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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공녀님 (48)화 (48/166)

47화

“……응?”

[곧 만나러 갈게.

추신 : 착각하지 마. 딱히 너 때문에 배우겠다고 한 게 아니니까.]

쪽지를 주운 힐데가르트는 실소를 흘렸다.

‘은근히 귀여운 구석이 있네.’

키스케가 써서 보낸 게 분명한 쪽지였다.

추신만 없었으면 괴도의 예고장으로 오인하기 좋은 내용이다.

게다가 추신이 본문보다 세 배는 더 긴 걸 보니 어지간히 강조하고 싶었던 모양이지.

“아가씨? 그건 뭐예요?”

“아무것도 아니야.”

그녀가 둘러댔다.

“그보다 얼른 외출 준비를 하자.”

오늘은 드디어 검술 대회 결승이 펼쳐지는 날.

마지막 한 경기만을 남겨두었기에 시합은 정오에 열리지만, 레디스는 한발 먼저 카유크와 함께 경기장으로 떠난 상태였다.

힐데가르트는 편지와 쪽지를 정리한 뒤 곧장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평소라면 간단히 가리발디 셔츠와 볼레로에 스커트 차림으로 나가겠지만, 오늘은 중요한 날이다.

그녀는 고심 끝에 연한 새먼 핑크빛 크리놀린 드레스를 골랐다.

깃털이 달린 머리빗 장식과 셰퍼더스 햇(Shepherdess Hat) 중에서는 간편하게 후자를 택했다.

납작한 밀짚모자는 붉은색 공단 리본과 하얀색 모조 꽃으로 오밀조밀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덕분에 힐데가르트의 매끈하고 예쁜 얼굴이 더욱 돋보였다.

프린지로 장식한 새틴 하프 부츠와 하얀 레이스 장갑, 오렌지색 패턴이 들어간 실크 양산까지.

‘우리 애가 우승하는 날인데 대충 입고 갈 순 없지!’

흡사 아카데미 졸업식에 참관하는 학부모의 다짐과 다름없었다.

“아가씨! 준비다 되셨……?”

“다 됐어!”

“……단단히 준비하셨네요?”

“그래? 그렇게 보여?”

힐데가르트는 일부러 풍성한 치맛자락을 쥔 채 팽그르르 한 바퀴를 돌았다.

로빈은 무심코 손뼉을 쳤다.

“미하일은?”

“준비가 끝나셨는데 아무래도 아가씨에 비하면……. 으음…….”

“그럼 다시 가서 갈아입는 걸 도와줄래?”

힐데가르트가 단호히 명령했다.

“오늘은 레디스가 주목을 살 텐데 우리가 형편없는 옷차림으로 갔다간 무슨 소리를 듣겠어?”

다섯 별 가문 중에서도 떨거지.

아카락시아 가문에 대한 그런 말을 듣고 넘길 생각은 이제 추호도 없었다.

“사람을 외견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지만, 때로는 외견으로만 판단하게 되는 순간이 오기도 해.”

그리고 그게 바로 오늘이었다.

힐데가르트의 각오가 전달되었는지 로빈은 안색을 달리하며 방을 나섰다.

덕분에 준비 시간이 조금 더 길어졌지만 상관없었다.

얼마 후 몰라보게 꾸민 남매가 사이좋게 손을 잡고 마차에 올랐다.

세 사람을 태운 마차는 금방 목적지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리기 무섭게 그들에게 시선이 쏟아졌다.

수군거림도 함께였다.

“어머? 아카락시아 공작가네요. 남매가 예쁘기도 해라.”

“저것 봐요, 내가 말했잖아요. 공작가가 망했다는 건 다 거짓말이라니까요?”

어떤 말은 듣고 싶지 않을 정도로 선명했다.

“그렇게 큰 가문이 어떻게 쉽게 망하겠어요?”

“그래도 선대 공작 부부 둘 다 병으로 죽었으니……. 망했다는 소문이 돌 만도 하지.”

“애들끼리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 불쌍해라.”

몇 쌍의 눈이 남매를 흘끔거렸다.

“애초에 아카락시아 공자가 우승 후보인데 가문이 망했다면 대회에 나올 수나 있었겠어요?”

“쩝, 역시 소문이었나…….”

힐데가르트는 쑥덕거리는 이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대기실 쪽으로 걸어갔다.

“레디스!”

“오빠, 우리 왔어!”

대기실에 있던 레디스와 카유크는 깜짝 놀랐다.

“어서 와. 근데, 어…….”

“우와, 두 사람 다 오늘은 너무 멋지게 입은 거 아니에요?”

힐데가르트는 싱긋 웃을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의복이란 단순히 몸에 걸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줄 때가 많다.

‘보는 눈이 많으니 그만큼 신경은 써야지.’

검술 대회에 참가하는 레디스야 규정 복장이라는 게 있다지만, 참관하는 사람까지 후줄근한 차림새로 대충 입고 갈 필요는 없었다.

레디스는 힐데가르트의 허세 아닌 허세가 웃긴 눈치였다.

하지만 성의 있게 차려입은 모습이 기분 나쁠 리 없었다.

옷차림에 담긴 성의란 만나는 사람을 위한 배려기도 했으니까.

“오빠! 이길 자신 있지?!”

“대뜸 그것부터 물어보냐?”

“그게 제일 중요하잖아! 중요한 게 제일 중요해!”

레디스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막무가내 기질은 전보다 더 심해졌네. 우승 못 하면 집에서 쫓아낼 기세인데 어떡하냐. 실은 자신 있어.”

“그렇지, 그렇게 나와야지! 그래야 우리 오빠지!”

“힐데 기대가 너무 커서 지면 너 집에도 못 들어오겠다.”

지켜보던 미하일도 킥킥거리며 한마디를 거들었다.

“그럼 우린 객석에서 응원할게!”

머잖아 세 사람은 로빈이 맡아둔 자리로 돌아갔다.

선수 관계자를 위해 따로 준비된 객석이었다.

눈이 많다는 걸 의식했는지, 미하일의 등허리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힐데가르트도 차분히 경기장을 내려다보았다.

* * *

레디스는 차분하게 검을 들고 자세를 취했다.

떨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결승 상대인 팔엔을 눈앞에 두니 손에 힘이 들어갔다.

‘침착하게 하자.’

준우승만으로도 굉장한 쾌거지만, 거기서 만족할 생각은 없었다.

레디스는 힐데가르트가 앉아 있는 자리를 흘끔 보았다.

여동생은 저와 마찬가지로 반드시 우승을 바라는 얼굴이었다.

중요한 게 제일 중요하다는 말마따나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기필코 이기면 그만이니까.

핸드벨 소리와 함께 레디스가 먼저 움직였다. 그가 빠르게 검을 휘두르며 치고 나갔다.

팔엔은 어렵지 않게 공격을 막아냈다.

그러자 레디스의 움직임도 따라서 변했다.

캉! 카강! 캉!

베기에서 후려치기로, 후려치기에서 찌르기. 유수처럼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우, 우와!”

“방금 봤어?!”

레디스의 집중력은 점차 최고조로 내달렸다.

흡사 볏단을 쥔 사람처럼 흐느적거리던 선수들과는 움직임부터가 달랐다.

객석에서는 알아듣기 어려운 응원이 난무했다.

팔엔은 이마를 노리고 떨어지는 검의 궤적을 읽고 황급히 방어했다.

그러나 레디스는 그런 움직임을 예상한 것처럼 훌쩍 멀어졌다. 그는 팔엔이 주춤한 틈을 타 사각을 찔렀다.

끼기긱!

칼날끼리 맞닿으며 귀 아픈 소리가 났다.

건조한 흙냄새를 맡으며 레디스의 검날이 방향을 바꿨다.

팔엔이 놀라서 몸을 빼자 그는 솜씨 좋게 따라붙었다.

승부는 차근히 기울어졌다.

레디스의 승리를 의심하지 못할 정도로 형세가 분명해진 그 순간.

힐데가르트의 입가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역시 기초가 중요하다니까.’

팔엔의 검이 레디스의 어깨를 노리고 날아왔다.

그러나 속도도, 근력도 우직하게 수련해 온 레디스와는 비교도 못 할 만큼 느렸다.

레디스는 찌르는 검을 세게 쳐냈다.

“하압!”

역공은 한순간에 일어났다.

중심을 잃은 팔엔이 볼썽사납게 지면 위를 뒹굴었다.

승리의 여신이 누구를 택했는지 명백해지는 순간이었다.

레디스가 팔엔의 가슴에 검을 겨눴다.

“……제가 졌습니다.”

레디스가 검을 거두기도 전에 떠들썩한 환호가 경기장을 뒤흔들었다.

상대를 일으킨 레디스가 악수를 끝내고 객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어? 눈이다!”

승자를 위한 종이 꽃가루 속에 하얀 눈송이와 싸리꽃이 함께 흩날렸다.

누가 했는지는 금방 알았다.

“레디스 오빠!”

무던히도 제 속을 썩였던 여동생이 활짝 웃고 있었다.

레디스는 저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눈물도 핑 돌았다.

그는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큰 함성 속에서 여동생을 빤히 보았다.

‘힐데.’

작년 이맘때엔, 이런 순간이 올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순수하게 승리를 기뻐하게 될 날이 올 거라고는…….

우승하지 못했을 때는 어떻게 될지, 상상하기 싫었다.

하지만 우승해도 상금으로 빚을 갚는 게 고작이라 막막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관중과 가족이 제 이름을 부르며 함성과 박수를 보내는 이때는…….

레디스는 하늘에서 천천히 떨어지는 종이 꽃가루 너머로 힐데가르트를 보았다.

과연 그녀가 없었다면 이렇게 웃을 수 있었을까?

가출을 끝내고 돌아온 여동생은 어느새 몰라보게 어른스러워졌다.

가끔은 든든하다고 느낄 정도였다.

레디스는 더는 막막하거나 외롭지 않았다.

월계관과 꽃다발을 건네받은 그가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환히 웃었다.

지켜보던 힐데가르트가 놀랄 정도로 환한 미소를 품은, 비로소 열네 살다운 모습이었다.

힐데가르트는 대기실로 자리를 옮겼다.

그녀는 레디스를 만나자마자, 그의 등을 두드리며 꼬옥 안아주었다.

시상식과 함께 서서히 장내의 소란이 가라앉고 있을 때였다.

“어? 황실의 깃발이다!”

“키스케 전하?”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설마 황태손이 참관하고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해서였다.

금발의 소년은 앞길을 연 황실 기사들을 제치며 성큼성큼 경기장 위로 올라갔다.

이때만큼은 힐데가르트도 놀랐다.

이곳에서 키스케를 볼 거라곤 예상치 못했는데?

“키스케 라모프 드롯셀마이어 황태손 전하를 뵙습니다.”

“승리를 축하한다, 레디스 아카락시아 공자. 훌륭한 실력이었어.”

“영광입니다.”

키스케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좌중은 좀 전과는 다른 의미로 흥미롭게 경기장을 바라보았다.

어지간한 일이 아니라면 황족을 이토록 가까운 거리에서 볼 기회가 없었다.

“스칼렛 스워드의 폐회에 앞서 황제 폐하의 교지를 전한다.”

제법 그럴듯한 위엄이 있네.

침착함을 되찾은 힐데가르트는 키스케를 그렇게 평가했다.

“발프람의 즐거움을 위해 힘쓰는 이베르타 공작가의 노고를 치하하며, 끊임없는 노력으로 이 자리에 선 두 선수에게도 박수를 보낸다.”

황제의 전언에 듣는 이들 모두가 귀를 쫑긋 세웠다.

“오늘 밤 간단히 황실 연회를 열겠다. 참가자들을 위해 짐이 직접 축하를 전하고자 하니 빠짐없이 참석하기를 바란다. 이상.”

키스케의 말에 사람은 웅성거렸다.

대부분 놀라움이 담긴 반응이었다.

“폐하께서? 직접 연회를?”

“건강이 안 좋으시다고 들었는데?”

“잘못된 소문이었나 봐! 건강하신 거 같은데?”

황제의 나이가 아흔일곱이나 된 탓에 그의 건강사는 언제나 관심의 대상이었다.

신문에서도 막시밀리언의 건강사에 관해 왈가왈부 말이 많았건만.

‘막스, 머리 좀 썼는데?’

연회에 직접 참석한다니. 뜬소문을 잡기에는 딱 좋은 기회 아닌가.

황제의 교지는 질 나쁜 소문을 한 번에 불식시켰다.

키스케가 경기장에서 내려오자 곧 이베르타 측 사람이 간단한 폐회식을 진행하며 레디스에게 트로피와 상금을 건넸다.

“응?”

그렇게 레디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힐데가르트의 눈썹이 움직였다.

착각이 아니었다. 키스케가 저를 향해 뚜벅뚜벅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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