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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공녀님 (47)화 (47/166)

46화

키스케는 서고 2층 책장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노바에게 어떤 책을 빌려줄지 고민하던 때였다.

사다리에서 내려오던 그의 걸음이 멈췄다.

“……이게 왜 여기 있어?”

그의 시선이 한곳에 머물렀다.

책 제목은 <마도학Ⅰ>이었다.

책장을 보니 그 근처가 전부 마도학에 관한 책이었다.

키스케는 괜스레 다른 책을 뽑아보며 주의를 돌리려 했다. 하지만 한 번 시선이 꽂히니 자꾸만 관심이 갔다.

‘한 번 생각해 봐. 마법사가 되면 좋은 이유가 백한 가지쯤 있어.’

‘나를 매일매일 만날 수 있지!’

결국 책을 덮은 키스케가 다시 마도학 서적이 꽂혀 있는 자리로 돌아왔다.

“……뭐야. 책 커버는 왜 또 보라색인데.”

괜히 생각나게.

키스케는 투덜거린 뒤 책을 뽑아 들었다.

힐데가르트 같은 사람을 괴짜라고 하는 게 아닐까?

그 이상한 마법사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시도 때도 없이 키스케의 마음속으로 벌컥벌컥 쳐들어왔다.

뜬금없을 때 떠올라서 곤혹스럽곤 했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다.

실없는 말로 저를 실소하게 하는 그녀가 웃길 때도 있었고, 황당하지만 귀엽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아주 조금은 호감이 생겼다는 걸 인정한다.

하지만…… 마법을 배워보라니.

‘내용은 생각보다 쉽네.’

키스케는 책의 목차를 읽어 내려갔다.

삽화가 많은 책이라 읽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그는 한 장씩 페이지를 넘겼다.

한 장은 빠르게 열 장이 되었고, 열 장은 금방 스무 장이 되었다.

노바가 서고의 문을 열고 들어온 건 그때였다.

“키스케 전하?”

“아.”

문이 열리기 무섭게, 키스케는 마치 나쁜 일을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책을 도로 집어넣으려 했다.

“노, 노바. 왔어?”

“왜 그러십니까?”

“내가 뭘?”

“뭔갈 급하게 숨기셨잖아요?”

“……봤어?”

“네.”

“그렇게 먼 거리인데?”

“기사는 동체 시력이 좋아야 합니다.”

노바가 자신의 관자놀이를 톡톡 쳤다.

2층으로 올라온 그는 키스케에게 <제국어 Ⅳ>를 내밀었다.

“책 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무슨 책을 읽고 계셨어요?”

노바는 금방 그의 손에 든 책을 파악했다.

“마도학책을 읽고 계셨군요?”

“착각하지 마. 그냥 눈에 띄어서 꺼내 본 거야.”

노바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꾹 참으며 물었다.

“내용도 쉬워서 별거 없던데 뭘.”

“이야, 꼼꼼하게 읽어보신 거네요? 역시 마법에 관심이 생기신 거죠?”

“…….”

“그렇게 보지 마세요. 관심이 없다면 눈에 띄었을 리 없잖아요.”

노바가 순한 양처럼 웃었다.

“혹시 힐데가르트 공녀님이 불편하십니까? 그래서 그분께 마법을 배우는 게 내키지 않으시는 건가요?”

“그런 거 아니야. 갑자기 왜 그런 말이 나와?”

“우와.”

노바는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흘렸다.

“그건 무슨 반응이지?”

“죄송합니다. 전하께서 ‘당연히 불편하지!’ 이렇게 대답하실 줄 알았거든요.”

“방금 그거 날 따라 한 거냐?”

“별로 안 닮았나요?”

“다음엔 연기 교본을 빌려 가.”

혹평을 날린 키스케가 다른 책장 앞으로 도망쳤다.

노바는 느린 걸음으로 그를 따라갔다.

“좋은 기회일 겁니다. 싫어하는 척하실 필욘 없잖아요.”

“아카락시아 영지까지 내려가서 배우라고? 내가 그렇게 한가해 보여?”

“네. 실제로도 한가하십니다.”

이 점만큼은 키스케의 일과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노바가 단언할 수 있었다.

할 말이 궁색해진 키스케는 책을 훑는 척 시선을 피했다.

“내가 굳이 이곳을 떠나서 마법을 배울 이유가 없잖아. 대체 왜 그러는 거야? 내가 그렇게 모자란 애로 보여?”

“아뇨. 전하께서는 우수하시죠.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럼 왜?”

“글쎄요. 굳이 이유를 대자면…….”

노바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던 것도 잠시.

“이 궁에서는…… 전하가 외로워 보여서 마음이 쓰입니다.”

“외로워 보인다고? 내가?”

키스케가 코웃음으로 그 말을 부정했다.

“네가 잘못 본 거야. 그럴 리 없잖아.”

“하지만 좌절을 모르는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모르고, 불운을 모르는 사람은 무엇이 행운인지 모르는 법입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노바는 키스케의 날 선 반응에 풀 죽지 않았다.

그가 입을 뗀 건 약간의 침묵이 흐른 뒤였다.

“전하. 저는 여섯 걸음이면 끝나는 철창 안에서 10년 가까이 살았습니다. 전하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곳이 비좁다고 느끼지도 못했지요.”

노바플랑카스타체는 검투장 노예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노바는 철들 적부터 매주 사투를 벌이기 위해 철창 밖으로 나서는 아버지를 기다렸다.

그러다 그의 아버지가 돌아오지 못하게 되자, 다음부터는 노바가 철창 밖으로 불려 나갔다.

키스케가 노바를 그곳에서 구해주기 전까지는 그것이 노바의 세상이며, 삶의 전부였다.

“자신이 살던 세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익힌다는 건 포용할 수 있는 세계가 넓어진다는 걸 의미합니다. 저는 전하를 만나서 배우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어요.”

자신의 세계가 비좁다는 걸 인정하지 못하는 자는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곳에서 만족하며 주저앉기 때문이다.

반면 자신의 세계가 비좁다는 걸 아는 자들은 견문을 넓히고 학식을 쌓음으로써 마음속 우주를 끝없이 확장한다.

그리고 우주가 넓은 자는 외롭지 않다.

드넓은 우주에서 반드시 무언가를 만나게 된다.

사람이든, 진리든.

노바의 경우에는 주군이었다.

그에 비하면 키스케는 태어났을 때부터 황족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학문을 익혔다. 이미 수많은 스승이 그를 거쳐 간 뒤였다.

하지만 키스케의 우주는 여전히 비좁았고, 때로는 쓸쓸했다.

노바는 못내 그 점이 마음에 걸렸다.

“제가 마법을 배워보시라고 권하는 건, 전하의 우주가 넓어지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외롭지 않기를.

이 너른 우주에서 반드시 무언가를 만나서 행복해지기를.

그것이 노바의 바람이었다.

“물론 싫다고 하시면 억지로 권하지는 않겠지만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

“너무 어려웠나요?”

“몰라. 알 듯 말 듯 해. 그리고 넌 역시 시종 기사치고는 너무 건방져.”

“죄송합니다.”

“……그런 점이 마음에 들긴 하지만.”

노바는 종종 아리송한 말을 꺼낼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이 저를 위해주는 진심이라는 건 느낄 수 있었다.

“혹시 정말 마법을 배우기 싫으신 거라면 더는 억지로 권하지 않겠습니다.”

“……누가 그렇대?”

키스케는 고개를 휙 돌리더니 샐쭉한 얼굴로 말했다.

“마법을 배우는 건 상관없어. 영지에 내려가는 것도 할아버지가 결정하신 거라면 어쩔 수 없지. 다만…….”

“다만?”

“……그 녀석에게 휘둘리는 게 싫어.”

키스케는 자꾸만 제 마음을 헤집는 소녀를 떠올렸다.

“그 녀석이요?”

“힐데가르트 말이야. 세상에 어느 황족이 황궁 온실에 침입한 마법사 밑에서 제자 노릇을 해?”

힐데가르트가 들었다면 네 할아버지에게 물어보라고 소리쳤을 말이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건 노바뿐이었고, 그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힐데가르트 공녀님께서 그러신 적이 있었습니까?”

“……말이 그렇다는 거야. 그런 게 있어. 넌 몰라도 돼.”

말이 헛나왔다. 키스케는 다시 입을 다물어버렸다.

“일단 이거나 들어.”

무슨 변덕의 바람이 불었는지, 키스케는 첫 번째 책장으로 돌아가 마도학 서적을 모조리 꺼냈다.

졸지에 열 권도 넘는 책을 품에 안은 노바가 식은땀과 함께 웃음을 흘렸다.

“힐데가르트 공녀님은 잘 지내시겠죠?”

“궁금하면 찾아가 보든가.”

“제가 키스케 전하를 놔두고 어딜 가겠습니까. 전하를 따라가는 거라면 모를까.”

노바는 그렇게 말하곤 일부러 과장된 한숨을 쉬었다.

“마지막으로 뵈었을 땐 안색이 안 좋았는데 괜찮으실지 모르겠네요.”

“…….”

사실 그건 키스케도 신경 쓰였다.

마력 고갈이란 증세를 알려준 의원이 벌써 공녀가 궁을 떠났냐며 놀란 부엉이처럼 반응했었기 때문이다.

“이틀 뒤 스칼렛 스워드 결승전이 열립니다.”

키스케의 걸음이 멈췄다.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그럼요. 혜성같이 나타난 레디스 아카락시아 공자가 승승장구하고 있다며 모두 소란입니다.”

처음 듣는 소리였다.

“그래서 말인데, 직접 보러 가시는 건 어떠십니까?”

“내가? 결승전을?”

“네. 마침 폐하께서 명령하신 게 있으니까요.”

“…….”

“어떠십니까?”

키스케는 잠시 망설이다가 아주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노바가 바라 마지않던 변화의 시작이었다.

* * *

이튿날 랑베르 거리의 오브론 대공저에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편지의 발신지는 무려 황실이었다.

빳빳한 종이 위에는 힐데가르트를 황태손의 마도학 선생으로 임명한다는 내용이 적혀져 있었다.

이른바 정식 임명장이었다.

“와, 축하드려요. 아가씨!”

“고마워, 로빈.”

“이거 액자에 걸어놔야 하는 거 아닐까요?”

“그럴 것까지야.”

키스케를 가르치는 건 그가 정식으로 황태자가 되기 전까지일 테니 길어봤자 2, 3년 정도겠지.

“어어, 그런데 황태손 전하께 마도학을 가르치시는 거라면 계속 수도에서 머무르셔야 하는 건가요?”

“그건 아니야. 전하께서 휴양차 아카락시아 공작령으로 내려오신다고 하네.”

“헉…….”

로빈의 눈이 접시만큼 커졌으나 힐데가르트는 담담했다.

편지는 대부분 막시밀리언과 사전에 입을 맞추어둔 내용이었다.

그래서 그녀를 내심 기막히게 한 건 다른 지점이었다.

‘역시. 사람은 줄을 잘 타고 태어나야 한다니깐.’

이게 도대체 얼마람?

편지에는 다분히 막시밀리언의 입김이 들어가 있는 액수가 수업료로 책정되었다고 적혀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키스케의 교육에 들어가는 비용 전반을 모두 황실에서 부담한다는 말도 함께였다.

‘수업에 필요한 교재나 준비물 걱정도 한결 덜었네.’

힐데가르트는 더불어 남모를 뿌듯함을 느꼈다.

‘고맙다, 막스. 제자 하나 잘 키워두니 환생해서도 엄청 든든하네.’

한결 어깨가 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때 편지지 사이에 끼워져 있었던 쪽지 한 장이 팔랑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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