컷 여행을 다닐 수 있어서.

마법을 통해 많은 사람이 기뻐하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기쁨을 주는 것들은 응당 사랑받게 마련이다.

힐데가르트는 어느새 주먹을 꼭 쥐었다.

사업을 준비할 시간은 충분하다. 방향 또한 확실했다. 그러니 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좋아, 한번 해보는 거야.”

그녀의 눈동자가 촛불처럼 빛났다.

어둠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는 환하고 아름다운 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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