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공녀님 (49)화 (49/166)

48화

“……키, 키스케 전하. 미하일 아카락시아가 전하를 뵙습니다.”

“카유크 오브론, 전하를 뵙습니다.”

“만나서 반갑군.”

설마 했던 황태손이 직접 이쪽으로 다가올 줄은 몰랐는지 미하일이 매우 놀랐다.

반면 카유크는 한결 침착하게 인사를 올렸다.

키스케는 그 둘의 인사를 모두 손짓으로 받은 뒤 그녀를 빤히 보았다.

“응? 설마 나도 오라고?”

“만나러 가겠다고 했잖아.”

“……아.”

힐데가르트가 뒤늦게 반응했다.

그 말이 이런 의미였어?

“싫다면 안 와도 상관없어.”

“그럴 리가요. 기꺼이 초대에 응하지요, 전하.”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훨씬 안색이 좋아진 힐데가르트였다.

그 모습을 본 키스케는 살짝 안심하고 말았다.

* * *

카유크는 완곡한 연회 불참 의사를 밝히며 저택으로 돌아갔다.

미하일도 내심 부담을 느끼는 것 같았지만, 그녀와 레디스가 연회에 가게 되었으니 당연히 자신도 가야 한다며 마차에 올랐다.

연회의 주인공이자 강제 참가가 결정된 레디스는 어안이 벙벙한 눈치였다.

물론 힐데가르트는 긴장감을 조금도 느끼지 않았다.

“망고 셔벗 먹고 싶다……. 키스케, 연회 때 망고 셔벗 나와?”

진짜 전생에 황궁을 자기 집처럼 드나든 게 아닐까?

오죽하면 마차 맞은편 자리에 앉은 키스케가 그런 생각을 했을 정도였다.

“망고 셔벗 말고도 중요한 게 있지 않아?”

“으음, 하몽?”

“먹을 게 제일 중요해, 넌?”

“가서 술을 마실 수도 없잖아.”

“……나이가 몇 살인데 술타령인지.”

“나이랑은 상관없답니다.”

키스케의 핀잔에도 힐데가르트는 느긋한 반응을 보였다.

힐데가르트는 키스케보다 일찍 연회장에 들어섰다.

연회장에는 유리로 만든 촛불 샹들리에가 달려 있었는데, 화려하면서도 아름답고 황홀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귀빈들은 차가운 상그리아로 목을 축이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이 검술 대회 참가자의 가족이었다.

그들은 경기 잘 봤다, 네 자식 참 잘하더라, 그런데 내 자식은 더 잘하더라, 하며 덕담과 잘난 척을 오가느라 바빴다.

물론 아무리 잘해도 레디스만큼은 아니었다.

우승자인 레디스의 주변으로 순식간에 사람이 몰렸다.

“굉장한 실력이셨습니다, 레디스 공자.”

“다시 한번 겨뤄보고 싶은데, 혹시 괜찮으시면 다음에 저희 영지에 방문해 주시겠어요?”

“소공작님도 굉장히 뿌듯하시겠군요.”

덕분에 미하일까지 덩달아 분주한 모습이었다.

힐데가르트는 두 오빠를 향한 반응이 사뭇 달라졌음을 느꼈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과분한 칭찬 감사합니다.”

“혹시 사냥 대회에도 참가하시는지요?”

“아직 예정에는 없습니다.”

제법 의젓하게 대답하는 레디스였다.

힐데가르트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오빠를 따라 연회에 온 열두 살짜리 흉내를 내고 있었지만, 귀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활짝 열려 있었다.

그녀의 입꼬리가 스멀스멀 올라갔다.

‘그래, 얼른 더 칭찬해라, 더! 더!’

얼른 말해, 좀 더 칭찬해!

우리 애들이 잘났다고 마구 칭찬하라고!

힐데가르트가 바랐던 대로, 검술 대회를 개최한 이베르타 공작가 측에서 직접 다가왔을 때는 입꼬리가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다.

“만나서 반갑군! 이베르타 공작 대리 로렌조라고 하네! 여기서 아카락시아 가문을 만날 줄이야!”

마흔 초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는 미하일과 레디스에게 번갈아 가며 악수를 청했다.

“대회에 참가해 주어서 고맙군! 레디스 공자, 덕분에 보는 맛이 좋았어! 실력 참 대단하던데? 응? 하하하핫!”

“감사합니다.”

“다음엔 나도 한번 상대해 주게! 하하하핫!”

호쾌하게 웃던 남자는 레디스의 등을 두드리는 것도 모자라 건배를 하자며 잔을 재촉했다.

“우리 제국에 나타난 또 다른 혜성을 위하여!”

로렌조 공작 대리의 영향으로, 세 남매의 주변은 눈 깜짝할 사이에 시끄러워져 버렸다.

하지만 활짝 열어둔 귀에 칭찬만 들려오는 건 아니었다.

“실력이 대단했죠, 레디스 공자.”

“그러게요. 솔직히 말하면 좀 놀랐어요. 우승 후보로도 꼽힌 적 없었잖아요?”

“아카락시아 공작가가 워낙…… 뭐 그랬으니까요. 아직 건재한 모양이지만?”

건재하거든! 멀쩡하거든!

힐데가르트는 하마터면 쑥덕거리는 쪽을 매섭게 쏘아볼 뻔했으나 가까스로 참았다.

‘참자, 이런 일로 일일이 화내면 끝도 없어.’

오늘은 좋은 날이다.

이런 날 자진해서 가문에 먹칠했다가는 두고두고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다.

얼마 후 로바르네 2황자비와 카라딘 황태손이 참석하자, 연회는 더욱 떠들썩해졌다.

“음? 2황자비 전하가 오셨군! 나는 먼저 인사하러 가보겠네!”

떠들썩하게 웃던 로렌조가 두 사람의 손을 붕붕 흔들었다.

그는 언제 친밀하게 굴었냐는 듯 매몰차게 등을 돌렸다.

“우리도 인사드려야겠지?”

“좀 나중에 가자. 지금은 정신없어 보여.”

“일찍 가서 인사드리는 게 낫지 않냐?”

“그건 그런데 어차피 순서가…….”

그때였다.

로바르네 2황자비와 함께 연회장으로 들어온 사람 중 한 명이 힐데가르트 쪽으로 다가왔다.

“어라? 마우제네 랑케르트 군수(軍帥)……?”

랑케르트?

못마땅한 이름에 반응한 힐데가르트의 시선이 확 돌아갔다.

뚜벅뚜벅 걸어온 여자는 어두운 호두나무로 깎아둔 조각상처럼 짙은 눈썹과 매서운 눈매가 도드라지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다가올수록 주변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화살처럼 꼿꼿한 시선은 곁눈질 하나 없었다.

마침내 코앞에 선 그녀의 걸음이 멈췄다.

“랑케르트 공작가의 마우제네입니다.”

“……아.”

“안, 안녕하세요, 마우제네 군수님.”

“오늘은 공작 대리로 출석했으니 마우제네로 불러주시면 됩니다. 반갑습니다.”

삭막한 인사였다.

기백에 눌린 미하일과 레디스가 부랴부랴 제 소개를 마치는 동안, 힐데가르트는 갸름한 눈매로 그녀를 훑었다.

“이쪽은 제 여동생…….”

“힐데가르트 아카락시아입니다.”

미하일은 제 여동생의 말투가 딱딱해진 게 긴장한 탓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힐데가르트는 그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로 긴장하고 있었다.

‘무슨 용건이지?’

단순히 인사를 하러 온 건가?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날 선 눈빛이었다.

앞선 이베르타의 로렌조가 얼마나 친밀한 척 굴었던가.

‘예감이 좋지 않아.’

마우제네는 담백하게 인사를 받았다.

“레디스 아카락시아 공자. 검술 대회 우승을 축하드립니다.”

“아, 감사합니다.”

“다행입니다. 아카락시아 공작가가 연회에 참석하다니.”

마우제네는 미하일을 벽에 걸린 미술품처럼 훑었다.

그건 마치 미술품이 이곳에 걸려 있을 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따져 보는 눈빛이었다.

“소공작께서 영지 운영에 완전히 손을 놓은 건 아니신가 보군요.”

“네?”

불안한 예감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마우제네가 미하일을 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그간 아카락시아 공작가는 한 번도 공회에 출석하지 않으셨잖습니까?”

‘……!’

힐데가르트의 얼굴이 그대로 굳었다.

다섯 별 공작가는 드높은 지위만큼이나 몇 가지 의무를 짊어진다.

그중 하나가 바로 황제가 소집하는 공회(公會)에 출석하는 일이다.

공회란 공작가 수장들이 참석하여 국정을 논하고 협력하는 자리다.

한마디로 수뇌부 회담이라고나 할까.

각 가문에서 반드시 한 명씩 참석할 의무가 있었는데, 서로 가겠다고 나섰으면 모를까 결석하지 않는 게 공회의 철칙이었다.

“공회 출석은 공작가와 귀족의 책임이자 의무인데 말입니다. 설마 여기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아, 그게…… 죄송합니다. 그동안 가문 사정으로…….”

“어떤 사정입니까? 설마 후견인 문제였다고 둘러댈 생각은 아니시겠죠.”

마우제네는 기다렸다는 듯 선수를 치며 미하일의 뒷말을 잘랐다.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는 이베르타 공작가도 공회에 결석한 적은 없습니다. 혹시 아카락시아 공작가만 예외일 이유가 있습니까?”

미하일은 입을 열었다가 닫길 반복했다.

어떻게 직접 말하겠는가.

가주 인장 반지를 이모에게 넘겨서 완전히 실권을 놓고 말았다는 걸.

게다가 설명하기에는 좋지 못한 장소였다. 지나치게 많은 이목이 쏠려 있었다.

미하일은 아찔했다.

한 발자국 물러난 사람들이 랑케르트와 아카락시아 공작가의 충돌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어서였다.

“심지어 국정에 태만한 몬테를로 공작가에서도 가주 대리를 출석시키건만. 무슨 생각입니까?”

“이 자리에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이해해 주시면…….”

마우제네의 목소리에서 짜증이 스며들었다.

“똑바로 설명하세요.”

“마우제네 님.”

“설명하지 못한다면 랑케르트는 다음 공회 때 정식으로 아카락시아의 의석 반납을 건의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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